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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기로는 시간보다 더한 것이 없다『다석 강의』 15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12.17 17:53

이 강의에서 다석은 『論語』, 「太白」편에 나오는 증자(曾子)에 관해 말하고 있다. 원문과 자신의 풀이를 함께 담았다. 동시에 두 편의 한시(漢詩)도 소개했다.

앞의 글이 1956년 12월 12일자 『다석일지』에 수록 된 반면 뒷글 한시는 각기 이보다 앞선 12월 6일과 8일에 쓰여 졌다. 적힌 순서를 뒤집으며 이 글들을 상호 연결시킨 의도가 궁금하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석이 최소한 며칠에 걸쳐 같은 생각을 지속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생각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여긴 다석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 1 >

다석은 임심이박(臨深履薄)이란 증자의 말로 본 강의의 제목을 삼았다. 이 말은 본래 깊은 곳에 이르러 얇은 데를 발 딛고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을 비틀어 다석은 시간을 가장 얇다고 말했다. 시간이 얇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증자유질’(曾子有疾) ‘소문제자왈’(召問弟子曰) ‘계여족계여수’(啓予足啓予手) ‘시운’(詩云) ‘전전긍긍’(戰戰兢兢), 증자는 중병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자기 손발을 열어 살펴보라’고 말했다. 사는 동안 연못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 같이, 얇은 얼음을 밟고 지나듯 살았다고 하였다. 삶 자체가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전긍긍의 말뜻이다. 이것을 이미 옛 시인이 말한 바 있다.

주지하듯 삶을 사는 것이 어렵기에 꾀를 쓰고 사는데 점차 익숙해진다. 증자는 이를 염려했고 그렇지 않게 살고자 자기 삶이 참으로 조심스러웠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전전긍긍의 긍(兢)은 이길 극(克)자 두 개가 겹쳐진 말이다.

하지만 거듭 이긴다는 말뜻이 아니라 그만큼 조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증자는 효(孝), 곧 부모를 섬김에 있어 그릇된 꾀가 작동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 몸을 잘 보존하여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자 늘 상 조심조심, 전전긍긍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 2 >

여임심연(如臨深淵) 여이박빙이(如履薄氷而) 금이후(今而後) 오지면부(吾知免夫) 소자(小子). 앞서 보았듯 제자들을 불러 모은 증자는 자기 손발을 보라 말하며 본인 스스로 전전긍긍하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였다. 제자들을 소자(小子)라 부르며 자신의 마지막 순감을 이들과 교감하며 나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자기 몸을 잘 보존하여 끝까지 효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몸은 단순한 육신이 아니다.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정신과 분리될 수 없는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손발을 열어 보라’는 말뜻은 자기 마음을 읽어 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몸성히’는 ‘마음놓이’의 첩경이고 그래야 인간은 자신의 바탈(본성)을 불 사를 수 있는 까닭이다. 이 모든 출발이 ‘몸성히’에 있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그렇기에 혹자는 다석을 심신(心身) 이원론적 영지주의자로 호도하는 바, 이는 틀린 생각이다. 다석에게 ‘몸성히’는 종교의 근간이자 기본이었다. 종종 기독교는 몸을 부정했고 이를 자연부정으로 확장시켰다. 지금껏 기독교는 유일신 전통에서 우주를 무생물로 취급할 때가 많았다. 우주를 생명 없듯 대했던 누(累)를 범해 온 것이다. 우주 역시 신격을 지닌 것을 몰랐기에 그저 하늘과 땅으로만 여겨왔을 뿐이다. 기독교가 범신론을 싫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다석도 말하듯 기독교는 최소한 범재신론으로까지 자신의 신(神)을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만물위에 있을 뿐 아니라 만물 안에도 있고 만물을 통해서 일하는 분’인 까닭이다. 예수와 바울 역시 지은 만물을 보고 하느님을 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피조물 무시하고 하느님만 섬기라는 것은 아주 교만한 언사이다.

< 3 >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다석은 ‘긋’이란 말을 사용했다. ‘긋’이란 옛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영원한 ’하나‘를 말한다. 모든 것이 저마다 이긋으로 부터 시작할 뿐이다. 인간은 누구든 ‘처음’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이 긋의 끄트머리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든 영원한 긋, 참의 끄트머리의 존재란 것이다. 그렇기에 제긋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이어 내려온 긋의 한 끝자락이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이 누차 말했듯이 가온찍기(ᄀᆞᆫ)이다. 이 긋을 아는 것이 은총이고 은혜이다. 이렇듯 첫 긋과 마지막 긋(맞긋)을 아는 이가 우리들 스승이 된다. 이들이야 말로 알파와 오메가, 곧 영원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첫긋맞긋‘의 존재였다. 예수 역시도 하느님을 전체로서 알지 못했으나 그는 첫 긋을 믿고 제긋의 삶을 살았던 존재였다.

