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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었다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이야기 (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2.08 17:07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누가복음 1:30-33)

오늘 전해드리는 말씀은 수태고지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신에 의한 폭력적 임신이라는 의미로 수태고지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동정녀 임신 사건을 생각해본다면 분명 뭔가 잘못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대림절에는 이 사건 자체가 잘못되었는지, 구약성경의 말씀에 위배 되는 사건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말씀을 전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는 마리아가 신에 의해 겁탈당했다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현대인의 시각이자,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지도 않았던 사상으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조금 잘못되었단 생각이 듭니다. 다만 여성을 낮게 여기는 사상을 성경을 통해 지금까지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를 통한 말씀 전달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본 말씀 속에서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 되는 때에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우리 성경에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누가복음에 나타나는데, 다니엘서에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알 수 없는 말씀을 해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말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Getty Image

천사가 나타나서 어떠한 비밀을 전해주거나 이를 해석해주는 것은 요한계시록 같은 묵시문학이 갖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예전에 바벨론 포로기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포로기에 대한 서로 다른 예언이 난무했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행위에 전체적인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국 포로기 이후에는 예언자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더이상 예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였는지, 신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문학에서는 예언자가 아닌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여러 천사 중에서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던 천사가 가브리엘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슬람교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알라의 말씀을 전한 천사도 가브리엘입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는 ‘지브릴’로 불립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천사의 등급까지 정해져 있는 듯 합니다. 가브리엘은 구약에 나오는 ‘그룹’의 수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명칭은 언어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게 되고, 천사의 등급은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이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시대에는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나 알아두면 써먹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그녀의 임신 사실, 성령으로 임신 되었음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는 이 사건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장치가 됩니다. 앞서 예언에 대한 의심을 말씀드렸는데, 예언자들의 전한 예언의 말씀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예언자가 하나님의 참 예언자인지 사람들이 분별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신의 예언에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하나님께 소명 받은 이야기를 예언서 앞부분에 넣곤 합니다.

하지만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면, 이 말씀은 확실한 말씀이 됩니다. 천사 자체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전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사건임을 말하면서 복음서는 시작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세례요한의 잉태 사건이 구약 예언서를 통해 보증받고 있다면, 예수님 잉태 사건은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보증받고 있다고 누가복음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구원의 이름, 예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 있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상당히 많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천사가 전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은 이사야 7장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은 천사를 통해 이 이름을 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본래 이름을 말합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이기 때문에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름의 뜻을 생각해보면 누가복음이 왜 이 이름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어 ‘이에수스(Ἰησοῦς)’이고, 이는 히브리어 ‘예호수아(יְהוֹשֻעַ)’가 헬라어로 바뀐 결과입니다. 예호수아는 구약성경에 몇몇 인물이 나타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인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이름입니다. 민수기 13장 16절을 보면,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아(ישׁע)’에서 파생된 단어로, ‘구원’을 뜻합니다. 모세는 ‘구원’이라는 뜻의 ‘호세아’에 히브리어 ‘요드(י)’를 붙여서 ‘야훼’라는 의미를 첨가합니다. 즉 ‘야훼가 구원이다’, ‘야훼가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으로 바꿔줍니다.

마태복음이 하나님께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당시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던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계속 보게 되겠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의 태어나심 자체가 구원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린 것도 과장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그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합니다.

제가 수업 시간에 들었던 내용이라 정확한 출처는 아직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아마도 유대인 미쉬나에 나오는 내용으로 생각되는데, 기원전 1-2세기 경에는 메시아를 열망하는 사상이 극도로 치달았던 때여서 임신을 한 여성들은 혹시 자신의 아이가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고 엄청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엘리사벳이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봤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 사실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엘리사벳의 확인을 받은 후에 마리아는 하나님을 향해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마리아는 분명 자신이 메시아를 잉태했음에 기뻐했습니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했다기보다 이제야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에 기뻐했습니다.

어떤 메시아를 원했는가?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점은 한 가지입니다. 이들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 아이가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던 당시의 여인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메시아를 어떤 존재로 생각했을까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들은 메시아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과 같은 존재’, ‘민중을 이끌 지도자’라는 의미로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은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해방을 이끌어 낼 왕, 지도자라는 의미에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 메시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기 쉽습니다만, 32절에서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마찬가지로 35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칭하다’, ‘부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칼류(καλέω)’의 수동형으로 ‘칭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처녀이지만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점,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되리라는 점,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다윗의 왕위를 주셔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사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우리가 잘 아는 두 가지가 베드로의 고백과 십자가 사건 직후 로마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8장에서 간단하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도 9장에 보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는 특징이 있습니다만 누가복음도 이와 비슷하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에 로마 백부장의 독백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에서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특이하게 누가복음 23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또 누가복음 22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들이고 재판할 때, 그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이 일부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더 극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서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의 판단을 복음서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넘긴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만, 분명한 점은 누가복음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누가복음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예수님은 사람이면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돕고, 이들에게 삶을 허락하고, 이들에게 해방을 주는 분이십니다. 보통 마태복음이 구약성경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누가복음을 자세히 읽다보면, 오히려 누가복음이 구약적인 생각과 사상을 더 많이 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분명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메시아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세례요한의 탄생 이야기에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이르기까지 구약 예언서의 성취와 천사의 예고라는 확실한 메시아, 해방자, 구원자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런 구원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읽어가던 독자들은 마지막에 자신의 그 바람이 깨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민중의 해방자, 로마 속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고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구원하실 왕이 로마의 무력 앞에서 나약하게 죽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허탈감을 느끼고 있는 독자들에게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성경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아라”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던 구원이 무엇인지, 참된 구세주,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의 독자인 우리는 메시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며 말씀을 읽었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음을 마지막에 가서야 지적하면서 누가복음은 끝을 맺습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그런 분이 맞는 것처럼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으며, 어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내 삶에 복을 가져다 주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기도하기만 하면, 나의 고통은 그냥 다 씻어주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니까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고 합니다.

대림절 기간에 우리가 읽게 될 말씀들은 해방자이자 구원자인 예수님에 대한 칭송들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누가복음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이번 대림절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다시금 말씀을 읽어가는 가운데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그런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따르길 다짐하는 대림절 되시길, 하나님의 참된 평화를 깨달아 이 땅에 전하시는 대림절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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