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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아닌 것은 과학이 안 된다『다석 강의』 16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12.31 17:20

이글은 『다석일지』 1956년 12월 8일과 14일에 기록된 두 한 시를 풀어 낸 것이다. 아마도 전장에 이르기까지 불교, 유교 관련 이야기를 많이 했기에 여기서는 기독교에 대한 말을 많이 하고팠을 것이다. 그래서 한시 중 하나에 ‘기독자’(基督者)란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다석의 글을 보면-그의 제자 김흥호의 글에서도 느꼈듯이-불교와 기독교, 유교와 기독교 간의 차이가 없다. 선생 고유한 귀일(歸一)사상에 근거하여 이들 종교 일체를 설명하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말하는 ‘기독교’, 그것은 우리에게 인습화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16강의 제목이 참으로 이채롭다. 종교를 신비한 것으로, 과학을 합리적인 것이라 여기는 우리들 상식을 단번에 뒤집기에 말이다. 과학을 신비라 할 경우, 종교, 기독교는 어찌 이해될 것인지 많이 궁금하다.

< 1 >

지난 강의에서 말했듯이 다석에게 삶이란 ‘이제’를 사는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지금을 더 낫게 살자는 것이 ‘이제’란 말 속에 담겼다. 선생은 이를 ‘긋’이라 했다. 이런 ‘긋’ 정신을 갖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깃’이다. 마치 새가 날개 짓 하며 위로 오르듯이 사람역시 날개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긋’과 ‘깃’ 두 단어를 갖고 종교란 무엇인가를 말한 셈이다. 16강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것이 ‘기독교’란 한시를 통해서 어찌 설명될지 궁금하다.

< 2 >

우선 14일자 씌어 진 첫 한시의 제목은 ‘하나’(一)이다. 5행시로서 8연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一’은 일체 종교가 그로부터 비롯하는 歸一의 하나일 것이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인언인삼이(忍言仁三二). 여기서 먼저 다석은 三二란 숫자에 주목한다. 삼(三)은 참(參)으로, 이(二)는 더불 여(與)로 풀었다. 태어난 세상, 상대세계에 참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사를 뜻한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감당할 일이 바로 절대계를 향한 사랑인 바, 유교는 이것을 인(仁)이라 했다. 이런 仁(사랑)을 갖고 살려면 참(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仁으로 사는 삶이 무거운 짐인 탓이다. 절대계에 속한 仁을 말하며 실천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음양이 짝하는 상대세계, 이 세상은 자주 물심(物心)을 일으킨다.

세상 속의 사랑과 仁은 수많은 짝들, 夫婦, 형제 등이 제대로 관계를 맺고 사는 지를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들 짝들 간에 和, 義. 信이 있는 가를 찾고 물으면 된다. 그러나 이런 상대계, 짝의 세상에서 사랑을 찾기 힘들다. 그렇기에 사랑이나 仁이란 말을 하지 않고 살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절대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존재이다. 상대계에 속한 우리들 ‘긋’이 이를 요구하는 탓이다.

그래서 다석은 우리들 ‘긋’이 절대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긍정했다. 우리들 ‘긋’이 절대자를 부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에 아버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찾기에 아버지가 된다고 했다. 이는 사실 절대계가 우리를 끌어올리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대계의 요구를 절대자가 인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염재신재(念在神在)라는 말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여하튼 상대계에 사는 한 인간은 사랑을 말하기 어렵다. 이렇듯 말 못할 것을 말하여 안다는 뜻으로 인(認), 혹은 ‘인식’(認識)이란 말을 사용한다. 세상 속에서 인간이 절대와 만나는 ‘긋’을 안다는 말뜻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절대자 자체는 오직 ‘모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절대자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 아비 없는 자식 없듯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한 절대자는 있다.

기독교적으로 하느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상식적이다. 히느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에게 자신을 알고 싶게 하는 마음(긋)을 일으켰던 바, 이것이 은총이다. 은총 받은 존재의 상태를 ‘긋’이라 말해도 좋겠다.

< 3 >

여하튼 절대자는 우리를 참(一)으로 이끌어 간다. 이 부름에 응하려면 인간에게도 상당한 정신이 필요한 법이다. 세상에는 이런 ‘참’을 없다고 치부하는 이들이 많다. ‘참’이 없다면 우주도 없는 것인데 이보다 멍청한 소리는 없을 것이다. 절대자(一)를 잘 인식하여야 세상이 옳게 보일 수 있다.