‘긋’과 대비되는 말로 ‘깃’이란 것이 있다. 주지하듯 ‘긋’은 영원한 하나로부터 나온 아주 약한 끄트머리이다.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 ‘깃’이 필요하다. 여기서 깃은 날개를 뜻한다. 우리 모두는 약한 존재이나 동시에 하늘로부터 온 ‘깃’을 지녔기에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긋’과 ‘깃’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재차 풀어 보겠다. ‘긋’에서 ‘ㄱ’은 하늘서 내려오는 것을 형상한다. 그 하늘 밑에 ‘ㅡ’를 그어 놓으면 그것은 하늘과 만나는 땅, 세상이 된다. 이 땅에서 생기를 주는 것이 바로 ‘ㅅ’의 역할이다. 하늘과 땅에 생기가 통한 것이 바로 ‘긋’이란 말이다.

이렇듯 무한한 생기를 품고 사는 존재가 인간, 곧 ‘ㅣ’이다. 이렇듯 영원한 하나의 끝자락인 긋의 존재는 무한한 기운을 자신 속에 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긋’과 ‘깃’의 불가분리성이다.

다석은 이 ‘깃’을 ‘분’(分)과도 같이 보았다. 기분(己分), 자분(自分)이란 말이 ‘깃’과 같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분’ 역시 하늘의 끝자락을 뜻한다. 결국 기분, 자분은 이어이어 온 긋을 ‘제긋’ 삼은 존재와 다를 수 없다. 무한한 우주, 영원이 자기 안에 ‘분깃’으로 주어졌음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제긋’의 실상이다.

‘긋’이 존재 상태를 뜻한다면 ‘깃’은 그에 합당한 능력, 기운을 적시하는 표현일 듯싶다. 이를 다시 성리학의 용어를 빌어 존재이유(理)와 존재능력(氣)이라 언급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깃’을 갈고 다듬지 못하면 제 긋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 날개를 다듬듯이 말이다.

< 4 >

이제 다석은 앞서 본 전전긍긍(戰戰兢兢)이람 말에 잇대어 소심익익(小心翼翼)을 제목삼은 자신의 한시를 소개했다.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소심(小心), 작은 마음으로 여긴 것이다. 이 경우 소심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상태를 일컫는다. 아슬아슬하여 조심조심할 때 마음은 가라앉는 법이다.

그런 마음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이 바로 ‘익익(翼翼)’이다. 다석은 이를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으로 보았다. 날기 위해 자신의 ‘깃’을 다듬는 새의 모습, 그것이 바로 소심이다. 소심을 아주 좋은 말로 사용했다. 이 제목하의 본문내용을 살펴보겠다.

‘변역교역불역전’(變域交易不易典) ‘무상여상평상항’(無常如常平常恒).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변역은 세상사를 일컫는다. 거듭 변하고 달라지기에 변화할 수 없도록 사회는 법(法)을 만들어 놓는다. 이를 불역전(不易典)이라 한다. 사회체제 안에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맞는 것을 만들고자 한다. 그렇기에 절대라는 것은 상대세계 내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가온찍기, 곧 자신이 ‘긋’의 존재인 것을 자각하는 것은 절대에 속한다. 상대세계에서 ‘긋’으로 사는 것이 절대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무상하지만 여상한 것이라 했다. 바른 말은 떨면서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무서워 떠는 것은 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바른 말을 하는 것은 여상이다. 소심하기에 떠는 것이 인간의 모습니다. 조심조심,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긋’의 바른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전긍긍, 무상을 살면서도 여상한 것 이것이 바로 평상항이다.

‘신분점소인토생’(身分點小認土生), ‘삽정직대보무행’(澁正直大步武行). 여기서 신분은 ‘깃’을 말한다. 작을 ‘소’(小)역시 이를 적시한다. 소(小)자는 땅에서 싹이 돋는 형상이다. 그런데 쪼개져서 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저마다 작지만 자신의 ‘깃’(능력)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제긋’이 이어져 내려온 ‘예긋’과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새가 날개 짓하며 나는 것을 연습하듯 우리들 역시 자신의 ‘깃’을 익혀나가야 한다. 끝의 ‘깃’이 바로 점처럼 작은 ‘소’(小)이고 소심(小心), 곧 조심조심, 전전긍긍인바, 이것이 인생사에서 ‘필’(必),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이를 신분(身分)이라 하는 것이다.

