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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체(體)와 면(面)이 많다『다석 강의』 17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20.01.14 17:56

체면(體面)이란 흔히 인간의 품격을 말한다. 살아감에 있어서 지켜야 될 삶의 원칙을 갖고 살 때 그 사람의 체면이 선다고들 말한다.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허례 허식을 뜻하는 부정적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 다석은 체면을 체(體)와 면(面)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나름의 본뜻을 깨우쳐주고 있다. 『다석 일지』 1956년도 9월 17일자 한글 시와 동년 11월 6일, 12월 10일, 12월 14일에 썼던 한시(漢詩) 세편을 갖고 ‘체면’이란 말을 풀어냈다.

한글 시와 한시 내용이 중첩되어 글맛을 깊게 한다. 17강에서는 주로 한시 풀이가 핵심 내용이 되었다. 한글 시 “금보고 긋 못 찍을까(線보고 占 못 占ᄒᆞ리)”를 강의 할 시, 당시 이를 기록하던 속기사가 늦게 오는 바람에 이 부분을 기록해 두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석 강의』 17강에 기록된 한글시를 먼저 소개하고 필자 나름의 설명을 붙이는 것으로 본고를 시작하겠다.

< 1 >

“넷사람은 거북꺼플 불에 태워 금을 내봣다더니, 이제 나는 나이에 태운 얼골에 얼기설기 금이 뚜렷ᄒᆞ다, 이 금새 뚜렷히 보고 모를 줄이 잇스랴”. 말한대로 이 시의 제목은 “금보고 긋 못 찍을까”이다. 선을 보고서 점을 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를 물은 것이다. 옛 사람들은 거북이 등짝을 불로 태워서 생겨난 금(線)을 보고서 인간의 운명을 점쳤다고들 한다.

하지만 다석은 나이 먹어 생긴 자기 얼굴의 주름 선을 보며 자기 삶을 헤아리라 했다. 그에게 있어 얼굴은 얼의 골짜기였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듯이 얼굴선을 통해 다석은 지난 삶을 살필 수 있었다. 과거처럼 거북등짝을 태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얼굴에 생긴 무수한 금(線)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다석에겐 이것이 체면이었고 자신의 ‘긋’이었다.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이어진 첫 한시의 제목이 “윤리원점”(倫理原點)이다. 기하학(幾何學)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체면의 면(面)을 무수한 선으로 구성된 공간이라 여긴 탓에 기하학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우리들 얼굴도 사실은 세월의 무게를 실은 무수한 선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체면이 바로 우리들 얼굴일 것이다.

윤리원점이란 말 풀이를 17강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가늠하자면 이런 얼굴이 인간 삶(윤리)을 알리는 출발점이란 뜻이겠다. 5언 절귀(絶句)의 시로서 10연으로 구성되었으나 본 강의에서는 다섯 번째 연부터 소게되었다. 이 역시 속기사의 지각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강의 내용을 풀어냄에 있어 충분하다 판단했기에 생략된 부분을 보완치 않고 그대로 활자화시킨 듯하다. 필자 역시 17강에 적힌 내용에 근거해서 글을 전개시킬 것이다.

체체접생면(體體接生面), 면면대월계(面面對越界). 주지하듯 체와 체가 만나면 면이 생기고 면과 면이 마주하면 계(界)가 생겨난다. 이 때 체(體)는 몸 ‘체’로서 공간을 점유하는 일체를 말한다. 계(界)란 차원을 달리하는 공간이겠다. 그렇고 보면 세상에 체와 면이 아닌 것이 없다. 아마도 체보다는 면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체와 체가 만나는 모든 것이 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면 그 자체는 실상 없다고 봐도 좋겠다.

선선교원점(線線交原點), 점점상무예(占占相無例). 앞서 본대로 체와 체가 만나 면을 이룬다. 여기서 사람은 체라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나 선을 하나 긋는 것이 면이다. 세상은 이렇듯 수억만의 선들이 만나서 이뤄 진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이런 선들의 결정체란 말이다. 그때마다 그 선을 옳게 알았다면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점 그 자체는 우연히 어디에 찍혀 있었다.

