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칼럼
일제의 간도대학살은 어떻게 준비되었나1920년 일본 간도대토벌과 한인참변 (1)
이이소 | 승인 2019.12.16 17:44

“NO 아베”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 때, ‘엄마부대’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아베님,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외치는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뼛속까지 일본인인 ‘토착왜구’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우리의 역사 교육의 심각성과 동시에 한국인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신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떠올랐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며 모인 보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의 대표라는 자들이 모여서 만든 ‘뉴 라이트’ 집단의 역사관이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비극적 장면들

21세기 신판 친일파의 이런 주장은 다름 아닌 일본 극우파들의 역사관이다. 또한 일본 극우 정치인들이 일본의 악한 과거를 미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자국 국민들 기만용으로 읊어대는 단골 레퍼토리다. 그런데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일본극우파들의 왜곡된 거짓 주장을 역사 교과서에 넣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거세하고 친일 사대주의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중국 및 아시아 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창씨개명, 일왕사진 경배, 황국신민서사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급기야는 꽃 같은 우리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 징용, 위안부로 끌고 나가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는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만 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만 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1990년 일제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강제연행자 명단 일부를 공개하였는데, 그 숫자는 7만 1476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1991년 초에 학도병 출신의 정기영 씨가 입수한 1947년 일본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전혀 다르다. 1934년부터 패망 때 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에는 그야말로 전쟁의 소모품이 된 징병, 학도병, 위안부 수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듯 식민지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노예처럼 부린 일제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미화시키며 찬양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중심의 ‘뉴 라이트’ 학자 집단이 있는 한국의 현실이 고뇌스럽기 그지없다. 그들이 요지부동한 보호색깔인 반공∙친미주의 옷을 입고 반역사적인 행진을 해도 되는 한국의 현실에 가슴이 먹먹하다. ‘뉴 라이트’ 집단의 친위대 같은 ‘엄마 부대’는 그렇다 손 치더라도 보수 한국교회가 일본을 찬양하는 ‘뉴 라이트’ 운동의 적극가담자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검찰개혁에 반대하며 말씀 왜곡과 거짓 예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자기 집단 기득권 수호를 위한 외침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교회가 사회와 시대를 위하여 바르게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의 도구가 되어 세상을 어둠과 혼란에 빠트리는 죄악을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뉴 라이트’ 와 함께 반 개혁 수구의 깃발을 날리고 있는 보수 교회와 교우들에게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1920년 간도에서 일어난 일제의 독립군기지 대토벌과 한인학살 만행의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다. 일제의 조선인 대학살사건인 간도참변의 내막을 파악하려면 일제의 간도 침투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도(1) 침투

일제는 1907년 8월 간도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다. 1909년에는 간도협약에 따라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폐하고 <간도일본총영사관>를 설치하였다. 그 산하에 연길, 배초구, 투도구, 훈춘에 4개의 영사분관을 설치하였으며 간도 전지역에 19개의 경찰서를 두었다.

▲ 간도대학살의 비참한 모습

그 외에도 일제는 <일본인거류민회>,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지점>, <조선인민회>, <조선은행 용정지점>, <용정금융부>, <광명회> 등을 설립하여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침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영사관과 산하기관들을 이용하여 한인들을 이간질하며 교회와 학교들을 감시하였다. 뿐만 아닐라 무시로 애국 청년들과 투사들을 체포, 구금하였으며 고문으로 괴롭히고 서대문감옥으로 보내는 일을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집행하였다.

간도총영사관은 일제가 간도의 모든 정보를 탐문, 수집하는 곳이었고, 만주의 모든 자원을 약탈을 기획하는 곳이었다. 한인들의 항일독립투쟁을 탄압하는 구금과 고문의 자리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만주를 조선처럼 식민지화하려는 음모의 본산이었다.