인식의 ‘인’(認)자는 말씀 언(言)변에 심장(心)으로 칼날(刃)이 들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첫 시의 두 글자, 언인(言忍)이 적시하는 바다. 다석은 이를 우리들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Sein in Christo)는 뜻으로 풀었다. 예수란 칼날이 평생에 걸쳐 우리들 심장을 노리고 있는 바, 우리들 인생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인내하며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 4 >

이렇듯 인(認)자를 풀이하며 다석은 모든 학문을 궁신지화(窮神知化)의 길이라 여겼다. 상대세계 속에서 변화하는 원인을 밝혀 결과를 아는 과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종교와 과학은 결코 적대적일 수 없다. ‘지화’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 하나인 ‘궁신’에 이를 수 있기에 말이다. 지화는 학문(철학, 과학)이고 궁신은 종교가 될 뿐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궁신지화’를 자신의 신학(神學)이라 칭했다. 이것 외의 별칭의 신학들은 모두 자기결핍의 소산이라 평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 학문은 신과 통하는 경지(神通)에 있다. 단지 神을 확인하는 경지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신통하니 신비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비 아니면 과학일 수 없다는 말도 그래서 가능했다.

짝이 있는 세상에서 원인/결과는 바로 신비에 속한다. 하나(절대)로부터 상대(짝의 세계)가 비롯했기에 말이다. 절대자를 알고 싶을 경우 상대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그래서 옳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역설적으로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다고 하였다.

< 5 >

사람의 정신은 절대와 상대를 연결시킨다. 아니 연결을 넘어서 부자지간의 관계를 맺게 한다. 서로의 뜻 전달, 교감시키는 것이다. 이들 간에 알고 모름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속에 아들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다른 듯싶지마는 절대로 다를 수 없는 것이 절대와 상대, 전체와 개체의 관계인 것이다. 다석은 이를 종종 불이(不二)적 관계라 하였다.

이런 정신 활동을 다석은 성령의 운동이라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정신활동이 바로 거룩한 영의 역사(役事)이다. 그가 철학, 과학을 신학과 분리시키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자기의 얼굴도 그리워할  수 있는 법이다. 결국 한 시 첫 연, ‘忍言仁三二l’는 참고 참는 것, 아버지가 참고 참으며 기다린다는 뜻이 되겠다.

말했듯이 우리들 심장에 그리스도란 칼이 꽂혀 있다. 상대세계에 살면서 이런 심장 속에 박힌 칼이 없다면 우리는 ‘긋’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참고 또 참아서 이룰 일인 까닭이다. 정신활동이 성령의 역사란 것이 바로 이를 웅변한다. 칼날로 심장이 쪼개져야 상대세계 속에서 불꽃을 피울 수 있고 그것이 세상에서 사랑(절대)을 말하는 방식이다.

예수가 바로 이런 존재였다. 상대세계에서 ‘참’(一)이 되었던 까닭이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여기서 사랑과 仁은 성령의 다른 말일 수 있겠다. 다석의 입에서 삼위일체란 말이 나오는 대목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둘 째 한시에서 말할 ‘기독교(자)’의 본질을 여기서 모두 말한 셈이 되었다.

< 6 >

참차유래시(參差由來是). ‘참차’란 알송달송하다는 뜻이다. 둘이 있어야 차이가 생겨나는 법이다. 상대세계의 다른 표현이 바로 참차(參差)이다. 그렇기에 알송달송한 것이 이 세계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참차의 세계를 통해서 절대를 향하는 것이니 참고 바라며 사랑의 짐을 지고 가라고 한다.

소자모방황(小子慕方徨). 여기서 소자(小子)는 긋과 깃을 뜻한다. 소자는 아버지와 하나 되려고 하기에 괴롭다. 그 길이 지난하기 때문이다. 지난한 것은 아버지, 그(一)를 좀처럼 옳게 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동서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힘겨워 절대를 잊고 상대세계에 안주하기 다반사이다. 돈과 명예 그리고 色의 욕망으로 삶을 꾸려본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누군지 옳게 인식하지 못할 수 밖에. 하지만 상대세계에 떨어지면서도 그를 그리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바닥에 이르기까지 방황하면서도 님 그리는 인간이 바로 소자이다.

‘보본추원미’(報本追遠微). 이 상태에서는 근본을 찾는 의지가 아주 박약하다. 하늘(一)이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상태라 할 것이다. 유교 경전보다 성경이 하늘 이르는 길을 밝히 보여주었으나 방황이 깊어 그 길을 가지 못한다. 유교가 하늘 길을 덜 밝혀 준 것은 조상, 곧 무를 잊고 유(有)에 얽매여 있었던 탓이다.

