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사 62:1-7; 롬 11:13-24; 막 1:1-11)성탄절 둘째주일(1월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1.03 15:45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오늘 마가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다른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가령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마 1:1)”로 시작하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누가복음도 저자 누가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눅 1:1-3)”으로 시작합니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주어진 사실에 관해 보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4복음서의 예수 상>

게다가 요한복음은 철학적인 지평으로, 또한 태초의 사건으로 예수님을 끌어 올립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요 1:1)’으로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오직 마가복음에만 복음이라는 말이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서는 마가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 집중한 도올 김용옥 선생은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통나무, 201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가복음이 마태·누가복음의 원형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복음서 문학양식의 최초의 형태라는 사실, 그러기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사전의 뽄(model)이 없는 창조의 고통이나 절박감, 질박한 개척자의 언어감각이나 소박한 시대성의 반영이 보다 절실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으로 족하다. 마가복음은 최초의 복음서이다. 마가복음으로써 최초의 복음서 문학양식이 출현한 것이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에 관한 가장 오리지날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마가복음은 신약성서 27편 중 가장 질박한 오리지날리티를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가복음은 신약성서 27편의 핵이다.”

또한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예수(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라고 합니다만)’의 원형을 가장 정직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숨 쉬고 먹고 일하며 눈물 흘리고 고통 받았던 인간 예수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보다 먼저 쓰여진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예수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마가의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케리그마화(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된 예수’의 차이입니다. 계속 본문을 볼까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2-5)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자입니다. 본문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6-8)

이렇게 요한에 관한 소개 후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성령이 임하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림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은 유앙겔리온이라는 헬라어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승전보(勝戰譜)’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예수님 당시의 유앙겔리온을!

예수님보다 60년 먼저 태어났던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로마의 전권을 장악하려고 전쟁을 벌입니다. 마지막 전쟁으로 악티움 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물리치고(B.C. 31년) 로마의 100년 내전을 끝내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고 황제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의 승전보가 유앙겔리온, 곧 복음입니다.

이 유앙겔리온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사람’, ‘신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로 승격 됩니다. 또한 로마를 위기에서 구원한 ‘구세주’, 로마에 평화(Pax Romana)를 가져온 ‘평화의 왕’이라는 호칭도 주어집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흔히 보았던 ‘신의 아들’, ‘주님’, ‘구원자’, ‘평화의 왕’, ‘은혜’, ‘진리’ 등이 모두 아우구스투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마가는 신의 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신의 복음서 가장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승전보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분의 말씀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역입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인에게(구약), 그리고 이방인에게 까지(서신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장됩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의 화목을 향하여 복음의 기쁜 소식이 펼쳐 나갑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을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2.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먼저, 구약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인들에게 확장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볼까요?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 62:1-3)

시온, 곧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이제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기쁜 소식으로 유앙겔리온으로 들립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

성경은 신랑, 신부의 관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유비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헵시바의 뜻은 “내 기쁨은 그녀에게 있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쁄라는 한번 결혼했다가 버림받았던 여자에게 쓰이는 말로, ‘결혼한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영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의 신부(백성)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 이름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기쁜 소식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렸습니다.

3. 영화 <유령신부>의 엔딩 장면

팀 버튼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유령신부>(2005)의 주인공 빅터는 돈은 많지만 신분이 낮은 부모를 두어 가난한 귀족의 딸과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빅터는 자기 마음인 양 갇혀 있던 나비를 풀어줍니다. 나비는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닙니다. 이제 결혼식 리허설, 빅터는 아내가 될 빅토리아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리허설에서 빅터는 말을 더듬게 됩니다. 격식을 우선시하는 성당 신부와 미래의 장인, 장모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빅터를 내쫓습니다.

