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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진실을 회피하는 방법진실 (1)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2.11 02:05

진실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장 33-37절)

문: 맹세와 서약의 문제가 예수에게 그렇게도 중요했던가?

답: 맹세의 문제는 다만 훨씬 더 중요하고 포괄적인 어떤 것, 즉 온전한 진실성에 대한 출발점일 뿐이다.

문: 위의 예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여기서도 우리는 보다 나은 의가 가지고 있는 혁명적인 원리의 실제로 적용한 하나의 예를 본다. 맹세나 서약 역시 율법에 의해서 세워진 하나의 울타리이다. 맹세는 말과 행동의 진실을 지킨다고는 하나 단지 말과 행위의 특정한 한 단면에 제한된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하나님을 증인삼아 뒷받침한다. 그 진실은 또한 그 특정한 범위 내에서 정당화된다. 그대신 그 범위 바깥에 것은 진실에서 제외된다. 말하자면 무가치한 것으로 된다. 하나님께 맹세한 그 범위 내에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그밖에 모든 것은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아무튼 똑같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냉혹한 논리이다. 그런 논리와 함께 하나님의 진리의 대부분이 전혀 배제된다. 그러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맹세하지 않은)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진실이란 절대적이고 무한한 의무이다. 즉 하나님 자신과 같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문: 하늘이나 그밖에 것들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답: 유대인들은 자주 그렇게 맹세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피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해선 안 되기 때문인가?

답: 그렇기도 하지만 주로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진실 증언의 중요성에 차이를 두었는데, 하늘에 두고 한 맹세는 하나님께 한 맹세보다 덜 중요하고, 땅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늘에 맹세한 것보다 덜 중요하고, 예루살렘에 두고 한 맹세는 땅에 맹세한 것보다 덜 중요하고, 자신의 머리를 한 맹세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 맹세보다 덜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론에서 말하는 결의론(Kauistik: 사회적 관례나 법률, 교회 율법 따위에 비추어 양심의 문제나 도덕문제를 해결하려는 학문 – 역자 주)을 전개시켰다. 즉 그들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아주 진실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 진실해야 할 의무가 덜한지 모든 경우들을 구별했다. 예수는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들이 진실의 준엄함을 회피하기 위해서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대신에 성전의 황금을 두고 맹세하고,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대신에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비난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모든 태도에 대립해서 “너희들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밑에 있다. 너희 모두는 절대적으로 또 분명히 하나님께 진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진실하라는 요구는 피상적인 것에서 근본적인 요구로 된다. 이 요구는 무한히 넓고, 깊고, 높은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진실을 회피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성경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Getty Image

문: 결의론이라는 말은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결의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예수회 사람들에게서가 아닌가? 사람들은 예수회의(결의론적) 윤리에는 상황의 개연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 않는가? 즉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는 확률이 있고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것 같은 상황의 개연성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답: 그렇다. 그것은 예수회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개연론(Probabilismus)이다.

문: 우리가 어떤 진술을 하고 싶어도 마음속에 담고만 있다면 그것은 진술로서는 전혀 효력을 갖지 못하는데 어떤 진술에 대한 이런 심적 보류를 하게 할 수도 있는 소위 지적유보(reservatio mentalis)라는 것도 개연론과 관계가 있는가? 또 혹시 예수회 회원들에게 귀속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리도 역시 개연론과 관계가 있는가?

답: 물론이다. 이 모든 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방법이 특별히 바로 예수회의 원칙이고 관례인지는 결정하지 말고 두고 보자. 아무튼 그것은 진리를 다루는, 즉 진리를 배반하는 매우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런 방법은 우리가 근원에서 진리를 취하지 않고, 즉 양심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취하지 않고, 교회나 성경 같은 정신적인 것이든 (사람들은 교회나 성경을 외부적으로 권위 있는 것으로 대우하고 있다!) 관습적인 도덕을 구비하고 있는 국가나 사회 같은 세상적인 것이든 간에 어떤 외적 권위에서 진리를 붙들거나, 혹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나 도그마로, 인간적 규범으로 만드는, 어떤 “윤리”를 명분으로 한 성찰에서 진리를 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나타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거짓이 아주 쉽게 진리를 대신한다.

