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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 족보’(countergenealogies)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이름-예수(사 7:10-16; 롬 1:1-7; 마 1:18-25)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19.12.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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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가운데 믿기 어려운 사건의 하나는 이른바 동정녀 탄생 이야기입니다. 남자 없이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복음서들이 ‘성령 잉태’(conception)를 말하고 있지, ‘처녀출생’(birth)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처녀출생’을 문제 삼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동정녀 출생 교리와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동정녀 출생 교리는 예수님이 마치 중세 대성당 창문의 유리를 통과하는 햇빛처럼 마리아의 자궁을 통과했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성탄절 이야기 어디에서도 이런 주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과연 남자 없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우리 시대의 과학적 질문이지, 마태와 동시대인들에게는 결코 특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 없는 출생에 대한 설화, 심지어는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신적 능력에 관한 헬레니즘적 표상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주변에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많은 위대한 남성들은 육적인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된 곰 이야기도 있고,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어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령이 마리아와 결합한 남성이며 아버지의 역할을 제공했다고 오해하지만, 마태와 누가 복음 어디에서도 그런 암시는 없습니다. 성령은 히브리어에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고, 헬라어에서는 중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의 숨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104,30). 처녀가 잉태한 것이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나이가 많아 임신할 수 없는 여인이 잉태하는 것이야말로 더 놀라운 기적이지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7-18장),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 1-2장),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잉태야말로(눅 1,7)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개입(눅 1,37),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영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영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수면 위를 운행한 영,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임하셨던 영, 부활 후에는 제자들에게 주신 사역의 원동력이었던 영과 같은 영입니다.

마태는 처녀탄생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처녀탄생이 예수님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표징이라고 생각했다면 마태는 복음서의 시작에 예수님의 족보를 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족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도 예수님을 굳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요 6,42). 마태는 성령 잉태 이야기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되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되었다는 것을 단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태가 처녀탄생 이야기를 통하여 표현하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서 행동하시는 분은 전적으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특정한 인간이, 구세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선사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로운 요셉도,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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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특정한 인간에게 주어질 이름을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주셨는데, ‘예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예수스’(Jesous)는 종종 ‘예수’(Yesu)로 축약되는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Yesua)를 헬라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히브리어 이름 ‘예수아’는 이미 ‘예호수아’(Yehosua), 혹은 모세의 후계자의 이름인 여호수아를 축약한 것입니다. ‘예호수아’는 ‘돕다’(sw)라는 어근에서 온 것이며, 원래 의미는 ‘여호와가 돕다’입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어원 분석에 의하면, 그 이름과 축약형은 ‘구하다’라는 어근 ‘ys’와 ‘구원’이라는 명사형 ‘예수아’(yesua)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로 해석한 것은 바로 이 어원 분석을 반영한 것입니다.