용정 <3∙13> 독립만세 시위

일제의 억압, 중국 관리들의 횡포, 비적들의 수탈로 삼중고를 겪었던 조선인들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만세 시위의 영향과 독립에의 열망과 용기로 용정에서 <3∙13> 항일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3만 여명(2)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 타도를 외치며 일본총영사관을 향해 가는 중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맹부덕의 군대의 발포로 19명이 죽고 48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94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3월 17일에는 순국한 18인(3) 열사의 장례식에 3,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서 애도하며 동참하였고 그들은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평화시위가 무력에 의해 제지를 당하였으나 시위의 소식은 연길현의 이도구, 팔도구, 투도구, 용두산, 국자가 등지에서 수백 내지 수천 명이 참가하는 반일 시위로 확산되었다. 왕청현의 배초구, 라자구, 석현 등지에서, 안도현의 현성과 관지에서, 훈춘의 성내와 횡부자구, 로황구 등지에서 항일 만세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연변지역에서 3월부터 5월 초까지 30여 곳에서 58회에 걸쳐 일어난 항일만세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8만 1000명이었다.

당시 간도 거류 조선인은 대략 80여 만명이었으며 연변지역 거주자는 반이었다고 하니 연변인구의 5명 중의 1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서간도의 통화현, 금두화락에서, 홍경현의 왕청문에서, 환인현성에서, 유하현의 삼원포 대화사에서 , 장백현의 장백가, 팔도구, 매방로에서, 집안현의 양목교자, 구채원자 등지에서 수천 명의 군중들이 집회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3∙13>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사들은 무력 진압에 좌절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독립은 피 흘리는 무장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공동인식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애국 청년들과 의기투합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무장독립단체 결성과 봉오동 전투

전투 <3∙13> 만세시위 후, 북간도에서 많은 무장단체들이 건립되었다. 연변지구가 무장독립단체 결성에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연변지구가 가장 큰 조선인 집거지역으로서 군대의 기초가 되는 인적자원이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독교와 대종교 계통에서 세운 사립학교들이 10여년 세월 동안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청년들의 독립투쟁에의 열망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를 통해 독립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으며 용정 <3∙13> 만세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당하는 체험 중에 피 흘림이 없이는 독립이 없다는 “무장독립투쟁론”이 연변 조선인 사회의 공동의 담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초까지 독립투사들은 무장독립투쟁단체를 편성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때 연변지역에 건립된 주요 무장단체들은 간도국민회, 북로군정서, 훈춘한민회, 신민단, 도독부,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부, 라자구의사부, 대한독립군 등이다.

무장독립단체들은 창건을 시작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시작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200여 명의 정예부대로 8월에 혜산, 갑산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와 군수품을 획득하였다. 10월에는 만포진, 자성을 기습하였으며 도독부와 함께 회령, 종성, 온성을 습격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조선총독부의 「국경방면의 배일파침입상」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그들(독립군)이 조선땅을 침입한 것이 전후 32차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1년간 국경삼도지역에 대한 무장독립군의 출동건수는 무려 1천 651건, 4천 645명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4) 상해임시정부군무부는 <독립신문> 제88호에서 3월 1일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유격전을 벌인 것이 32회며 일제 군경들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공식적으로 확인 발표하였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이 종성군 강양동 초소를 습격하였다. 일제의 <월강추격대>는 독립군을 쫓아서 두만강 국경을 넘었으며 봉오동 골짜기까지 쳐들어 왔다. 홍범도장군의 유인, 매복 전략으로 일본군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도독부>, <신민단>의 부대들은 157명의 일군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전투는 민초 의병들과 정규 일본군과의 전투로 화력 면에서 만만한 전투가 아니었기에 망국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실로 민초 의병들의 연합과 연변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참여와 지도자들의 탁월한 전략의 결과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우리의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일제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3∙13> 만세 시위 이후 만주지역의 무장독립단체들을 쓸어 없앨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9년 9월에 조선군사령관은 ‘조선 외부로부터 무력 진입하는 불령선인을 타격하기 위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훈령을 발표하였다. 1919년 10월 조선군사령부는 총독부에 <재지나불령선인에 관한 각서>를 제출하였는데 이는 1920년 10월의 간도대토벌의 밑그림이었다.

