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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법와 한국교회, 희년법을 통해 생각해 본다희년법은 모두에게 좋은 법이 아니었다
이이소 | 승인 2020.01.07 17:46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능한 힘을 모아서 좋은 법을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자를 견제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균형 잡힌 사회를 지향하는 좋은 법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공수처법이 보여준 한국교회의 민낯

그런데도 지난 연말에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가진 공수처법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참으로 어렵게 통과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전문가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의 공수처법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를 초래하며 나라와 민족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불의한 기득권 형성과 야합의 기회를 차단하고 예방하려는 좋은 법이라고 생각한다. 권좌에서 불법을 저지른 고위공직자를 조사하고 공개하여 처벌받도록 하는 바른 법을 만드는 일을 음해하며 훼방하는 집단이 있다는 사실과 색깔론으로 그에 공조하며 무조건적인 배타와 폄하를 일삼는 일부교회의 작태가 심히 안타깝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 기득권 포기의 율법을 만들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발적인 물질과 권력, 명예와 영광의 포기의 덕을 강조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자신들의 기득권 포기는커녕 고위공직자들의 기득권 남용과 악용을 견제하려는 좋은 법마저 반대하고 있으니 과연 이들이 크리스천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교회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한국 사회의 질타를 처음에는 지나치게 과장으로 생각하여 변명하고자 하였는데 이제는 겸손히 인정하며 수용한다. 나로서는 거대한 공룡이 된 교회를 개혁하며 갱신시킬 능력도 없고 교회가 빚어내는 사회적 공해, 영적인 공해를 정화시킬 힘도 없다. 그러나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는 교회는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짜하니 아프다.

맘몬의 세계는 돈과 힘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움직인다. 두 개의 축은 교육과 언론과 역사를 장악하여 자기들의 질서, 구조와 조직을 영구화하려고 한다. 맘몬숭배자들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을 정치, 경제, 사회의 원리로 떠받들고자 과학과 심리를 이용하여 그럴듯한 이즘을 생산하며 유포시킨다. 지식인과 과학자를 앞잡이 삼아서 역사 조작과 왜곡, 폄하와 비하를 통하여 제국주의의 불의와 거짓, 폭력과 야합을 정당화, 합리화시킨다. 종교마저도 시녀로 만들어서 사제를 통해 국민들을 통제, 조정하며 우민화내지는 광란으로 몰아간다.

한국은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노론에서 시작된 친일파, 반공주의 독재자, 군사독재자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기득권 세력들의 광포함이 가득하다. 교회가 맘몬에게 사로잡혀서 자기들만의 아성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기득권 세력의 상상을 넘어서는 불법 폭력과 비상식적인 언행에 야합하여 함께 거짓과 유언비어를 생산하며 유포하는 행위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며 반-하나님적이다. 성서는 맘몬에게 붙잡힌 기득권 독점 세력을 경계하며 회개하라고 한다.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인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른다.

희년법, 창조 세계의 목적

성서는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만물과 생명이 하나님의 나눔으로 시작되었음을 창세기 서두에서 힘차게 선포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원 역사의 대홍수와 바벨탑은 인간의 독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소수의 독점으로 다수가 굶주리는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한 세상, 소수의 낙원을 위해서 다수가 노예로 고통당하는 불행하고 불의한 세상을 악으로 규정하시며 창조 질서 회복을 위해 친히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출애굽은 세상을 고난과 죽음, 멸망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독점과 독재를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에 대한 증언이다.

특별히 “희년법”은 히브리공동체의 사회적 평등과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희망이다. 희년법은 결코 모두에게 좋은 법이 아니다. 가진 자, 강자, 부자에게는 폭력이며 약탈 수준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는 실로 해방이며 자유이다.

오늘날 희년법이 선포되면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고 선포자는 미친 자나 과격분자로 취급될 것이다. 수천 년 전에 현대인들보다 더 이상적이며 인도적인 방법으로,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과 계급사회 적폐의 고리를 끊고자 하였던 모세의 희년법에 경의를 표한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우리는 바로의 폭력통치와 완악함을 문제 삼지만 성서는 애굽 전체가 바로의 폭력과 억압에 동조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당시 애굽인들은 새 왕과 담합하여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거짓 정보를 유포하였으며 인종적 편견과 독선으로 히브리인들을 배타하였다. 그들은 강제노동으로 히브리인을 집단적으로 착취하여 경제적인 이득과 혜택을 누렸으며, 유아 집단 살해에 공범으로서 죄책감을 느끼지 아니 하였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자면 히틀러의 나치파쇼국가와 국민, 식민지 약탈에 광분한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와 국민들의 면모이다. 애굽인들은 바로의 철권통치에 협력, 동조하며 강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으며 바로가 주는 부의 부스러기를 축복으로 거두었다.

