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그것이 가능한가정의(Das Recht) (1)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20.01.15 17:56

인류의 세계에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도 진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정의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장 38-42절)

문: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너무 어려운 요구가 아닌가? 전혀 정의가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또 모든 부탁이나 요구를 다 들어준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공갈배들이 득세하지 않겠는가?

▲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동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 ©Getty Image

답: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중요하다. 이 물음은 산상설교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가 산상설교대로 살 수 있을런지 아니면 산상설교는 하나의 도덕적 이상향에 불과한 것인지 하는 다른 물음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은 산상설교가 실행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갖게 되고 그것을 전부, 혹은 일부 부정하게 된다. 그 까닭은 예수의 요구 수준이 너무 높이 올려져 있어서 실제로는 도덕적인 이상향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몇 가지 요구, 즉 눈을 뽑으라든가, 팔을 자르라든가, 원수를 사랑하고 근심하지 말라는 요구, 재판을 걸지 말고 특히 저항하지 말라는 것은 요구 수준이 하늘에 닿는 산봉우리처럼 너무 높아서 대중들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고 단지 몇몇 도덕적 등반가들이나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것은 어떤 엘리트 계층이나, 사람들의 표현대로 “완성”의 극치를 이루고자 하는 성 프란체스코의 참된 제자들 같은 아마 특정한 수사들에게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의 요구는 그의 제자들만이 그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단지 제자들만을 염두에 둔 것이긴 하지만, 부름 받고 있기는 모든 사람이 매한가지이다. 예수의 요구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가야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예수의 요구는 올라가지 못할 정상이 아니요, 단지 열려있는 하나의 높이일 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덕적 귀족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된 민주정치가 그렇듯 본래 귀족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는 도덕적 민주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 하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요구의 수준이 저하되지 않을까? 예수의 요구는 그 참된 높이를 상실하지 않을까? 그것은 너무 쉬워지지 않을까?

답: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단지 가상적인 높이만 상상할 뿐이며 그 가상적인 높이가 사라져야 그것은 현실이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높이가 된다. 그런 높이! 물론 여기에도 정상은 있다. 그러나 이 정상은 모든 사람이 오를 수 있고 무한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다. 스포츠였던 것이 과업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요구를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요구를 가볍게 다루는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요, 그 반대로 그런 이해는 스포츠에 힘쓰던 것을 의무완수에 힘쓰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 율법도 그렇지 않은가?

답: 예수의 이런 요구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이다. 그것은 강제성(Müssen)을 띤 것이 아니라 일종의 허가(Dürfen)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무이다.

문: 예수의 요구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으로 인해 그것은 시민도 덕의 수준으로 저하되는 것이 아닌가?

답: 가끔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예수의 요구의 수준이 저하된다. 예수의 요구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실제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이 되도록 예수의 요구를 아주 낮게 낮추는 반작용이 생긴다. 일단의 사람들이 예수의 요구에 수도복을 입히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요구에 자기들이 교회 갈 때 입는 나들이옷을 입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복이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평상복이다. 예수의 요구는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한 삶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