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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음의 정의, 두려움을 쫓는 사랑(렘 23:5-8 요일 4:13-21 마 1:18-25)대림절 넷째주일(12월2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2.20 17:52

1. 예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대림절 넷째주 만남과 화해의 촛불>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첫째 주부터 우리는 촛불을 하나씩 켰습니다.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회개와 평화의 촛불, 사랑과 나눔의 촛불입니다. 오늘 넷째주일은 만남과 화해의 촛불을 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만나주셨고, 이 땅에서 사랑을 실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그 탄생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 말씀을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18-21)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으로 잉태된(마 1:18)’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또 그 탄생의 의미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합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2-25)

자, 그렇다면 ‘성령 잉태’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는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볼까요? 이 당시 예수님처럼 ‘신의 아들’로 불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입니다. ‘존엄자’라는 뜻입니다. 본명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이죠.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는 아티아(Atia, ?~B.C. 43)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저)의 누나인 율리아의 딸입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의 기록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아들이 없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됩니다.

<카이사르의 족보>

아우구스투스의 출생설화입니다. 어머니 아티아가 한밤중에 아폴론 신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신전 바닥에 깔개를 깔고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뱀 한 마리가 그녀를 타고 올라왔다가 사라졌습니다. 그 후 열 달이 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고, 사람들은 그를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폴론 신이 개입하여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것입니다. 영웅의 탄생은 이처럼 신비스럽습니다. 우리나라도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박(朴) 모양의 알에서 태어나 성이 박이죠?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은 어떤가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웅의 탄생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은 신과 인간과의 육체적인 관계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아티아는 아들에게 전령을 통해 편지를 씁니다. “이제 너는 네가 남자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운명과 기회가 네게 허용하는 한, 뜻한 바를 행동에 옮겨야 하는 거야.” 아들을 황제로 만든 어머니 아티아의 지도력입니다.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용기와도 같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에 관하여,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가 저술한 대서사시인 『아이네이스』(Aeneis)라는 책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지시로 쓴 로마의 역사입니다. B.C. 30년경 집필을 시작해 미완성으로 남은 국민 서사시입니다. 우리 민족으로 치면, 단군신화 정도 되겠습니다. 이 책에서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전설적 창시자인 아이네아스(Aeneas)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인도 하에 세계를 문명화한다.’라는 로마의 사명을 천명합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가 로마 제국 신학의 구약성경이라면, 『아이네이스』는 신약성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아우구스투스의 족보는 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아이네아스까지 이어집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왕실의 방계혈통이지만 왕족의 한 사람인 앙키세스와 로마신화에서는 베누스(비너스)라고 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이네아스의 아들이 율루스(Iulus)인데, 율리우스 가문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폴론 신이 아니라, 아프로디테 신이 나오죠?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은 이렇게 신의 아들, 혹은 신의 아들의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아이네아스와 아버지 앙키세스 아들 율루스 동상>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도 아기 예수의 ‘신적 잉태’, 곧 ‘성령 잉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탄생과 그의 삶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신적 잉태나 동정녀 탄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기 자체의 신학입니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였기에 그의 탄생이 신비로 포장되었지만, 아기 예수는 그의 삶이 황제의 삶과는 달랐기에 신적 잉태 곧 동정녀 탄생으로 연결되며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탄생설화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동정녀 탄생에 관해 마커스 보그(M. J. Borg)와 존 도미닉 크로산(J. D. Crossan)이라는 신학자는 『첫번째 크리스마스: 복음서들은 예수의 탄생에 관해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동정녀 탄생에 관한 가장 탁월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 태어날 ‘아기의 신학’이지, 그 ‘어머니의 생물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λαὸν αὐτοῦ)’은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 나라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죠? 이들 유대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좀 더 예수님 당시로 깊이 들어가 볼까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까운 곳에 세포리스(Sephoris)라는 갈릴리의 중심지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이스라엘 정부가 유적 발굴로 인해 세포리스와 주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와 수도 세포리스 위치>

세포리스는 해변길(Via Maris)이라는 국제도로에 인접해 있습니다. 이 도로는 이집트와 수리아, 현대의 이란인 아나톨리아와 현대의 이라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와 터키를 이어주는 도로입니다. 따라서 이 도로 지역의 요충지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지도에 나오는 므깃도가 그러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에는 880번 정도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반도와 지정학적인 운명이 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세포리스는 또한 열심당(Zealots)의 본거지라, 많은 봉기가 일어나고 또 로마군대에 의해 자주 정벌되어 파괴되었습니다. 