소수자이며 이방인인 히브리인의 생명과 노동이 일상적으로 약탈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희년법을 선포하게 되는 모세가 태어났다. 그는 운이 좋게 대량 학살의 죽음을 피하였으며 애굽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권력 정점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태생이 아웃사이더인 그는 결코 권력의 정점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히브리 노예에 대한 애굽인들의 착취와 축적, 생명 경시, 바로에 대한 신적 경배와 찬양, 그들의 화려한 번영에 고뇌하였다. 그는 한 나라 안의 두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악순환, 차별과 소외, 인간성의 파괴를 목격하였다. 그는 실로 강자의 반열에서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모든 고통에 고뇌하였으며 그런 그의 마음이 히브리인을 치는 애굽인을 살해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모세의 살인은 자기의 능력과 열정으로 히브리인을 해방시키려고 생각한 그의 만용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살인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두려워서 바로 광야로 도망쳤다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살인이 계획된 거사도 아니었으며 만용도 아닌, 두 집단의 경계선에서 살아 온 자의 강자에 대한 분노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또한 두려움 때문에 구명도생 하기 위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고 왕자의 기득권으로 자신의 죄를 충분히 덮고 무마할 수 있지만 애굽 세계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그의 영혼이 살인 이후, 새로운 세계로 떠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탈주했다고 생각한다.

광야로 떠난 그는 야곱처럼 결혼이나 가족, 부의 축적 등에 관심이 없었다. 40년 동안 묵묵히 목동으로 살며 광야에서 신의 창조와 삶의 가치를 궁구하였다. 인간사회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기득권과 죄악, 그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의 존엄성, 파괴되는 공동체, 심화되는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직시하였다. 그는 강자와 약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과 갈등이 최소화 되거나 극복되어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함께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모두가 함께 행복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회복되길 간절히 바랬다. 그의 이상세계에 대한 꿈이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으로, 안식년과 희년법으로 세상에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는 물질을 초월한 세계, 영과 진리의 세계에 대한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서에는 생명과 물질, 축복과 물질, 정의와 물질, 사랑과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해주신 율법의 핵심인 희년법도 놀랍게도 사회 경제법이며 인간 회복의 법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기득권 방지법으로 출애굽이후 가나안에서 정착하는 히브리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 번영을 비는 하나님의 마음과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법이다.

포기를 요청하는 희년법

희년법의 목적은 히브리백성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신실하게 지켜서 사회경제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파탄에 이르지 않고 50년 마다 새롭게 개혁, 갱신되어 건강한 예배공동체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번영, 존속하는 것이다. 희년법의 내용은 토지, 가옥, 종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1) 가장 먼저 생산의 기초가 되고 생명 활동의 근거가 되는 토지에 대하여 언급한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익 추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땅을 살 때, 파는 자가 억울하지 않게 값을 쳐줄 것이며 만약에 그 형제가 땅을 무르기 원하면 물러주어야 한다. 만약에 판자가 부유하게 되어 땅을 물기를 원하면 물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땅이 물리지 않은 상태에서 희년을 맞이하게 될 경우, 주인은 희년법에 근거하여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

희년이 선포되면 경제적인 실패와 파산으로 땅을 팔고 땅이 없는 자로서 살아 왔던 가난한 자들이 각자 자기 소유지 즉, 가나안 입주 시에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간다.

희년법은 토지를 산 자에게는 “기득권 포기”를 요청하였고, 토지를 판자에게는 토지를 돌려주는 “구속과 회복”의 은혜와 해방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다시 모두 다 함께 창조의 처음 자리, 가나안에 입주하여 토지를 분배받은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동안에 쌓였던 사회적인 문제들, 빈익빈 부익부의 적폐를 해소하고, 화해하며, 대화합을 이루어 히브리공동체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사회가 집단적으로, 동시적으로 거듭나며 혁신되는 것이다.

