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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현대 무교회주의무교회주의가 한국교회의 희망인가? 자유라는 사회질서가 보여주는 괴물 (1)
이왕용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 | 승인 2020.01.11 17:42

지금 많은 현대인들은 교회라는 것에 많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한 결과로는 우리가 “하나같이 서구 기독교의 틀과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1)는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 문화는 동양의 문화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정서를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저항의 정신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한계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특징들을 보면, 한없이 교인을 모으기 위한 교회의 형태를 구조를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교회의 본질과 한국교회의 문제

이러한 교회의 형태는 형태와 구조로서 많은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교회라는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 대형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것에 대해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되어 있지만, 부활절 이전의 예수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 3. 하나됨과 거룩성, 그리고 가톨릭성과 사도성은 교회의 표지이다. 가톡릭성은 특정 교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개방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4. 교회제도는 현재의 교황제도가 아니라 만인사제직에 더 가까우며, 교회 직무의 다양성은 계급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은사에 기인한 것임을 밝힌다.”(2)

현대의 교회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덩치를 키워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찬미의 대상이 되는 교회의 겉모습에 분노를 야기하고 있다.”(3)고 전하며 교회가 형태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찬미의 대상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다.”(4) “우리가 교회며, 교회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5) 이는 교회의 구조와 형태로서의 교회를 폐지시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어쩌면 김교신의 무교회가 지금의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로하는 것이 아닐까? 교회라는 것은 구조와 형태가 무너진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교회의 특징이다.

“(1) 신앙인 개인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표현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신앙고백을 존중하는 공동체 (2) 어떤 형태의 에클레시아든지 간에 철저하고 지속적인 서서 공부가 그 중심 축이 되어야한다.(오직 성경) (3) 교회가 살아 있는 신앙을 일정한 형태의 제도 속에 묶어넣으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해야한다. (4) 세상 질서를 초월하는 이들의 신앙은 동시에 세상 참여적입니다. (5) 교회가 부여하는 타이틀을 거부하다 보니 원칙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평등한 사귐(egalitarian koinonia)을 지향합니다. (6) 모든 에클레시아는 각자 특수한 제자리가 있다고 보는데, 따라서 한국적 에클레시아는 한국의 종교, 사회, 문화 전틍을 소화하고 그 내용을 담아내는 기독교 공동체여야 한다.”(6)

이것은 지금의 형태의 교회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 형태의 교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2) 한국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편신도의 소명인 세상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 (3) 상당수 목사들의 교육수준이 형편없다. (4)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내용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웬말이냐. (5) 구교, 신교 합치면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한국 교회는 제 소리, 제 신앙고백이 없고 다 가져온 것이냐. 진정 은혜체험하고 하나님 만났으면 시편 한 편, 주체적 신앙고백 한줄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 (6)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이 없다. (7) 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한국인 목회자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다. 다양하게 성서를 연구하는 자발적인 그리스도인 모임이 없다. 기껏 유교의 독재를 벗어났는데 새로이 독재자를 만난 기분이다. (8) 한국 기독교는 너무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도대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초월적 신앙의 적용 부분을 발견할 수가 없다.”(7)

이광수는 현대 교회의 잘못된 인식들을 확실하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상황은 무교회주의로서 파헤쳐 나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상쳐받고 의미를 잃어가는 교회라는 이미지가 다시금 김교신의 무교회 주의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무교회는 저항이라는 것이다. 저항이라는 것은 현재에 대한 비판이고 저항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저항과 비판적인 것은 무엇인가?

현대 문화에 대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문화 의식의 변경이다. 문화의 변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은 인식의 변화이기 때문에 한번에 변경될 것이라는 조급한 마음은 벗어버리고 생각해야한다. 그렇다면 김교신이 말하고 있는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알아야한다. 일제의 교회는 교파가 나뉘어서 싸우기 바빴다. 이는 “서양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갈라진 것이였다. 그들은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지역을 분할하였다. 그래서 미국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경상도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는 함경도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는 경기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8)

▲ 김교신 선생님

일제가 종교 탄압을 시작하면서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한국 교회의 지도권은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들은 은사를 살려서 교파 중심형 교회를 열심히 양육하다보니 교파 교회간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이끌던 때보다 더 열심이였다.(9)  이것은 교파간의 갈등을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교신의 무교회가 시작이 되게 된다. 그의 무교회는 일본의 스승인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았다.

“대부분의 민족주의적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우치무라의 무교회는 민족이 중심이였던 반면,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이 중심이었다. 나무를 접붙이는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민족주의적 그리스도인과 우치무라는 국가가 나무고, 기독교는 그 나무에 접붙여지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반면 김교신은 한국교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고, 조선은 그에게 접붙여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나무였던 김교신의 전적 신앙은 초월적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삶을 전적으로 전하는 것을 의미했다.”(10)

전적인 기독교라 함은 교파를 두고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다. 김교신의 전적인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초월신앙과 더불어 진정한 에클레시아였다. 진정한 에클레시아란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삶을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하는 공동체였다.

“그는 초월신앙과 진정한 에클레시아가 균형을 이뤄야 전적 기독교라고 보았다. 이러한 균형을 잃은 신앙 공동체라면 무교회 공동체라 할지라도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11) 

그의 무교회의 모임은 서당과 같은 기독교(이를 서당식 기독교, 서당식 에클레시아라 하였다. 김교신 전집5:10)였다.