따라서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점과 점이 만나 선이 되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이렇듯 점, 선 그리고 상(像) 혹은 체(體), 이들 간의 삼위일체가 예사롭지 않다. 끝은 끝이나 끝이 없고 나란 존재 역시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이 모여 체가 되니 모든 것이 체면일 뿐이다. 세상에 체면 아닌 것이 없다.

문복점부득(問卜占不得), 현현묵묵계(玄玄默默契).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은 내 몸뚱아리일 뿐 내가 아니다. 절대로서의 ‘긋’ 한 점 만큼은 소멸치 않는다. 이 긋이 바로 절대 하나로서 허공이다. 알고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아는 것이 허공으로서의 한 점인 것이다. 이 점을 어찌해도 찾을 수 없기에 부득(不得)이라 했다. 복점(問卜占)을 물으러 가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점(點), 한 긋이다.

유물체물래(有物體物來), 불가유물체(不可有物體). 만물이 바로 체이다. 만물을 만든 허공 역시 체를 갖고 있다. 단지 물건이 없을 뿐, 체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체인 허공을 불가유물체라 했다. 유교에서는 이런 허공을 참(진리)이라 한다. 없는 끝이 참이란 말이다. 마지막 끄트머리 점이 허공이고 참이다.

은현칭귀신(隱見稱鬼神), 성불종가체(聖佛從可體諦). 이 ‘참’이 보이지 않는 것을 귀(鬼)라하고 보이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것도 이런 뜻이겠다. 한 끄트머리로서의 참은 어쩔 수가 없다. 예수는 이 끝을 명확히 인지한 사람이었다. 부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끝을 확신한 존재, 그가 예수이고 부처이다. 이런 존재를 우리가 예배하고 따를 뿐이다.

심심매실신(心心每失信), 자공점심예(玆供點心禮). 우리들 마음속에 모두 신을 잊었다.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이 모두 실신(失神)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생명의 감각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렇게 말이다. 이런 마음에 점(點)을 찍는 것이 바로 점심(點心). 마음에 점을 찍어 마음을 살리고 신(神)을 불러오는 예(禮)가 바로 점심이란 말이다.

일월등비광(日月燈非光), 필요적광채(必要寂光體). 하늘에 걸린 해와 달은 참 빛이 아니다. 이런 거짓의 빛이 아니라 꼭 필요한 참의 빛, 영성의 빛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이렇듯 참 빛을 불교에서는 적광(寂光)이라 했다. 세상에는 결코 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참을 찾는 존재일 뿐이다. 누구도 이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구도자만 있을 뿐이다. 세상의 것을 ‘참’이라 인식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해와 달조차 비광(非光)인 탓이다. 마음속에 한 끝(긋)을 품고 살아가는 중에 적광체가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 2 >

다음으로 ‘자성’(自性)이란 두 번째 한시를 보겠다. 다석은 자성(自性)에 시종(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란 부제를 붙였다. 저녁이 먼저이고 새벽이 나중이란 뜻이다. 『주역』에서 체면을 종시라 여겼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한 끝을 알아야 새로운 시간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자성이 중요한 것이다.

무망시말점(无望始末點). 나의 근원(비롯)은 무모이다. 그로부터 나왔으니 그가 나의 시작(始)인 것이 틀림없다. 시작은 출생 전 하느님이 저녁을 마치고 열어 놓은 현재(現在)이다. 그렇기에 부모를 향해 자신을 왜 낳았냐고 묻는 일은 허망(무망)한 질문이다. 다석은 이런 덧없는 물음을 ‘무망시말점’이라 했다.

일원신명선(一元申明線). 여기서 일원(一元), 혹은 원일(元一)은 목숨을 뜻하는 것으로 한 점을 찍고 그 위에 자신이 서있다는 말이다. 점 위에 자신이 서 있기에 자신이 선(線)이 된다. 이 선을 일컬어 신명선(申明線)이라 했다. 하늘 주신 목숨을 영원히 이어가라는 생명선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원방면지(二元方面地). 이원(二元)이란 원일의 절대와 견줘 상대세계를 말한다. 일원의 생명선이 상대세계에 이르러 방면지(方面地)가 된다는 뜻이다. 면(面)을 갖고서 자기 삶을 이렇게 저렇게 확장시키는 삶을 적시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람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체(體)를 요구하는 탓이다.

