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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만들지 못했다성령과 성경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19.12.21 16:51

11장에서 칼빈은 우상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1-7절까지 칼빈은 하나님은 표상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1절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일체의 신성과, 동시에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나 돌, 금, 은 등으로 조형화 하는 모든 행태의 형상, 화상, 그리고 상징물들을 비판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이름을 짓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이름이 있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그렇게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 처럼 수많은 신들의 이름도 지어주었습니다. 신들의 왕 ‘크로노스’,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 최고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옥의 신 ‘하데스’, 술의 신 ‘박카스’, 신들의 메시지를 전􏰀는 신 ‘헤르메스’와 같은 이름은 그들이 창작해낸 이름들입니다. 그들은 신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에게 적합한 성격과 지위와 역할을 규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은 고대 헬라인들의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이름이 부여된 바도 없고, 오히려 출애굽기 3장이 말씀하는 것처럼, “스스로 계신 분”, “여호와라 여호와라”라는 그 장엄한 선언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영원자, 자존자이십니다. 인간에 의해서 이름이 일컬어진 바도 없고,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준 바도 없는, 그래서 결코 형상화할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따라서 칼빈은 분명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I.xi.1).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해서 보이는 형태들을 구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고, 단지 그의 음성을 들음으로써만 알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4:15-16). 칼빈은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이사야가 이 문제를 가장 강조했다고 말합니다(사40:18-20, 41:7,29, 45:9, 46:5-7).

상징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징들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징이라는 것은 드러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감추는 역할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순간에도 그분의 불가해함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1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구름과 연기와 화염” 속에서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 하였다”고 하였고,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나 셨지만(마3:16), 그 비둘기는 곧 다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상징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까닭은 “이 순간적인 상징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그리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할 것이요 그에 대해서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I.xi.3)이라고 말합니다.

▲ Nicolas Poussin, 「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1633) ⓒWikipedia

방금 상징을 말했는데, 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는 ‘폭로’와 동시에 ‘은폐’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계시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언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원자이시고, 하나님과 죄된 인류를 화해시키고, 그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으시는 그런 일을 언제 하셨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그가 바로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사실은 십자가 사건에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무기력하게 죽은 자가 어떻게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23:37) 조롱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통해서 마침내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계시의 이중적 의미를 고린도전서 1장 22절-24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유대 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 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무엇이 우상인가

4절에서 칼빈은 본격적으로 이교 사회의 우상에서 교회가 승인한 ‘형상’들로 그 과녁을 바꿉니다. 칼빈에 의하면, 심지어 동방교회조 차 이점에서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훌륭하게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방종하게 회화에 빠지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제2계명은 분명히 조각상들뿐 아니라 그림들과 화상들(icons)까지도 금지하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켜줍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이런 형상들이 문맹자에게는 책의 구실을 한다는 변명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그들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합니다.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그레고리우스의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성령의 학교에서 이에 대하여 배웠더라면, 결코 그러한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렘10: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2: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다같이 무익하고 거짓되다고 하는 일반적인 교리를 결론지을 수 있다(I.xi.5).(박스)

칼빈은 초대교회가 약 500년경까지,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바로 그 시대까지 교회 내에는 일반적인 형상물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때는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가사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 어거스틴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엘비라 교회 회의(305년경)에서 제정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중 제36장에는 ‘교회 당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 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I.xi.6).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의 시대까지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시기 이후에, 정확히 787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I.xi.14)한 이후 교회당 안에 각종 조상과 형상, 화상들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형상물을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한 마디로 “쓰레기 같은 교리”라고 비난합니다. 칼빈은 신자들이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했듯이, 복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은 그들에게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거행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며(계1:5),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5: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다 세웠겠는가?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저들의 마음과 눈을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I.xi.7).

우상을 향한 인간의 욕망

8절부터 11절까지는 형상의 기원을, 그리고 12절에서 16절까지는 형상의 사용과 남용에 대해 말합니다. 우선 8절에서 칼빈은 본격적으로 형상의 기원을 파헤칩니다. 칼빈에 의하면 타락하고 죄된 인간의 본성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영원한 공장”과 같습니다. 따라서 형상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형상을 제작한 인간 자신의 생각을 투영한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내적으로 묘사한 하나님을 수공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숭배의 기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 성의 실례가 입증해 준다... 육신은 항상 자기와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 는 무분별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그것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I.xi.8).

결국, 칼빈에 의하면, 형상물의 사용은 결국 우상숭배에 이르게 됩니다. 형상물의 사용은 결국 형상물(우상)과 참 하나님을 분리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성서의 사례를 인용하여 형상물 사용이 결국 우상숭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거기에 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 사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 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끓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 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32: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레26: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 방자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I.xi.9).

그러나 칼빈이 모든 조각이나 회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눈에 보이 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보기에도 흉한 형상물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리고 칼빈은 조각이나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적법한 범위를 “역사적인 사건들”로 제한합니다.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사 건들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형상 또는 형태이다.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데 다소 유익을 주나, 후자는 내가 보는 바로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더욱 오늘날까지 교회 내에 장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형상물은 후자와 같은 것들이다(I.xi.12).

그러므로 칼빈이 장려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고, 이것은 정당하게 예술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고, 조각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쾌락을 위한 것이며, 결국 우상숭배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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