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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노력이고, 목표이며 투쟁이다진실 (2)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12.18 16:34

문: 예수의 말씀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히 언급된 것인가?

답: 아직 멀었다. 예수의 말씀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두 번째 결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개별적인 말씀이나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행실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도 진실을 말하고 행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항상 진실해야만 한다.

문: 그것은 힘들지 않은가?

답: 장기적으로 보면 진실은 가장 쉬운 것이지만 처음에는 힘들다. 그러나 진리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언행에 있어서, 모든 언행에 있어서 진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불성실하고 표리부동한 상황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진실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전체를 원하시듯, 진리는 우리 전체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특별한 경우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의 진실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진실은 노력이요, 목표이며 투쟁이다. 그와 함께 모든 자기의(독서)는 폐지된다. 왜냐하면 진실하라는 계명을 완전히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끝없이 무한한 진실 뒤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 그것은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있지 않을까?

답: 그것이 율법일 때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으로 여겨질 때에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의에 속한다. 우리는 점점 선명하게 진리를 깨달음으로써(좋은 의미에서) 배부를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의 빛 속에서 점점 더 진실하게 됨으로써 배부를 것이다(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샘에서 마심으로써 배부를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그리고 그 분 안에서 온전한 진리,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를 가짐으로써 배부를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참되지 못하고 그와 동시에 자유롭지 못한 모든 존재상태로부터의 구원이요, 억누르는 존재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리스도인이 진리와 진실을 말해야 하는 대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와 진실을 말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Getty Image

문: 하지만 그것은 세상과의 대립과 투쟁을 가져오지 않을까?

답: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해방이요, 축복이 아닌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거짓 맹세를 해선 안 된다”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이 대원칙에서 우리는 세 번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명령은 단지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율법으로써 너무 좁다. 그러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이시며 무한자이신 그분은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할 뿐 아니라 특별히, 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이 의미는 네가 진실과 마주치는 곳에서 하나님은 너와 마주치기 때문에 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진실하지 못하다. 즉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말은 단순한 침묵과 방관에서 언행상의 부인을 거쳐 결국 배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도망치는 제자들에게서 베드로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는 부인을 거쳐 유다에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도상에서 그리스도 자신에게까지, 어쩌면 그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문: 여기서 우리는 순교에 직명하게 되지 않을까?

답: 그렇다. 순교는 진실의 확증이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순교도 각오해야만 한다.

문: 끔찍하지 않은가?

답: 그것은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요, 생명의 왕관이다.

문: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답: 우리는 그런 일을 요구하시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은 축복받은 것이다.

문: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진리와 사랑 사이에 갈등이 재연되지 않을까?

답: 진리는 항상 사랑에 봉사해야 하고 사랑 역시 진리에 봉사해야 한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진리요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으로 올바르게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또한 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릇된 사랑으로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랑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양식이나 진리는 사랑이라는 이 양식의 소금이다.

문: 우리는 침묵으로도 증언할 수 있는 않는가? 예수께서도 산헤드린 의회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는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미에서 금식하시지 않으시고 그의 제자들도 금식하지 않았다고 하듯이 우리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증언할 수 있지 않을까?

답: 올바른 침묵은 올바른 주장의 이면이며 올바른 무위(Nichttun)는 올바른 행위의 이면이다. 예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로”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결국 침묵과 무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장과 실천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깥에 알려지지 않는 확신과 뜻은 약해져서 결국 저절로 시들고 소멸하지만 그와 반대로 고백을 통해 바깥으로 알려지는 확신과 뜻은 강해지고 커진다. 그러므로 개인의 양심과 사회를 위한 자유로운 발언은 생명을 위한 산소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국가나 교회나 단체에 의해서 자유로운 발언이 속박 받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증언을 통해 그 자체와 다른 것들을 자유롭게 해야만 한다.

문: 하지만 어디서 말해야만 하고 어디서 침묵해야만 하는지, 또 어디서 실행해야 하고 어디서 실행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

답: 아버지의 영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마태복음 10장 19-20절)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침묵과 무위조차도 하나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회피와 같은 것, 부인이나 심지어 배신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침묵과 무위는 그렇게 어려운 것임이 확실하다. 아니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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