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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정체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1.13 17:20
38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가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요한복음 19:38~40/새번역)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라는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지금까지 누리던 것을 잃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시신에게 장례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청하는 행동은 커밍아웃을 각오한 것처럼 보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갔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함께 치룹니다.

▲ Pietro Perugino,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95)

유대인들 사이에서 권력과 명예를 지녔던 두 사람이 변했습니다. 더 이상 감추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달라지게 했을까? 그것도 십자가에서 예수님 사형 당한 직후에. 유대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두렵지만 상관없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 원인이 예수님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처참한 패배이자 실패로 보이는 십자가형과 죽음이 이 두 사람에는 다르게 다가온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계실 때, 보여주신 어떤 기적보다, 어떤 가르침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붙들려 진정한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그들이 어떻게, 왜? 예수님의 죽음에서 역설적이게도 참 생명을 목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형의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은 오히려 참으로 살아있는 삶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오히려 살아있고, 자신들은 살았지만 오히려 죽어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모습입니다. 죽어서 참으로 사는 삶 앞에 무너집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도 묶어둘 수 없는 자유를 따라갑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주신 자유를,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그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부활의 아침까지 기약 없었던 그 어두움은 길고 깊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기도 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도 전에 그들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죽어서 사는 삶이 밝아오길 기도하게 됩니다. 날만 밝아져 죽어 있는 삶만 드러나지 않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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