<유령신부 포스터>

이후 빅토리아에게 애정을 느낀 빅터는 숲에서 혼자 결혼 연습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빅터는 실수로 죽은 시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생각지도 못한 결혼 서약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끌려갑니다. 빅터의 반지를 낀 예쁜 유령 신부는 빅터를 죽은 자의 나라에 주저앉히려고 하지만, 빅터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유령 신부의 과거가 밝혀지고,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낀 빅터는 땅 위의 신부와 땅속의 신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빅터와 유령신부>

또한 지상에서는 새로운 신랑이 나타나 갈등이 증폭됩니다. 이렇게 땅 위와 땅 아래에서 동시에 일어난 갈등은 죽은 자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고, 영화 첫 장면에서 보았던 한 마리의 나비가 이번에는 수많은 나비 떼가 되어 날아가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마지막 장면, 곧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수많은 나비 떼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장면이 바로 헵시바요, 쁄라인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선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쉬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4.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복음의 기쁜 소식이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으로 까지 나간다고 말씀드렸었죠? 서신서의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전제로 합니다. 말씀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쓰신 개역개정과 비교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내가 맡은 직책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내 동족 유다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구해 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버림을 받은 결과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주실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롬 11:13-15)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함, 롬 10:16-21)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가운데 다수가 버림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도 ‘남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읽어 볼까요?

“떡 반죽에서 떼 낸 첫 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도 거룩합니다. 또 나무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 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같이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들입니다.”(롬 11:16-17)

여기 올리브 나무는 감람나무를 말합니다. 조금 정리를 해 봅시다. 구원의 시작, 곧 복음의 지평은(바울은 비유로 갈람나무의 뿌리로 이야기 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돌 감람나무(wild olive)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며 많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잘 났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람나무>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8)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 붙임을 당했으면, 가지는 돌 감람나무 그대로 돌 감람나무 가지입니다. 열매도 돌 감람나무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영양분만 참 감람나무로부터 공급받습니다. 따라서 가지와 열매는 자신의 원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자기들이 잘 나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자기부정’이 신앙인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11:19-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참 감람나무 가지도 아끼지 않고 잘라 버리셨는데, 돌 감람나무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 11:22-23)

이방인인 우리들, 곧 돌 감람나무가 유대인인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 위하여서는 참 감람나무가 찍힘을 당하였습니다. 불순종한 이들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찍힘을 당한 참 감람나무가 회개하고 돌아와 순종한다면 접붙임을 받기가 더 쉽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였던 여러분이 잘려서 제 나무가 아닌 딴 좋은 올리브 나무에 쉽사리 접붙여졌다면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다시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롬 11:24)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유대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5. 거룩한 분노와 지혜로운 자기부정

서신서 말씀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또한 구약의 말씀을 통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화목과 회복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2020년 신년주일입니다. 올 한해도 우리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동시에 이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 가정에 가득 차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에 충실한 일꾼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보이는 상(像)’보다, ‘보이지 않는 이념(理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상은 물론이요, 보이지 않는 이념도 절대적인 것으로 추종해서는 안됩니다. 로마 황제는 그런 어리섞음을 범했습니다.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자, 인생의 안내자이십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손봉호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념을 상대화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중재와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좌, 우를 초월해서 우파가 강조하는 ‘자유’도, 좌파가 추구하는 ‘정의’도 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탐욕으로 가득 찬 우파의 뻔뻔함’과 ‘독선에 취해 있는 좌파의 위선’과는 모두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명성교회, 사랑의 교회, 사랑제일 교회, 대전 중문교회 등의 윤리적 타락으로 사회의 신임을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이념에 근거한 대규모 정치집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념 자체가 종교적인 확신이 된 것이죠? 칼 포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된 이념은 열린사회의 매우 위험한 적이다.” 손봉호 교수도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어리석은 자해행위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탐욕과 독선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자유만으로도, 정의만으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분노’와 ‘지혜로운 자기부정’을 통해 다른 세상은 시작될 것입니다. 새 날을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황제의 복음과 달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분노와 지혜로운 자기부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2020년 새해 좋은 일 많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