▲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는 여성들. 예수님의 족보는 폭력적 팍스 로마나에 대항하는 대항 족보였다. ⓒGetty Image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 자체는 당시 아주 널리 사용된 보편적인 유대인의 인명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만으로는 당시대의 다른 인간과 나사렛 예수는 전혀 구별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대게 작명을 할 때는 많은 것을 고려합니다.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사주, 오행, 획수도 보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아기에 대한 부모의 기대도 작명에 반영되지요. 그런데 천사는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로 태어날 아기에게 참으로 평범한 이름, 당시 흔하게 쓰인 이름, 예수라는 이름을 준 것입니다. 이 이름만으로는 누구도 과연 이 아기가 장차 백성을 구할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구할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하여 권세 있고 위대한 인물, 화려한 족보에 이름을 올린 고명(高名)한 인물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아들을 찾으신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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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예수님의 족보와 함께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족보는 한 가문, 즉 씨족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입니다. 일종의 계보를 기록한 문서를 말하는데, 동일 혈족의 혈통을 존중하고 가통을 계승하여 명예로 삼기 위해 그 역사와 계통을 밝히는 역사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혈통의 순수성이나 신분을 확증하는데 이용된 족보는 특히 부족사회와 신분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이 부족에 있었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관심이 크기도 했지만, 부족 사회에서는 족속의 구성원이라는 확실한 신분이 생존의 수단이었기에 족보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족보들은 신분을 확립하는 것 외에도 때때로 지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특히 혈통이 중요한 왕과 제사장직의 경우에 그러했습니다. 족보의 주된 관심사는 공직에 있던 사람들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족보는 주로 양반이나 가질 수 있었지, 평민, 성이 백 개나 된다고 해서 백성으로 불린, 그래서 성조차 없는 평민은 족보를 가질 수도, 또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태는 족보를 복음서의 첫머리에 실은 것일까요?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마 1,1) 주장하기 위해서, 누가는 예수님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아들임을(눅 3,23-38) 주장하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태의 족보가(마 1,1-17) 누가의 족보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족보의 위치, 가계의 방향, 형식, 심지어는 세대의 숫자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족보는 실제적인 역사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편집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마태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족보 안에 다섯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족보에 여성들이 들어가는 것은 낯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성들이 들어있다는 것, 게다가 이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리브가, 레아 등 유명한 여인들이 아니라,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등 지극히 평범한 이방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네 여인들이 정당하든 않든 간에 모두 간음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막내아들을 자기와 짝지어 주지 않자,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의 아기를 임신한 지혜와 용기를 지닌 여인입니다(창 38장).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였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줌으로써 후에 온 가족의 목숨을 구했습니다(여호수아기 2장). 다윗과 정을 통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헷 사람이었던 남편을 통하여 이미 이방여인이 되었고(삼하 11,3), 시어머니 나오미가 재혼을 시킨 며느리 룻은 모압 여자였습니다(룻기 1,4). 모압 사람은 암몬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총회의 회원이 되지 못한다는 신명기법전(23,3-4)에 명백하게 규정된 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룻이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이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혈통의 순수성을 주장하고, 신분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의 족보의 목적인데, 예수님의 족보는 참으로 이상하지요?

예수님의 족보를 만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정확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역사적 정보가 아닙니다. 마태와 누가에게 중요한 것은 ‘팩트 체크’가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여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셨느냐는 신학적 질문이지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인간의 불투명하고 의심스럽고 죄된 행위를 꿰뚫고 당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남자들의 이야기’(History)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자들의 이야기’(Herstory)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네 여인들은 스캔들이 있었거나, 비정상적인 결혼을 했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모두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네 여인들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예상치 못한 자들을 사용해서 인간적인 장애물을 넘어 승리를 거두고 메시아를 위해서 개입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족보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신의 아들’로 간주된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족보에 대한 일종의 ‘대항 족보’(countergenealogies)라고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은 말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쥬피터의 딸 비너스(Venus)와 그 여신의 인간 배우자이자 트로이 출신의 전설적인 전쟁 영웅, 안키세스(Anchises)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율루스(Julus)를 통해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율리우스(Julius) 가문에 속하는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신적인 존재’라는 뜻의 라틴어 칭호 ‘아우구스투스’ 혹은 ‘예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칭호 ‘세바스토스’라고 불렸고, ‘주’, ‘신의 아들’, ‘평화를 가져오신 분’, ‘구세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편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손에 칼을 들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다른 한편에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 사는 목수 요셉과 약혼녀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난 예수, 여관에 들어갈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있는 빈손의 갓난아기가 있습니다. 과연 이 둘 중에 누가 ‘신의 아들’, ‘평화를 가져온 왕’, ‘구세주’처럼 보였겠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오랜 내전을 무력과 전쟁으로 끝내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룬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바로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붙여진 이런 칭호들을 아기 예수님에게 부여했습니다. 천사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눅 1,32), ‘하나님의 아들’(눅 1,35), ‘구주’(눅 2,11)이며 ‘땅에 평화를 가져오신 분’(눅 2,14)으로 불렀습니다.

세상을 구할 구세주, 신의 아들을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보았고, 또 그를 그렇게 불렀던 시대에,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을 구할 구세주는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할 권세를 가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전쟁영웅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갈릴리의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이 평화의 왕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구원을 약속하는 모든 권력, 그것이 정치권력이건 금권이건, 언론이건, 종교권력이건, 모든 형태의 힘에 의한 구원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만한 족보도 없던 청년,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자기는 머리 둘 곳도 없었던 사람’(마 8,20),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분(마 11,1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불러 쉬게 하신 분’(마 11,28), ‘안식일법보다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신 분’(막 2,27),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마 12,7),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가르치신 분(마 5,3-11),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죽음에서 일어나신 분(마 28장), 바로 이 분 예수님이, 아니 오직 이 분만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고백하고 믿는 사람이, 아니 오직 그런 크리스천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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