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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위로와 속량(누가복음 2:36-3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12.29 17:46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오늘은 2019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송구영신예배를 통해서 2020년을 준비하는 말씀을 전해드리게 되겠지만, 오늘은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한 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준비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두 단어, 위로와 속량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지금 이 시대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위로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정결 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여선지자 안나의 이야기입니다. 안나의 정확한 헬라어식 이름은 한나입니다만, 저희 성경에 안나로 나와있기 때문에 안나라고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므온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아들고 찬양한 내용은 따로 살펴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이 그의 위에 계셨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까지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명령대로, 또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시므온에 대한 설명 중 ‘위로’를 뜻하는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ς)’입니다. 말 그대로 ‘위로’를 의미합니다. 시므온이 바라던 것은 이스라엘이 속국에서 벗어나는 일도, 이스라엘이 강국으로 우뚝 서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 아픔을 가진 이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위로를 받길 원했습니다.

위로한다는 말은 흔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만, 누가복음이 말하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그 자세한 내용은 사도행전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 같은 저자 또는 집단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같은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누가복음이 말하는 의미를 찾아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4장 32-37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통용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4절에는 교회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팔아서 각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며 공동생활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로 이어지는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이 자신의 재산 일부를 숨겼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재산을 숨긴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있게 됩니다. 단지 아나니아와 삽비라만이 재산을 숨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일을 경고해야 할 만큼 재산을 은닉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재산 전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을 바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중 한 사람이 4장 36절에 나타난 레위인 요셉입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모두 팔아 교회에 바쳤는데, 사도들은 이 사람을 바나바라고 불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 바나바라는 이름 뒤에는 그 이름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적혀 있는데, 바로 ‘위로의 아들’입니다. 이때의 위로가 앞서 언급한 ‘파라클레시스’입니다. 즉 자신의 것을 나눠 가난한 이들, 부족한 이들에게 채워주는 행위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위로입니다.

속량

안나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안나는 36절과 37절의 설명에 따르면, 결혼하고 7년간 남편과 함께 살았지만, 남편이 죽었는지 이혼을 했는지 혼자가 되어 84세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 Rembrandt, 「Saint Anna The Prophetess」 ⓒGetty Image

