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두 아기의 만남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이야기 (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2.15 16:24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누가복음 1:54-55)

오늘은 마리아 찬가라고 불리는 본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사가랴가 세례요한 탄생에 대한 천사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임신하게 됩니다. 세례요한 임신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도 임신한지 6개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가브리엘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떠난 후에 39절을 보면, ‘빨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들어옴과 함께 자신의 뱃속 아이가 기쁨으로 뛰었음을 말해줍니다. 또 엘리사벳 스스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의 태중 아이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마리아는 아직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천사가 자신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 선언했다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지만, 엘리사벳은 이를 알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 고 말함으로 마리아에게 확신을 줍니다.

엘리사벳으로부터 예수님 잉태에 대한 확신을 얻은 마리아는 이제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께 경배의 찬양을 드립니다. 그 찬양이 오늘 본문인 마리아 찬가입니다.

두려워하는 자와 교만한 자

지난주에 누가복음은 표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예수님의 이미지, 민중 지도자이면서 해방자인 예수님의 이미지를 그려나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깨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다시 읽어보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해드렸습니다.

마리아 찬가도 표면적으로 보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되길 바라는 노래입니다. 가장 분명한 이야기가 52절에 나타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입니다.

‘권세 있는 자’, ‘뒤나스테스(δυνάστης)’는 왕이라고 번역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긴 합니다만, ‘통치자’, ‘다스리는 자’ 정도로 번역됩니다. ‘그 위에서 내리치셨다’는 말에서 ‘위’는 아래위 할 때 위가 아니라 ‘왕위’ 할 때의 ‘자리 위(位)’입니다. 헬라어로는 ‘쓰로노스(θρόνος)’이고, 영어 ‘쓰론(throne)’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통치자를 보좌에서 내치셨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권세 있는 자’에 상응하고 있는 ‘비천한 자’는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이 될 수도 있고, 이스라엘 왕 헤롯의 통치로 인해 고난받는 백성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통치자가 로마 황제일지, 헤롯일지, 로마가 이스라엘에 파견한 총독일지 명확하게 밝히긴 어렵습니다만, 분명한 점은 이 노래의 표면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민중 해방자라는 사실입니다.

또 50-52절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교만한 자의 대조, 통치자와 비천한 자의 대조는 로마에 의해 자행된 행위를 연상시킵니다. 주후 39년경 로마 황제인 칼리굴라는 자신을 신으로 자처하며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과 로마인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주후 66년 갈등이 폭발하면서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은 주후 73년 로마의 철저한 승리로 끝나며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로마의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상태, 그 후 그들에 의한 파괴 행위가 자행된 이후에 누가복음은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마리아 찬가에서 말하고 있는 교만한 통치자는 로마를 의미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을 읽어가다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씩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자주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였고, 마리아도 천사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목자들도 자신들 앞에 나타난 천사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을 때,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18장에 나타난 예수님 비유의 주인공인 재판관은 직설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비유이기 때문에 실제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기본적으로 비유는 사람들이 듣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재판관들의 이미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이 비유가 제대로 된 비유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 Jakob and Hans Strüb, 「The Visitation」(1505) ©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Madrid

사람들의 잘잘못을 바르게 가려야 하는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20장 이후에는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이때 이들은 ‘백성을 두려워’합니다(20:19, 22:2). 성전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아닌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려있던 행악자 중 한 명이 예수님을 비방할 때에,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그를 향해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은 말씀이 길어지기 때문에 빼도록 하겠습니다만 간략하게 말해서 이 사람 역시도 민족 해방을 위해서 무언가 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달린 정치범입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무조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방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단순하게 로마라고 생각되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재판관, 대제사장, 행악자를 거쳐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비단 로마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일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재판관이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권위에 취해 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순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과 동일한 정치범으로 처형받는 죄인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신념에만 생각이 굳어졌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배고픈 자를 채우심

다음으로 마리아는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채우신다고 말할 때 사용된 헬라어 ‘엠핌플레미(ἐμπίμπλημι)’는 ‘채우다,’ ‘만족하게 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1차적인 의미로 해석했을 때, 배고픈 자를 채워준다는 말은 배부르게 함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거의 모든 경우 ‘배를 채운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여기에 한 단어를 추가해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게 만듭니다. ‘좋은 것,’ ‘아가토스(ἀγαθός)’입니다.

예수님께서 맛있는 음식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는 선한 것으로 이들을 만족시킨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물질적인 풍요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채우심이 됩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의미의 채우심이 됩니다.

마리아 찬가를 표면적으로 읽어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악한 로마의 권세로부터 또는 잘못된 헤롯의 권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민중 해방자이시며,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의 배를 채우셔서 그들로 부유하게 만드실 분이십니다.

어쩌면 이런 표면적인 의미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인 복과 풍요만을 하나님께, 또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이 그 안에 담고 있는 말씀은 물질적 풍요의 약속이 아닙니다.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부자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너희의 영을 채우시겠다고 하십니다. 현실적 삶은 지금과 동일할지 몰라도, 나를 만난 너희의 영은 만족과 평안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어쩌면 누가복음의 공동체,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의 전 재산까지 바쳐가면서 행했던 가난한 이들을 도운 행동은, 그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한 자선행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나눔의 행위를 통해서 이들의 생각이 변하고, 이들의 영혼이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그들의 신앙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옛적 이스라엘과 약속하셨던 계약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물질적 풍요의 약속이나 세상에서 나를 괴롭게 만드는 적대자들에 대한 전복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내 영혼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상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평안한 상태가 구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말씀

지금 우리는 어떤 말씀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주는 권세와 풍요만을 바라보고 이를 붙잡고 살아가기에, 또 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나만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만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적 풍요를 줄 것만 같은 예수님을 보며, 내 삶이 어려울 때, 이런 어려움을 주는 이들을 다 때려 부수고 나를 해방시켜 줄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시대의 기독교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요즘 유명한 전광훈 목사를 보면 여실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산다는 사람이 하는 표현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 얘기하고자 던진 농담일지라도, 할 수 있는 표현이 있고, 할 수 없는 표현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에 저런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님과 자기는 친구처럼 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난 부모님한테, “아빠 엄마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솔직히 이 표현은 친밀함의 넘어선 과도한 표현입니다. 영화 공공의 적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요? 개인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과 친한 게 아니라 기본 예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광훈 목사의 발언은, 지금 시대의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은 ‘까부는 소리’가 되어버렸고, 내 맘에 안들면 ‘너 죽여버린다, 내가 원하는 얘기만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함께 노력하는게 아니라 우리 반대편은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게 기독교이기도 합니다. “문재인 죽이자, 빨갱이 쳐 죽이자, 동성애자 다 죽이자! 문재인 옹호자, 빨갱이 옹호자, 동성애 옹호자는 앞길을 막아버려야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곳도 기독교입니다. 실제로 주장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의 행동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우리 기독교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읽은 말씀은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포장지를 벗겨냈어야 하는데, 아직도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가롯 유다와 같이 그 놀라운 사건을 인정하지 못한 채 포장지만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포장지를 벗겨내고 그 안에 담긴 참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물질의 풍요만을 따르고, 세상의 폭력적 방식으로 좋은 세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감싸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내 삶에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힘든 일이 있는 그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구원하시고 내 맘에 평안을 주시는 참된 말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에 여러분께서 그 참된 말씀을 발견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또 그리스도가 나신 성탄에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구원이 임하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