문: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다루게 되었을까?

답: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진리를 회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들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리를-이것이 특별히 많은 경우인데-권력을 위해서, 가령 교회의 권력이든, 국가의 권력이든, 공동체의 권력이든 간에 권력을 위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진리를 오용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속임수에 반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의 양심 속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절대자의 진리로 말씀하신다.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 말씀의 힘차고 포괄적인 의미이다. 이것이 거짓에 맞선 진리의 영원한 혁명이다.

문: 그렇다면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그것은 예수의 “윤리”의 원칙을 확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는 이 말은 말장난으로 진실을 회피하려는 것과 그 당시와 오늘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및 신학자들과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언행에서 특히 두드러진 모든 표리부동함을 겨냥하고 있다. 교회의 담화, 신학적 주장, 기독교적 의견, 신앙적 화제 등은 진실을 회피하는, 진실을 조심스럽게 우회하는 이러한 방식을 아주 통례적으로 사용한다. 그런 이야기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외교 용어를 구사하는데, 이런 용어는 그 이야기로 하여금 설득력과 신회를 갖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계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것이 예수의 요구이며 예수의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두철미하게 진실을 말하고 또 진실해야만 한다. 진실은 분명하고 단순한 것이다.

문: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답: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문: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답: 그러한 요구를 하는 곳, 거기에서부터, 즉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실되게 하시고 진리에 복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문: 그렇다면 어떠한 서약이나 맹세, 기원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법정에서 조차도 해서는 안 되는가? 결혼서약도 해서는 안 되는가?

답: 그것은 전혀 당치 않는 소리다. 그것은 그런 서약을 할 때 단순한 진리를 가리는 태양처럼 명백한 하나님의 진리를 애매하게 하는 위험이 항상 있기 때문일 그런 것이다. 맹세하지 않고도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인간을 믿지 않는 곳에서, 거짓 맹세를 하지 못하게 미혹하고, 서약 없이도 진실을 지킬 것이라고, 인간을 믿지 못하는 곳에서 거짓 서약을 못하게 미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태양 아래 있는 곳 어디에서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일만이 진리를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어떤 특정한 형식은 절대적으로 배척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가 넘친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요, 또한 항간에 그럴듯하게 떠도는 예수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문: 맹세와 서약은 그렇다면 무조건 금지된 것은 아니란 말인가?

답: 예수는 그런 어떤 절대적인 금지나 명령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수여자(Gesetzgeber)가 아니라 해방자(Befreier)이다. 그것은 서약과 더불어 단지 하나님과 연관된, 또 그로인한 자유로운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최후의 진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문: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맹세를 금지하고 있는데?

답: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예수의 의미에서의 금지이다. 유대인의 맹세는 어떤 경우이든지 앞뒤가 바뀐 것이다. 하지만 예수란 곧 자유이다. 우리는 예수의 말을 예수의 의미에서 이해해야지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해선 안 된다.

문: 불가피한 거짓말(Notlüge)은 어떤가? 우리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해서 완전한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가? 이 진실은 오해되거나 악용될지도 모르는 곳에서도 완전한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가?

답: 우리는 언제나 진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진실이 발설되어지는 방식도 역시 진실해야 한다. 진실은 그것이 이해되고 시인될 때만 참된 것이다. 진실은 아무렇게나 던져지듯이 발설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은 때때로 그것을 말하기보다는 침묵함으로 인해 더욱 더 값진 것이 되기도 한다. 진실은 또 항상 사랑과 결부되어 있어야만 하고 사랑에서 진실이 나와야만 한다. 사랑이 없는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진실이 없는 사랑이란 것도 물론 없다. 요컨대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선한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 진실을 어떤 형식으로 말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달린 것이다. 진실은 결코 경직된 획일성이 아니고 살아있는 힘이다. 진실은 또한 결코 기성의 처방이 아니고 말씀과 실천을 통해, 특별히 실천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어져야 하는 온전한 인간의 마음가짐(Entstellu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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