둘째로 희년법은 생활의 터전이 되는 가옥에 대하여 언급한다. 성안의 가옥은 판 지 1년 안에 토지처럼 무를 수가 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판 사람이 무르지 않으면 주인이 되어 희년에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성 밖의 가옥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무를 수 있으며 희년에 돌려주어야 한다.

희년법은 가옥을 산 자에게는 “기득권 포기”를 요청하였고 가옥을 판자에게는 무상으로 돌려주는 “구속과 회복”의 은혜를 베풀었다. 시골의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아프고 슬픈 사연을 지닌 빈민들이 유랑생활과 종살이의 종지부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집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도록 보금자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무주택자들에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을 되돌려줌으로서 공동체를 회복시키며 안정시키며 가정의 문제와 연계된 사회문제를 일시에 동시적으로 해결하여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끝으로 희년법은 가난한 형제에 대한 배려와 종에 대하여 언급한다. 만약에 가난한 형제가 경제적인 호의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몸이 팔려 와서 종이 되면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다가 희년에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희년법은 주인에게는 “기득권 포기”를 요청하고 있으며 종에게는 한없는 속량의 “자유와 회복”을 베푼다

 이는 재산과 생산의 도구로 전락되어 물화된 인간을 인간 본연으로 살도록 하는 해방의 법이다. 희년법은 경제적 파탄으로 일어난 사회의 분열, 서열화와 계급화를 막고 창조의 처음 자리, 출애굽의 자리로 돌아가 평등한 인간사회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인간을 노예로 부려서 존엄과 인권을 짓밟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희년법은 히브리인이 종을 취하려면 이방인을 취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형제가 거류민, 이방인의 종이 되었을 경우, 최선을 다해서 무를 것과 무르지 못했을 경우, 희년에 자유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희년법의 양면성

희년법의 실행은 안식년이 7번 지나고 첫 해가 되는 50년째 해에 적용되며 반복적으로 주기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희년법이 히브리공동체적으로 온전히 실시된 역사적 사례가 거의 없다. 이상으로 우리는 희년법에 대하여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희년법은 결코 모두에게 좋은 법이 아니다. 공수처법이 기득권을 이용해서 아성을 쌓으려는 사람들과 집단들에게 좋은 법이 아니듯이 희년법 역시 돈과 힘을 거머쥔 기득권자에게는 포기와 기부를 강제하는 악법이며 법을 빙자한 폭력일 수 있다.

둘째, 희년법은 사회적 약자와 정의와 평등, 평화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좋은 법이다. 공수처법이 사회적 약자와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법으로 생각되듯이 희년법은 사회적 약자와 애굽의 노예살이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법이다.

셋째, 희년법은 출애굽의 해방을 주도하신 하나님의 약자의 보호법이다. 토지와 가옥의 원상복구와 종의 속량은 순전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 사랑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독점되어서는 안 되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속량 받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 누구를 종으로 삼거나 누구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거나 양식을 빌려주며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약자를 회생시키고자하는 희년법은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다.

넷째, 희년법은 경제개혁법이며 동시에 사회개혁법이다. 흔히들 종교는 영적이며 신령한 세계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희년법은 빈익빈, 부익부의 적폐로 불의하며 불평등한 경제와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경제법이며 사회법이다.

다섯째, 희년법은 토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 기득권자야말로 사회문제에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희년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양보와 포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희년법은 법도를 지켜 행하면 가나안 땅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법이었다.

희년법은 진실로 자녀들을 사랑하되 자손만대로 사랑하기 위해 주신 아름다운 법이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행여 애굽의 바로처럼 탐욕으로 서로 학대하며 고된 노동으로 형제들을 괴롭히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없도록 미리 축복으로 주신 법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좁은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위대한 배려와 법을 외면하였고 결국 시지프스처럼 개혁의 바위를 산정까지 올리고 다시 실패하는 반복을 오늘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자기의 일을 ‘희년을 전파하는 일’(2)이라고 하셨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나눔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희년법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사는 남은 자들의 새 역사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희년법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희망의 날개를 편다.

미주

(미주 1) 레위기 25: 8~55
(미주 2) 누가복음 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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