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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하늘이 열리고 영이 내려와(마태복음 3:13~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0.01.16 17:22

(천안살림)교회창립 20주년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 천년 첫 주일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기에 사실은 지난 주일이 20주년 기념주일이지만, 신년주일과 구별해 한 주간 미뤄 오늘 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20년, 첫 해 돌을 맞이했던 아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성년이 된 교회를 실감합니다. 지난 연말에도 잠깐 목회자로서 교회의 지나온 길을 살짝 회상했지만, 오늘 그 소회가 더욱더 각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새로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저를 아끼는 지인들은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교회 하나 더하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려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작하였고, 반대했던 분들은 거꾸로 강력한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 천년 첫 주일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출사표를 내는 심정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손님들을 모신 창립축하예배에서 담임목사가 설교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 풍토에서 제가 직접 말씀을 맡았습니다. 그야말로 출사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사도행전 1:8; 2: 43~47을 본문 삼아 “하나님의 백성, 희망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의 요체가 <우리는 이런 교회를 지향합니다>로 집약되었고,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이정표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늘은 선택한 말씀이 아니라 성서일과에 따라 주어진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20년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 시시때때로 주어진 은혜 덕분에 이렇게 성년으로서 건강한 교회가 된 것을 새기는 의미가 있을까요? 주어진 대로 말씀의 뜻을 나누고, 그 말씀이 20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과 하나님 나라를 성취한 예수님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밑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우선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문제로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에 관한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문제로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세례가 필요했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지향점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악의 세계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도래를 선포한 종말론적 예언자였습니다. 이 예언자는 요단강 동편의 광야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독자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언행에서 그 흔적이 나타날 뿐 아니라, 예수는 실제로 여러 대목에서 요한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마태 11:7~9; 누가 7:24~26; 마태 11:11; 누가 7:28).

그러나 이후 예수의 행보는 요한과 달라집니다. 요한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렸다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계는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린다기보다, 거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여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잔치에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고, 예수께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는 곧바로 행동방식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은 엄격한 금욕의 윤리를 지킨 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민중들과 동화된 생활양식을 취했습니다. 예수는 금식을 하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잔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했다면 예수는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더불어 행동하셨습니다(마태 11:18~19; 누가 7:33~34). 그 차이는, 민중을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게 하느냐, 민중 스스로 주체화하게 하느냐 하는 분기점이 됩니다. 요한의 길이 전자의 길이었다면, 예수님의 길은 후자의 길이었습니다.

훗날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요한의 지향점을 상당 부분 공유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도 남는 신학적인 문제로, 과연 죄 없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저 역사적 사실로 간주해버리면 간단할지 모르나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에게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이 이야기를 전한 시점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흠 없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죄 사함을 뜻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기록하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그 정황은 요한과 예수의 대화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감히 세례를 베풀 수 있겠느냐는 요한의 말에 허락한다는 예수의 답변이 그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매우 비중 있게 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철저하게 민중들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한 예수의 삶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상 제기된 두 가지 문제는 예수님의 공적 생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본문말씀의 맨 마지막 대목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도대체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요? 영을 따르는 삶, 영 안에 사는 삶, 영적인 삶, 영성이 깊은 삶... 한마디로 딱 떨어지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영적인 차원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너무 남용되고 오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생각하여 별로 말하지 않지만, 그 근본적 차원은 늘 유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를 지향합니다>라는 교회의 지표 첫머리에 ‘영적인 공동체’가 등장하는 것은 그냥 보기 좋아 보이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됨의 근본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가다듬어 개정한(2019.12.1. 둘을 하나로 통합, 하나 신설, 문장 가다듬음) 교회의 지표를 환기해볼까요?

• 영적 공동체: 교회는 깊은 영적 체험을 추구함과 아울러 진정한 심신의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 선교하는 교회: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의로운 하나님의 일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생명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모두가 존중받는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출신이나 성별, 또는 성적 지향 등을 구실로 하여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환대하는 공동체를 이룰 뿐 아니라 동시에 세상에서도 이를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 연대하는 교회: 우리는 다른 교회와 지역사회, 그리고 여러 선한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겸손하고 열린 교회를 지향합니다.
• 민주적인 교회: 교회는 모든 구성원이 책임감을 갖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불평등한 차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 공부하는 교회: 참된 신앙은 끊임없는 진리탐구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또한 그 말씀이 구현되어야 할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 친밀한 공동체: 우리는 대교회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온 교우들이 서로 가깝게 느끼고 알 수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200명이 넘어서면 용기있게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자세로 나아갑니다.
• 희망이 있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이 땅의 선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 지표(영적 공동체 / 선교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그 다음 두 가지 지표(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 연대하는 교회)는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현존방식을, 그 다음 세 가지 지표(민주적인 교회 / 공부하는 교회 / 친밀한 공동체)는 교회의 내적 구성원리를, 그리고 마지막 지표(희망이 있는 교회)는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결론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20년 전부터 받아들여 온 지표를 이번에 가다듬어 다시 받아들인 것은, 그 뜻을 계승하되 이 시대 안에서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첫머리에 내세워진 ‘영적인 공동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초점에 주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증언하고 있거니와, 바로 이어지는 광야의 시험 장면을 전하는 본문에도 그 첫머리에 예수께서 성령께서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증언을 보면 성령은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항상 함께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의 현존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끊임없이 문제되어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긴 주석적 설명은 줄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영적 차원은 인간의 물질적ㆍ육체적 삶과 무관하지 않되, 당장 눈에 보이는 그 현상을 넘어서는 어떤 차원을 말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성령의 현존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있지만 명백히 우리 삶에 방향을 부여해 주고 이끌어주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과 체현이 구체적인 인간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 말합니다. 성령에 상응하는 인간의 품성으로서 영성입니다. 이 때 영성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있지만 명백히 우리 삶에 방향을 부여해 주고 영향을 끼치는 그 차원을 인식하고 느끼는 인간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것을 성서는 성령의 감화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성서가 끊임없이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 차원을 부정할 때, 그리고 그 차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인간의 삶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울 서신에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대목은 한결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났던 상황이 해소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경우입니다.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성령강림절 사건 자체가 그런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저마다 영적 세계에 속해 있다는 자만으로 불화를 겪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이야말로 답이라고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입니다.

흔히 성령과 영성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요 내면적 차원의 문제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성서의 증언은 일관되게 성령과 영성의 문제를 관계적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으로서 영성은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개별적 존재에게 나타나는 현상,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상호 연관되어 있는 근원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은 깊은 영성에 도달한 것을 뜻하며, 그 깊은 영성에 도달할 때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삶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것이 영성의 깊은 차원, 근본적인 차원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영적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신비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더 깊이 소통하되, 단지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고 단지 경험한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차원을 일깨워 모두가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깊이에 도달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혜안이라고 할까요? 영적 깊이에 이르고자 하는 이에게 불의가 용인될 수 없고, 차별이 용납될 수 없고, 일방적 지배와 자기만의 아집이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겸손한 태도로 임하지만, 정말로 깊이 있는 삶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그리고 마땅히 모든 생명이 그 삶을 온전히 누리는 길을 이루기 위해 나선 그리스도인이요, 교회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그냥 자족적인 신앙생활 해나가는 교회 하나 더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에게 기쁨이 되고, 그런 만큼 세상에 그 기쁨을 펼쳐나감으로써 희망을 주는 교회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20주년을 맞는 각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신실한 믿음을 다시 다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대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지난 20년간 뜻밖의 선물로 우리가 힘을 얻고 지금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처럼, 또 새로운 일들이 또 기쁜 소식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 신실한 믿음으로 큰 은혜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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