일제의 간도침략 준비와 훈춘사건 조작

봉오동전투 이후, 날로 대범해지는 무장독립단체들에 독립운동에 대하여 일제는 연속 3차례 걸친 봉천회의를 통해서 장작림에게 진압조치를 요구하였다. 7월 24일, 일제에 굴복한 장작림은 연길주둔 맹부덕 부대에게 무장독립단체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토벌대는 무장독립단체에 대한 호의로 사전에 토벌계획을 통보하거나 사람을 파견하여 협상함으로써 “토벌”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토벌”을 핑계 삼아 연변에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장독립단체들에게 연변지구를 떠날 것을 요청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 연합부대들은 어랑촌 일대로 집결하였다. 어랑촌이 길림성과 봉천성의 접경지역이어서 일제 토벌과 중국군경들의 단속을 피하기 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국내와도 가까운 곳이어서 국내진공작전에도 편리하였고 지역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 신도들이고 간도국민회 관할지역이였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는 화룡현 청산리일대로 이동하였다. 청산리일대의 산들의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여 근거지 건설이 유리하였으며 조선의 무산일대와 연접해 있고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역이어서 일본군의 토벌을 피하기 쉬운 장점에다 주민들 대다수가 대종교 신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중국의 협조 없이 무장독립단체들을 직접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일제는 1920년 8월 15일 경성회의에서“일지협동”정책을 확정하고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을 정하고 북만주파견군 사령관에게 “조선파견군(일본군)이 9월 하순에 간도의 반일부대에 대한 토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통보하였다.

일제는 9월 12일 제1차 훈춘사건을 만들었다. 토비 진동과 왕사해 무리들을 매수하여 일본 낭인을 참모로 보내 훈춘현성을 습격하여 약탈, 방화, 납치를 하도록 사주하였다. 200여 채의 가옥이 불타고 80여 명의 사람들이 납치당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전혀 피해가 없었던 1차 훈춘사건으로 출병을 할 수가 없자 그들은 2차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토비들은 새벽 4시에 훈춘주재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였다. 2차 사건에서 일본 영사분관과 6채의 일본상점이 불타고 11명의 일본인이 죽고 6명의 조선인이 사살되었으며 무고한 주민 200여 명이 납치되었다.

일제는 일본인의 생명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출병 여론을 조성하고, 10월 9일 “간도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조선군 19사단과 20사단의 78연대, 연해주 파견군 제 11, 13, 14사단, 북만주파견대의 안자이지대, 관동군 19연대와 기병 20연대 도합 2만 명(5)의 정규군을 출동시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연변지구를 포위하고 무장독립단체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주권 침해를 엄중히 항의하고 침입한 일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중국의 철수 요구에 아랑곳 하지 않고 1920년 10월 “간도토벌”을 시작하였고 “간도한인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미주

(미주 1) 간도는 흔히 북간도를 의미하며 현재 연변지구에 해당된다. 서간도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 방향에 있으며 압록강 상류 대안 위쪽에 있는 유하현, 관전현, 홍경현, 장백현 등이다.
(미주 2)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에서 윤병석·안장원은 3만명,  강룡권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 발전방략연구』 “제2장 항일투쟁(상)”과 중국 당국의 「외교보존서류」에 기재된 길림성장 곽종희의 “밀자”에는 2만 여명으로 집계 되였다.
(미주 3) 1명은 장례식이 끝난 후, 제창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서 순국하였다.
(미주 4) 김춘선,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471쪽.
(미주 5) 학자에 따라 적게는 15,000명, 많게는 25,000명으로 추산한다.

 

참고서적

⑴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⑵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⑶ 김광희 외 다수,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⑷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⑸ 박환,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국학자료원, 2014.
⑹ 박창욱 외 다수,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⑺ 양소전 외 다수,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연변인민출판사, 2009.
⑻ 김기봉·방영춘·권립 편저, 『일본제국주의의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
⑼ 김동섭,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2006.
⑽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⑾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⑿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연변대학출판사, 2018.
⒀ 강룡권 외 다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 료녕민족출판사, 1997.
⒁ 김춘선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2015.
⒂ 안화춘·김철수 외 다수, 『연변조선족사 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
⒃ 김춘선·김철수 외 다수, 『중국조선족통사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이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