삼원입체현(三元立立體賢). 여기서 어질 현(賢)은 똑똑하다의 뜻을 지녔다. 똑똑하게 서란 말이다. 사람이 이제 땅에서 일어섰다. 면이 아니라 체가 된 것이다. 하느님이 아담, 곧 인간을 찾은 것은 바로 이런 입체로서의 인간이다. 땅에 안주하지 않고 그를 딛고서 우뚝 서야 할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이 찾는 인간이다. 서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눕지 말고 서서 사는 존재(슨ᄉᆞᆫ)가 되라 했다. 이런 생각이 있을 때 인간은 땅의 사람에서 자유할 수 있다. 체면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렇게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일패도지물(一敗途地物), 곧 땅에 쓰려져 땅과 하나가 되어 뒤죽박죽 살게 된다. 한마디로 욕망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백승유혼천(百勝遊魂天). 이것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듯 인간 혼(魂)이 노닌다는 뜻이다. 수십억 광년의 걸릴 만큼 넓은 세계가 우리들 소유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만큼 인간의 자유 함을 말했던 것이다. 광활한 자유혼을 소유한 자가 바로 인간이다. ‘세상을 이겼다’고 말한 예수가 바로 이 경지의 사람이겠다. 그래서 그는 ‘나를 따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유교가 말한 존심정명성(存心正明誠)도 이 경지라 할 것이다. 참되고 밝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이 땅에서 할 일이다.

무집부자연(無集不自然). 어떤 물건도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절로 산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然)은 불탈 연(燃)자의 의미를 지녔다. 자신을 거듭 태워서 세상을 이기는 것만이 진리이다. 진리, 참되고 바른 정신을 갖고 세상을 이기는 일로 우리들 체면이 세워져야한다.

< 3 >

마지막 한시 “면자사”(面子辭)를 보겠다. 세상의 체면을 위해 사는 일은 헛된 것이다. 그런 체면을 위하다보니 거짓이 횡횡한다. 자기 얼굴 내세우고자 거짓말을 쉼 없이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엄당대고실태원(奄當大故失太元).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元), 근원적인 하나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둘의 세계에 빠져든다. 상대세계인 땅(대지)을 만나 하나이신 아버지를 자꾸 잊게 되는 것이다. 본래 하나인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인감 삶의 본질이다.

홀타인간가면리(忽墮人間假面裏). 하나로부터 우리가 벗어난 것이지 하나가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서구신학이 하느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이점에서 잘못되었다. 인간이 사는 동안 껍데기 체면만 찾아 구했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만이 체면을 세우는 일이 된다.

용납부득면상마(容納部得面相摩). 이처럼 하나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나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그래서 용납부득이라 했다. 여하튼 그에게로 가지 못하기에 수없이 얼굴, 즉 면(面)을 꾸미고 가꾸고 치장하는 일로 분주할 뿐이다. 그래서 면상마(面相摩)가 되는 것이다. 얼굴만 꾸미면 마(摩)가 찾아온다는 말이겠다. 얼굴에 덧칠을 거듭하기에 얼굴이 두꺼워져 철면피의 삶을 살게 되는 탓이다.

면상배회기다시(面相俳徊機多時). 얼굴 치장을 위해 밤낮의 시간을 허비하며 반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가면을 쓰고 인생을 사는 삶이 거듭 반복되니, 이것이 인생이고 우리들 역사인 것인데, 이 모두는 하나를 잊었기에 비롯한 일들이다.

