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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주님이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사람(사 42:1-9; 행 10:34-40; 마 3:13-17)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1.14 17:41

< 1 >

서방교회 전통의 교회력에 따라, ‘주현절’(Epiphany), 혹은 ‘주님 공현(公現) 대축일’은 매년 1월 6일에 시작하거나, 나라에 따라서는 1월 2일부터 8일 사이의 주일로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신현(神現) 대축일’, ‘주님 세례 대축일’ 혹은 ‘성삼위일체 대축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의미에서, 또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공현절이라고도 하는데,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날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은 날로, 동방 정교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때로 봅니다.

그래서 주현절 첫 번째 주일은 주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자,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갱신하는 절기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세례, 일종의 ‘씻김 의식’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 사회, 특히 강 주변에서 발달한 문명권에서 치유와 정화의 의미를 가지는 다양한 형태의 ‘정결예식’으로 존재했지만, 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예는 시리아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은 후, 나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왕하 5,1-14). 유대교 전통에서는 할례 후, 흐르는 물 가운데 서서 율법을 읽어주고, 물에 잠기게 한 후에 물에서 올라오면 완전한 유대인이 되는 하나의 입교 예식이 있었습니다. 후기 유대교 쿰란 공동체에서도 물로 씻는 정결예식이 실천되었는데, 세례자 요한도 에세네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쿰란 공동체의 정결예식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정결예식으로부터 자신의 세례의식을 도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쿰란 공동체의 정결예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쿰란 공동체의 정결예식은 일종의 입회의식이자, 반복적으로 시행되었던 반면, 요한의 세례는 유일회적으로 받는 일종의 회심사건이자,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의 세례는 임박한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면서 그 준비로 회개와 구체적인 삶의 윤리적 변화의 결단을 의미한 것이지요(눅 3,10-14).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면서 시작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말씀하시고(마 28,19-20), 승천하셨습니다(눅 24,51; 행 1,9).

이때부터 세례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되었고, 세례는 회개와 죄 사함(행 2,38),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의 표징, 공동체로의 입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교 세례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도교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 다시 말해, 세례는 성령의 임재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롬 6,3-5).

세례예식의 형식은 알려진 것처럼, ‘잠기는 예식’과 ‘물을 붓는 예식’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헌과 그 시대를 반영하는 모자이크를 보면 처음에는 주로 ‘잠기는 예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라틴 교회에서 ‘잠기는 예식’이 점차 사라지고, ‘머리에 물을 붓는 예식’을 주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 He Qi, 「The baptism of Jesus」

그러나 정교회 전례에서는 지금까지도 성삼위를 각각 부르면서 예비 신자를 물에 잠기게 했다가 나오게 하는 침례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교회에 가보신 분은 제단 앞에 세례대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례전통을 유지하는 정교회는 제단 옆에 십자가 형태로 바닥을 깊이 파고, 십자가 발치에서 계단으로 내려와 십자가 중앙에서 침례를 행한 후, 십자가 위로 걸어 올라감으로써 침례 예식을 마칩니다.

‘잠기는 예식’으로서의 세례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태어남’을 강조한다면, ‘물을 붓는 예식’으로서의 세례는 ‘죄와 허물을 씻어내는 정화’의 의미를 강조한 예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례 예식의 형식이 어떻게 되었든,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죄와 허물을 씻고 죄의 사함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성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을 씻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로 기억하고,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답게 살 것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 2 >

그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사 42,1).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사람을 네 편의 ‘종의 노래들’(사 42,1-4,5-9; 49,1-6,7-13; 50,4-9,10; 52,13-53,12)을 통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뭇 민족에게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인데, 굳이 소리를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사 42,2-3).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선행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는 사람, 자기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여기는 사람은 대게 목소리가 높고, 소리치는 법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의 종으로 삼으신 사람(사 49,5), 땅 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주님께서 뭇 민족의 빛으로 삼으신 사람은(사 49,6), 사람들이 침을 뱉고 모욕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고, 마음 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사 50,6-7).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종은 ‘실로 우리가 받아야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신 분,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상처를 받으시고,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의 병을 위해 매를 맞으신 분’(사 53,4-5)입니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신 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분’입니다(사 53,12).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셨습니다. 세 번째 예고 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마지막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막 10,37-28).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를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압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 10,44)고 말씀하신 것처럼, 종으로서 섬기는 길입니다.

이런 종이 하나님이 마음으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 1,11; 눅 3,22)는 음성이 들렸다고 했을 때, 이는 명백하게 제2 이사야 예언자의 종의 노래와 연결된 진술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그 임무를 맡기기 위해 선택한 자를 공개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과제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주는 것’(사 42,7)입니다. 예수님은 제2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씀을 받아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소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세례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회개와 죄 사함과 입교의 표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소명과 직결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3 >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죄 없으신 그리스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회개하실 필요가 없는 메시아가 회개와 사죄의 표징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면서 말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마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신 ‘모든 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일까요?

만일 ‘의’(Gerechtigkeit)가 ‘권선징악(勸善懲惡)’, ‘분배의 정의’, 혹은 ‘질서’를 의미하는 법적 개념이라면, 의를 이루는 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요한에게 회개와 죄 사함의 의미를 가지는 세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의’가 도덕적 특성으로 이해된다면, 메시아는 회개할 필요도, 용서받아야 할 죄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마 3,1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겸손함의 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요한의 세례 운동과 자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일종의 동의의 표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지만, 회개와 죄 사함을 필요로 하는 자기 백성과 자신을 전적으로 동일시하신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지만, 자신을 같은 인간조건 안에 두심으로써, 인간이 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요한1서 3,5)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회개할 필요가 없으시지만,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회개해야 할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이미 한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유일회적인 사건이고, 재세례는 불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회개와 죄 사함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의로운 존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인이고 회개해야 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행 10,34),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시고(행 10, 36),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2,13).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로서, 세계 교회의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보이는 현실은 비록 민족과 인종, 피부색, 신분과 계급, 지역과 파벌, 교단과 교파, 진보와 보수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엡 4,5).

그리고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골 2,12). 그래서 우리는 오늘 감사로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결코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우는 일에 나서는 것입니다(사 42, 4).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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