인토생(忍土生)은 불교적 용어로서 깨끗하지 못한 세상에서 인내하며 살라는 뜻을 담았다. 거듭 달라지는 변역의 현실사회에서 참아야만 살 수 있다. 사바세계는 인(忍)을 필요로 한다.

삽(澁) 역시 난삽한 세상을 말한다. 이 글자 속에 그칠 ‘止’자가 둘씩이나 들어있다. 그칠 ‘지’(止)는 사람의 발목을 형상화했다. 발 ‘족’(足)은 입과 발을 합한 것으로 ‘나가라’는 뜻을 지녔다. 한발 씩 앞으로 내딛는 것이 ‘그칠 지’(止)의 본뜻이다.

설익은 감의 떫은 맛을 표현할 때 ‘삽’(澁)이란 말을 쓴다. 발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흩어지는 것이 이런 맛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삽’한 현실에서한 발 내딛으면, 곧 ‘일지’(一止)하면 바를 ‘정’(正)이 된다. 세상이 난삽하기에 우리 발이 바르게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직대’(直大)이다. 세상을 바로 걸을 때 비로소 삽(澁)을 정(正)하게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과 억울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무당당(步武堂堂)해야 옳다. 억울해도 더 많이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의 편이 된다.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행군하듯 직대보(直代步)하는 것이 필하다. 발을 옳게 내닫으란 말이다. 이 때 우리는 마침내 자유, 해방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군자에겐 유종여상(有終如常)이란 말이 어울린다. 죽음을 ‘끝’으로 아는 소인배와 달리 군자에게 마지막은 일상과 다름없다. 다석은 이를 曾子의 경지라 하였다.

< 5 >

이제 본 강좌의 제목에 해당하는 마지막 한시 ‘임심이박’(臨深履薄)에 대해 말할 순서이다. 말한 대로 이것은 깊은 연못가에 서 있는 것 같이 위태롭고 얇은 얼음을 딛고 서 있듯이 불안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생야임시각점지’(生也臨時刻點之),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다. 시공을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

그래서 다석은 사는 이 시간을 임시(臨時)라 했다. 임시에 점을 찍는 것을 각점지라 표현했다. 좋고 나쁜 때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 죽는 법이다. 자신이 세상에 나온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모두가 돌아가고픈 요순시대도 임시일 뿐이다. 문제는 가온찍기를 하는가의 여부다.

시야사해안선지(時也死海岸線之), 때라는 것은 죽음의 자리에 이르는 시간까지를 말한다. 예컨대 죽음의 바다, 그 해안선 가장자리까지라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럴수록 임시임시 점을 찍는 각점지(刻點之)가 중요하다. 임시가 영원이 되는 까닭이다. 해안선을 벗어나는 것, 육지를 떠나는 육리(陸離)가 끝일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탓이다.

박막박어존시각(薄莫薄於存時刻), 그렇기에 다석은 세상천지에 얇은 것 중 가장 얇은 것을 시간이라 했다. 이런 시간은 충분치 않다. 때가 우리를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그럴수록 얇디얇은 시간을 밟고 사는 우리들 인생은 이 시간을 조심스럽게 사용치 않을 수 없다.

임시로 사는 이곳을 불행하다 여기지 말고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한다. 기쁘게 육리를 맞을 일이다. 심막심어망해학(深莫深於亡骸壑), 육리, 곧 육지를 떠난 그 앞만큼 깊은 곳이 없다는 뜻이다. 끝을 정한 해안선을 지나 바다를 향해 열정을 다해 나아가는 육리를 기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죽으면 끝이란 생각이 우리들 일상을 지배한다. 사형선고와 함께 태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변역하고 교역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 삶인 것이다. 이렇듯 무상하지만 얇디얇은 시간을 조심스럽게 살면서 육리를 향해 한발자국씩 내딛기에 이를 여상이라한다. ‘긋’과 ‘깃’이 상호 응하고 있는 까닭이다. 세상을 뜻하는 ‘ㅡ’는 얇은 얼음(시간)이다. ‘ㅣ’는 깊은 바다(죽음 너머)를 말한다. 인간 생명은 끝이 있다. 하지만 얇은 시간을 조심스럽게 살면(小心) 긋과 깃이 서로 응할 수 있다. 가온찍기를 통해 제긋이 되어 난삽한 세상을 깨끗하게 살 수 있고 영원한 존재가 된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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