여식췌행부정재(餘食贅行不淨財).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먹다 남은 밥찌꺼기(餘食)와 같은 삶이다. 그렇기에 먹는 것을 위해 사는 일을 그칠 일이다. 먹어서 해되는 것을 마구 몸속에 집어 넣다보면 그것들이 부정하게 작동한다. 온갖 부정축재로 사회가 병드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다석은 일용할 양식(먹거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살이 자체를 악이라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세상을 모든 것으로 알고 온갖 먹거리를 탐하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대접향응과객지(大楪響應過客止). 사람을 대접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것도 결국은 체면을 위한 것들이다. 지나가는 손님이 잠시 앉았다 가는 자리일 뿐 그것에 목맬 이유가 전혀 없다. 자신들 체면을 위해 향응제공하고 접대하는 일에 분주한 삶을 벗겨내야 할 것이다.

설마유면소위작(舌摩惟面所謂嚼). 미각에 취해 먹는 것에 열중하는 삶을 지적하는 말이다. 여기서 어려운 한자 작(嚼)은 거저 씹어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결국은 섬유질 껍데기에 불과한 그것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즉 맛의 유혹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항찰재자이위시(肛擦滓子以爲屎). 배고픔에 음식을 자꾸 뱃속에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먹으니 밑구멍에서 많은 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지나친 과식으로 배변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긴 하다. 맛을 추구하는 혀와 우리들 꽁무니가 이렇듯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라고 했다.

자별정교정심외(自別情交正心外). 사람들은 다른 성(性)을 지닌 사람들과 깊은 정을 통하며 산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죽과 거죽을 문지르는 일일 뿐이다. 껍질과 껍질의 만남이란 것이다. 다석의 때처럼 지금도 속을 잃은 껍질간의 만남 탓에 불행이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자신들 성행위조차 인터넷에 유포시키는 시대가 되었으니 다석의 말이 지나치지 않는다. 다석은 종종 제자들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을 위해 살라고 충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결혼 자체, 남녀 간의 사랑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유면절칠정시(末由面折七政施). 임금을 공경하는 것은 그 앞에서 ‘예(禮)’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말 , 바른 말을 그 앞에서도 하는 것이 그를 공경하는 방식이다. 친구를 존중하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그들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 잘못을 사랑으로 지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공경이다. 하지만 자신들 체면을 지키고자 이런 만남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달콤한 말로 이들 면전에서 자기 면을 세울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 앞에서 마음(氣)에서 나오는 자신의 칠정(七情),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을 떠나서 이야기해야 옳다. 하지만 자기 면을 세우는 면접만이 요즘 대세이니 언제 인간이 바로 되겠는가?

면종언이화원여(面從言而和怨餘). 이런 만남은 아무리 많이 해도 결국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낯(면)만 보는 세상, 곧 면종(面從)하는 세상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 낮을 좆는 사람들은 면전에서 결코 바른 말을 할 수 없는 탓이다. 면전서 할 말 못하고 뒷말만 무성히 남기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해할 해(害)자가 혀(舌)가 왕성하다는 뜻인 것을 기억할 일이다.

복유참내복명시(伏惟參內復命是). 뒷말이 왕성한 세상일수록 면전에서 그윽한 좋은 말들만이 넘쳐난다. 한마디로 체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먹고, 입고, 어딜 가도 모두가 체면 문화를 벗지 못한다. 이런 중에 입신출세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광명이겠는가? 자기를 속이는 일일 뿐이다.

다석은 여기서 다시 팔괘의 의미를 논한다. 주지하듯 팔괘는 2의 3승(乘), 곧 2를 세 번 곱해서 나온 숫자이다. 앞서 우리는 일원(一元)을 신명체(申明體)라 했고 이원(二元)을 잠시 앉아 쉬는 상대계(面)라 했던 바, 이제 팔괘는 입방체를 적시한다. 땅에서 솟구쳐 서야한다는 것이다. 면을 중시하는 삶을 버리라는 것이다. 땅에서 위로 솟구치면 체가 되는 까닭이다. 이 경우 팔입방(八立方)이 생겨난다.

하지만 여기서 일원의 세계에 속하는 일정방면(一正方面), 하나의 바른 방면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 방향을 따라 살면 지금껏 중시했던 체면을 버릴 수가 있다. 체면을 없애는 것이 세상이 구원받는 길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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