누가복음은 그녀가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선지자와 예언자는 같은 말입니다. 그녀가 본래부터 선지자, 예언자였는지, 혼자가 된 후에 예언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님에 대해 선포한 사실 자체만으로 누가복음은 그녀를 예언자라고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안나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신 때에,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께 예수님을 만나려면 매일 교회에 나와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시므온 같은 경우에는 성전에서 매일 머물던 사람도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전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매일같이 나온다고 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38절은 시므온이 찬양하는 그때, 안나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시므온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시므온이 바라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안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은 초대교회의 나눔을 통해 생활했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위로가 그녀에게 전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얻은 안나는 이제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 모습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교회가 바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의 나눔을 받은 이들이 나눔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랐고, 그 이상향이 안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속량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안나가 예수님에 대해 말한 대상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속량은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로, 언젠가 한 번쯤 들어보셨을 법한 ‘뤼트론(λύτρον)’의 여성형 명사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흔히 ‘대속’, ‘구속’, ‘속량’ 등으로 번역되는데, 정확한 의미는 ‘값을 주고 대가를 치룬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3장에는 모든 소생의 첫째 남자와 수컷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법이 있는데, 사람의 자식은 하나님께 바칠 수가 없기 때문에 13장 13절에서 ‘대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조금 구체적인 법이 레위기 12장입니다. 레위기 12장은 첫 아이의 대속을 위해 1년 된 어린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다만 양이 없는 경우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바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4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모도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를 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집안이 좋은 편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또 뤼트론은 빚이 있어서 노예로 팔려간 형제, 친척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속의 제물은 유대교 신앙에서 ‘뤼트론’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고, 본래 뤼트론의 의미는 노예를 벗어나기 위해 치루는 돈입니다. 따라서 뤼트론은 ‘죄를 짊어진다’는 추상적 행위가 아니라 바칠 것, 갚을 것을 대신 바치거나 갚는 실제적 행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뤼트론’을 바라고 있었다면, 자신들이 로마의 노예 상태로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고, 이런 노예 상태에서 값을 주고 해방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안나가 이들에게 전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그저 예수님에 대해 전했다고만 말합니다. 하지만 앞서 안나가 예수님을 통해 받은 것이 ‘위로’라고 볼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이들에게 안나가 전한 것은 ‘예수님의 위로’가 됩니다.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2019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지금의 이 시대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여겨집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물질적인 나눔보다는 정신적인 나눔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공명지조(共命之鳥)’라고 합니다. ‘하나의 목숨을 공유하는 새’라는 의미로 불교 경전에 나오는 머리가 둘 달린 새인데,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죽기 때문에 생명을 공유하는 새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가 목숨을 공유하는 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불구대천 원수처럼 싸우기만 하는 모습을 이 사자성어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야 원래 당파의 목적에 따라 싸우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려니 합니다만, 지금 정치인들은 자신들끼리만 싸우지 않고, 또 어떠한 정책을 위해서 싸우지 않고 국민들이 서로 원수가 되게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불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소위 노후를 잘 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도 이미 소득은 한정된 연금밖에 없는데 의료보험이나 세금은 계속해서 늘어가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 대부분 좋게 말하지는 않지만, 은퇴 후에 돈을 벌 수단은 없는데, 자녀에게 집은 물려줘야겠는다는 불안한 마음에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미 투기꾼들이 있는데, 이분들까지 이렇게 부동산에 뛰어들어서 부동산 가격을 올려놓지만 않았어도 자식들은 알아서 집 장만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론에서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부동산 투기꾼들을 쫓아다니며 부동산 투기, 특히 갭투자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은퇴하신 어르신들 뿐만 아니라 20대 젊은이들까지 이들을 쫓아다닙니다. 그리고 마치 주식에서 ‘작전’이라고 부르는 불법 행위를 하듯이 특정 지역을 정해놓고 집값을 올려놓고 그것으로 이익을 남기려고 합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투기꾼들에게 돈을 내면서까지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을까요? 일반적인 구직활동의 어려움과 지금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확천금이 필요하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높고, 아직도 많은 사람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며 살아갑니다. 10년, 20년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이들의 마음, 매년 재계약을 위해서 전전긍긍해야만 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불안함으로 가득합니다.

대기업이라는 누가 봐도 부러울 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40대 중반이나 50대 초반에는 회사에서 당연하게 짤릴거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이들 역시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지금 제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결혼하는데, 이 친구들이 자녀를 갖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퇴직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오기 때문에 앞날이 불안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불안의 요소는 일정 부분이 겹치기 때문에 집단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사람이 가진 불안의 이유가 다릅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시행하면 분명히 그 정책에 의해 피해를 받는 이들이 분명 나타납니다. 국가의 정책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정책이 서로서로 보완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부 정치인들은 이렇게 모두 다른 불안의 원인을 현 정권 때문이라고만 말합니다. 여당의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런 불안이 전부 야당 때문이라고만 말합니다. 정책 법안을 발의하고 완화제를 만들어가야 하는 국회는 2019년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개점휴업 상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 지금 정부의 잘못이라거나 야당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불안을 극대화 시켜오고 있습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그 불안 때문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지만 누군가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누군가를 향한 공격적 태도를 만들게 됩니다. 나는 손해를 봤는데 왠지 이익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적으로만 보이고 그를 향해서 폭력을 행하게 만듭니다.

저는 지금 시대의 모습이 이렇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사람들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충고나 지시보다는 그저 불안하고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먼저 불안한 마음이 사라져야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이런 위로를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모든 불안을 사라지게 만들 위로를 사람의 힘으로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위로는 사람의 능력으로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참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2019년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혹시 불안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여전히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신다면,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오늘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음에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는 그분을 만나시고 마음의 모든 불안을 덜어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로받으셨다면, 그 불안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셨다면, 이제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그 위로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세상의 수많은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위로를 전하는 일입니다. 연말에 물질적인 나눔도 좋지만 선한 마음의 위로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시는 참된 평화가 그 곳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먼저 위로받으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2019년에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만 한 사회였지만, 2020년에는 하나님의 평안이 가득한 한 해가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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