< 7 >

‘추추도직입’(推推到直入). 추리 ‘추’(推)자 둘을 겹쳐 글을 썼다. 거듭 생각하란 뜻일 것이다. 궁신지화에 이르기까지 계속 생각하라는 것이다. 신비한 것일 지라도 그를 추리할 것을 요구했다. 생각들을 모아 추리하다보면 무한 영감(靈感)이 발생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나는’ 생각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추‘(推)자에서 초월(超越)의 뜻을 보고자 했다. 직관적인 것, 논리를 뛰어넘는 사리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자근이’(自本自根已). 직관적으로 추리하고 영감으로 해석하여 사리(事理)를 초월한 이후 도달한 상태가 바로 ’자본자근이‘, 곧 자기 밑둥(本性)으로 들어간 상태이다. 이 경지에서는 아버지(一)가 별도로 존재치 않는다. 긋과 깃으로서 자기 밑둥에 이르면 그곳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될 뿐이다.

‘부지지치고’(不知知痴固), 인(認)과 달리 지(知)는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주객도식을 벗을 수 없는 상태에 있기에 말이다. 상대세계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 엣 ‘고’(古)에 갇히면 고루(固)해진다. 그렇기에 자기 아는 것만을 내세우는 것을 일컬어 치고(痴固)하 했다. 어리석은 완고(頑固)라는 말과 뜻이 같다. 수백 년 전 만들어진 교리를 그대로 신봉하는 오늘의 교회들의 자화상이라 할 것이다.

‘지부지신비’(知不知神秘).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르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대중들 앞에서 자신 것을 옳다 큰 소리 치는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대중 설교가들을 상상해 본다. 이들에게도 지부지(知不知)가 필요하다. 그래야 최소한 겸손해 질 수 있다.

신비란 쉽게 풀려지는 수수께끼와 다르다. 아무리 설명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비이다. 하느님을 다 알 수 있는 듯 말하지만 그 역시 ‘숨어계신 분(Deus Absconditus)’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신비일 뿐이다. 이를 잊으면 교회라 할지라도 소자모방의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추원보본(追遠報本)하더라도 그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 것(敬而遠之)을 옛 사람들이 충고했다.

< 8 >

이제 ‘기독자’(基督者)라는 한시를 보겠다.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다석은 기독인을 ‘기도하는 사람’이라 간단히 정의했다. 그렇지만 기도는 배돈(陪敦)하게 해야 옳다. 배돈이란 재판자가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판결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정중히 두텁게 재판하라는 것이 이 말뜻이다. 원기식을 통해 다석은 우리들 호흡을 하늘에서 받아 하는 기도라 했다. 여기서 원(元)은 숨을 말한다.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찬미이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 바로 찬미란 말뜻이다. 다석은 우리들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것을 하느님을 향한 찬미로 여겼다. 그가 늘 말했던 ‘몸성히. 마음놓이, 바탈ᄐᆞㅣ히’가 맥박을 건강하게 뛰게 하는 것인 바, 찬미의 본뜻이라 여긴 것이다. 이렇듯 숨을 하늘로부터 받아서 두텁고 정중케하여 건강한 맥박으로 하늘에 찬미하는 삶을 다석은 기독자의 모습으로 여겼다.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이것은 제사와 성찬식 때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제사나 예배 후 개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다석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감사기도 올리고 먹는 음식이 이 정도라면 현실세계에서의 욕망이 얼마나 클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암(癌)자를 생각해 보라. 세 개의 입(口)을 갖고 산(山)처럼 많이 먹어 생긴 병이라 일컫지 않는가? 생각할 여지를 준다. 음식 먹을 때 맛(욕망)으로 먹지 말고 항시 감사(뜻)으로 먹을 일이다.

‘체성극명야귀탁’(諦誠克明夜歸託). 하느님을 옳게 추원하는 것이 체(諦), 곧 제사요 예배이며 이런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성(誠)이라 한다. 이 때 체성은 치성(致誠), 즉 성(誠)에 도달한 상태를 일컫는다. 지성이면 ‘感天’이란 말이 있듯이 이 과정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신탁은 이렇듯 誠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체성(諦誠)을 밝혀 하늘에 기도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체성이 밝혀지면 세상사 어둡고 캄캄한 것을 걱정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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