<세포리스 유적>

헤롯 대왕의 아들이자,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B.C. 4~A.D. 39) 때였습니다. 년도를 보면,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통치기간이 겹칩니다. 아무튼 헤롯 안티파스가 세포리스를 재건할 때입니다. 기원후 6년 경, 열심당의 창시자인 갈릴리의 유다가 세포리스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행 5:37 참조). 재건공사 강제 노역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입니다. 이때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레뇨 총독(눅 2:2)이 로마 군대를 보내 진압합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따르면 세포리스로 들어가는 큰 길 양쪽에 봉기한 유대인들을 처형한 십자가가 2,000개나 세워졌을 정도로 진압이 잔인했다고 합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tektonos)였죠? 그러나 테크토노스는 목수뿐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건축 노동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을  따라 세포리스 건설현장을 따라다녔을 것이고, 또한 처형도구인 십자가 제작에 참여했으며, 그 처참한 현장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 것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마태복음은 좀 더 보편적으로 백성들의 죄라고 합니다만)을 본 예수님은 마침내 가짜 신의 아들인 로마 황제와 로마의 불의한 통치에 반대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온 인류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가 되어 화해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고백은 참된 신의 아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이며 그의 사역은 로마처럼 살육과 억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죄, 정의와 사랑의 부재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오늘 구약과 서신서 본문 말씀에 의하면, 죄란 정의와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과 정의는 성서의 핵심이며 모든 인문학의 키워드이며, 인간 삶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에 관한 이상적인 접근은 이 두 단어를 관념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얼마나 많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흩날리는 겨와 같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정의롭게 살라!”는 말이 공허하게 허공을 떠돕니까? 기독교 현실주의자였던 라인홀드 니버(R. Niebuhr)는 ‘사랑으로 정의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상주의자들은 사랑도, 정의도 모두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의와 사랑의 현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사랑의 법이 성취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니버에 의하면 이렇게 사랑의 법이 불가능한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법을 따르기엔 우리의 사랑에는 ‘자기사랑(self-love)’이 너무 강하고, 둘째로 우리 인간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죄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정의라는 법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따르다가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니버는 정의를 이렇게 제안합니다. “정의는 죄의 조건 아래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이다.” 따라서 불의한 사회에서 이웃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정의란 법을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세상의 법이나 세상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His righteousness)’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정의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동정녀 탄생과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바로 사랑이 구체적인 현실에 정의로 나타난 유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입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과 서신서의 말씀은 정의를 ‘되찾음’의 문제로, 사랑은 정의롭게 행동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표현합니다.

3. 정의, 되찾음의 문제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평안히 살게 하시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비록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 다윗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로마 지배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되찾음의 문제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구원과 정의입니다. 본문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렘 23:7-8)

옛날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심으로 땅을 되찾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하는데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백성들의 사람다운 삶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이루어져야 할 정의입니다.

4. 사랑, 두려움을 내쫓다

정의를 살펴보았으니, 사랑에 관한 말씀을 볼까요? 사랑의 사도인 요한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b).”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믿고 시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요일 4:13-16a)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사랑을 품은 사람은 불의한 이 세상을 살 때 정의로운 삶으로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정의를 실천하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기는 자!, 그리고 평화를 막고 전쟁을 부추기는 자!, 정의가 아닌 불의로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형제를 억압하고, 미워하고, 착취하는 자! 그들은 바로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 사도의 음성을 들어볼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5. 구원, 사랑과 정의로 이뤄지는 만남과 화해

네 번째 대림절 촛불을 밝히며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인류가 화해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세포리스의 비극, 아우슈비츠의 비극, 6·25전쟁의 비극, 제주 4·3의 비극, 광주 5·18의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지 영혼 구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랑과 정의로 이뤄지는 만남과 화해입니다. 그것은 자칭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평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기업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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