“먼저 책을 읽고 강해를 하는 모임이였다. 둘째,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는 자발적인 모임이다. 셋째, 그들은 조그마한 모임이였다. 넷째, 구체적인 한 지역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그 지역의 주민들과 삶을 나누게 되었다. 다섯째, 교육을 통해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려했다. 김교신의 무교회는 책과 성서를 가까이하며 강의를 했으며, 공식적으로 교단에서 인정이 된 교회라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닌 모임이였다.”(12)

사회와 담을 쌓은 공동체가 아니였다. 사회와 교회가 잘못한 것에 대해 말을 하며, 자신들이 교육을 통해 바꾸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현재 무교회주의, 문제점과 해결법

나는 이전에 way church라고 하는 이태원과 홍대, 인천, 충청도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회에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교회를 알게 된 것은 GNSN(개나소나)홍대 불금 전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론은 신기했다.

먼저 그들은 현대의 교회에 해서 비판적이였다.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화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13)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제자화는 교실을 기반으로 하는 수업이 아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 애쓴다.”(14) 이들은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도이며 교회였다고 바라보고 있다.(15)

하지만 이러한 교회는 밀라노 칙령 이후부터 오염되기 시작했다. 박해가 사라지게 되고 정착하게 된 “국가 리더십은 제자화를 위해 떠나는 대신에 한 장소에 머물러 교회 건물을 쌓아올렸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인 ‘따라오라’를 받아 ‘떠나’가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오히려 멋진 국가 건물들 안에서 ‘들어오라, 그리고 떠나지 마라’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건물을 갖게 된 교회는 제자화 중심의 교회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기 시작했다.”(16)

웨이처치의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명령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준수하고 있다.(17)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교회는 건물적인 것이나 형식과 형태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는 예수님이다.”(18)라고 말하고 교회의 주인을 목사나 장로가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누구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이 교회이시고, 그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이룰 수 있으며, 어떤 교회든 예수님의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제자화하는 교회이다. 그 모습은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름, 성경 말씀대로 순종함”(19)을 근거로 철저하게 성경적인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를 근거로 그들의 교회론은 선교론과 통합이 된다. 아니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십자가 첨탑, 찬양팀, 온풍기, 화장실이 없어도 예수님 때문에 모이면 그곳이 교회가 된다.”(20)  이들은 중세 교회론을 부정한다. “건물 중심(아름다운 성당), 특별한 날(주일), 전문 리더(국가 공인 성직자), 자기 유지 방법(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특별한 의식(시스템 유지를 위한 동기 부여 의식)이 그것이다.(볼프강 집존, 『가정교회』,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4], 76~79) 문제는 이것들이 비성경적이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21) 웨이처치는 이것들을 부정한다.

이들의 활동은 참으로 무교회적이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교회는 건물이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당신이다. 바로 당신이 교회이며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그 교회는 멈추지 않는다. 설교권이나 성만찬에 대해서 개방적이였다. “성만찬은 식사다. 평범하다. (중략) 밥을 보면서 예수님의 몸이라고 생각하며 먹어라. 국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라고 생각하며 마시라.”(22)

이들의 전도 방식도 다양했다. 개인이 교회(제자)가 되었을 때,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일상에서 제자화를 하게 되면 그곳은 교회가 된다.(23)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받고 나가서 자신이 교회가 되는 엄청나게 획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이루워지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금전적인 문제가 제일 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단이나 교회에 후원을 받는 경우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모든 후원은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고, 두 직업의 목회자가 되기로 한다. 이를 바이 보케이셔널(Bi-Vocational)이라고 부른다.(24) 많은 사람들은 두 직업의 목회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를 네 가지로 정리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 그의 믿음만 충분하다면 직접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오해다. 하지만 바울의 텐트 메이킹 사역을 보라. 둘째, 설교 능력과 관련된 오해도 있다. 훌륭한 설교자가 된다면 그에게 월급을 주는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설교 한편보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성도수가 적으면 목회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직업 목회자는 한 번에 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넷째, 헌금이 적은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라는 오해다. 이들은 일대일로 심방하고 성경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집중하느라 헌금 액수나 교단 등록은 거의 신경 쓰지 못한다.”(25)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버리고 바이 보케이셔널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주

(미주 1) 백소영,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24.
(미주 2) 한스 큉, 『교회』, 정지련 역(서울: 한들출판사, 2007), xxxxvi.
(미주 3) 한스 큉, 38.
(미주 4) 한스 큉, 42.
(미주 5) 한스 큉, 43.
(미주 6) 백소영, 23~33.
(미주 7) 이광수, “금일 조선 야소교의 결점”, 『전집』 20권(서울: 삼중당, 1963), 17:20~26; “신생활론”, 같은 책, 515~555.
(미주 8) 김대인, 『숨겨진 한국교회사』(서울: 한들출판사,1995), 250 재인용.
(미주 9) 백소영, 69.
(미주 10) 백소영, 90.
(미주 11) 백소영, 94.
(미주 12) 백소영, 109~112.
(미주 13) 송준기, 『끝까지 가라』(서울: 규장, 2018), 34.
(미주 14) 송준기, 34.
(미주 15) 제자는 또 다른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명령했다. 그러면 변화는 예수님이 주도하셨다. 교회는 늘 제자화의 결과물이었고, 그 분에 의해 주어졌다.(마16.18,고전3:6), 송중기, 34.
(미주 16) 송준기, 36.
(미주 17) 송준기, 39.
(미주 18) 송준기, 54.
(미주 19) 송준기, 58.
(미주 20) 송준기, 97.
(미주 21) 송준기, 121.
(미주 22) 송준기, 82~83.
(미주 23) 송준기, 87.
(미주 24) 송준기, 191~192.
(미주 25) 송준기, 195~196.

이왕용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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