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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사슴코, 역전의 날!(호 11:1-4, 8-9; 고전 1:26-31; 마 2:13-23)성탄절 첫째주일(12월2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12.27 16:55
<니체와 토리노의 말>

1. 니체와 채찍질 당하는 말

1889년 1월 3일 아침, 니체는 토리노의 하숙집을 나왔습니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들어섰을 때 맞은편 마차 대기소에서 난폭한 마부가 자신의 말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니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억눌렀던 동정심이 터져 나와, 그의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니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말의 목을 감싸 안았습니다. 정신을 잃은 니체는 말의 목을 껴안은 채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니체의 하숙집 주인도 광장으로 내려왔다가 니체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니체는 이전의 니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니체의 정신을 무너뜨린 최후의 사건인 ‘채찍질 당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유사한 장면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도 나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술 취한 농부들이 말을 채찍질로 죽이는 꿈을 꿉니다. 그는 동정심을 느껴 죽은 동물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채찍질은 니체가 수없이 자신과 동일시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게 채찍질 당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말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마차에 묶여 있는 말처럼 인간이라는 한계 안에 매여 넘어설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보았던 것일까요? 아무튼 니체는 나귀타고 오신 예수의 수난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09)을 쓴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 곧 인류와의 결별은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인간을 소유자이자 주인으로 인식하고(철학적 용어로는 주체), 동물을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철학적 용어로는 객체). 가령 동물이 신음소리를 내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한 것이기에 실험실에서 산 채로 해부되는 동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고대사회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 이 땅에서도 인간 노예나 노비에 대한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말하는 동물’이었죠?

아무튼 니체는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 순간에 말의 목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생명 자체에 대한 위대한 각성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사람의 생명조차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에 전락한 이 대한민국에 진정 생명에 대한 존중이 있나요?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동물과 온 우주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도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핍박받고 억압받던 연약한 것들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동정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동정심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나아갑니다. 애굽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불러내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교회는 신의 무덤이다.”라고 말했던 예수님의 13번째 제자, 그 누구보다도 신의 마음을 잘 알았던 니체가 정신을 놓기 전, 깨달았던 깨달음이었습니다.

2.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먼저 세 본문 말씀은 구약과 신약에서 애굽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출애굽의 맥락에서, 또 신약은 피난처의 의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 말씀을 먼저 볼까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불러내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호세아의 선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호세아서는 4장부터 14장까지 총 8편의 호세아의 설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7번째 설교(호 11:1-12:14)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설교에서 호세아는 비록 이스라엘이 죄악과 부패로 타락했을지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드마(Admah)와 스보임(Zeboim)은 소돔과 고모라 인근 지역입니다(창 10:19 ; 창 14:2, 8). 사해 남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에 멸망당한 성읍입니다. 

<현재 소돔과 고모라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위치>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신 29:23)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드마와 스보임 같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렇게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죄와 부패로 타락했을지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이라는 말은 애증이 섞인 호세아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3. 애굽에서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유아시절 이야기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후, 예수의 부모는 주의 천사의 지시에 따라 애굽으로 피난하였습니다. 구약은 애굽의 박해를 이야기하지만, 신약은 애굽으로의 피난을 이야기 합니다. 아무튼 아기 예수님과 요셉, 마리아가 애굽으로 피신한 것을 몰랐던 헤롯은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이 나신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미만 아이들을 모두 학살합니다. 어쩌면 첫 번째 성탄은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새드 크리스마스’, 곧 슬픔과 고통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처참한 학살의 현장입니다.

“그들(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3-18)

그러나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은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곧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머물게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아켈라오(헤롯대왕의 아들이며, 헤롯 안티파스의 동생)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19-23)

<헤롯대왕 계보>

구약 모세의 출애굽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약한 민족을 선택하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동정하시어 이제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온전한 출애굽과 새 땅 가나안으로의 정착이 이뤄진 것입니다. 곧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구원시키셨듯이, 이제 아기 예수님도 애굽에서 불러내시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연약한 것을 택하시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4.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ἐξελέξατο)’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 강한 것,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선택된, 뽑힌’이라는 에클레크토스(ἐκλεκτος)라는 형용사는 보통 최선의 것이 선택되기 때문에 ‘정선된, 우량의, 우수한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고린도전서와 베드로전서에서는 최선이 아니라, 최하의 것을 선택하시어 최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입니다(“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벧전 2:4 참조).

따라서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9)”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고전 1:30)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고전 1:30)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우리의 지혜이신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곧 지혜 있는 자와 강한 것들, 권세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일에 우리의 자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고전 1:31).”과 같기 때문입니다.

5. 역전의 날, 약한 것들을 택하사!

어느 날 산타클로스가 사슴 마을에 찾아 왔습니다. 썰매를 끌 사슴을 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산타클로스는 많은 사슴 중에서 뜻밖에도 루돌프를 뽑았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사슴의 강한 다리나 잘 생긴 얼굴보다 콧잔등이 붉어 다른 모든 사슴들에게 놀림을 받던 루돌프를 ‘선택했던(ἐξελέξατο)’ 것입니다. 다른 사슴들에 의해 조롱을 받는 그 코가 오히려 희망이 되었습니다. 성탄절 첫째주일을 보내며 성탄의 의미를 다시금 묵상합니다. 25일 성탄절 새벽기도회 때 읽었던 묵상집의 내용입니다. “성탄절은 모든 세상의 불의한 힘과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역전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세상적 절망을, 희망으로 역전시킨 날입니다.” 

<루돌프 사슴코>

그렇습니다. 고난 받았던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또 애굽에서 불렀다 함을 이루시려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던 역전의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자랑하는 자는 다만 주 안에서 자랑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공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이러한 아기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니체가 느꼈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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