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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폭력으로부터 지켜져야 한다정의(Das Recht) (2)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20.01.22 18:11

문: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의 요구는 무엇을 뜻하는가?

답: 가끔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예수의 요구의 수준이 저하된다. 예수의 요구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실제적으로 실행가능한 것이 되도록 예수의 요구를 아주 낮게 낮추는 반작용이 생긴다. 일단의 사람들이 예수의 요구에 수도복을 입히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요구에 자기들이 교회 갈 때 입는 나들이 옷을 입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복이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평상복이다. 예수의 요구는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한 삶이다.

문: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의 요구는 무엇을 뜻하는가?

답: 예수는 정의를 요구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소위 보복법(jus talionis)이라는 정의의 형태를 의미한다. 즉 법을 어긴 사람에게 힘으로 똑같은 것을, 혹은 가능한 한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한 것과 같은 것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때려 눈알이 나오게 했다면, 피해자도 가해자의 눈을 때려 눈알이 나오게 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때려 부러뜨린 경우라면 때린 자의 이도 부러뜨려야 한다.

문: 그렇다면 그것은 복수일텐데?

답: 그렇다. 그러나 율법으로 승격된 복수이다. 따라서 이런 복수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자의나 폭력에 의한 복수가 아니다.

문: 그렇다면 그것은 정의인가?

답: 정의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의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에서 나온 귀결이다. 정의는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나 폭력으로부터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어떤 것, 즉 생명과 타인의 인격을 지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의의 공식이 되었다. 이것은 사적 소유도 수호한다. 정의는 “도덕질하지 말라”는 것으로부터도 하나의 결론을 끌어낸다. 정의는 단순한 본성과 맞서 정신을 대표한다. 단순한 본성은 폭력에는 폭력으로, 심지어 보다 심각한 폭력으로 답한다. 그것은 뺨을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답하는 것이다. 정의는 인간 본성의 이런 거친 보복충동을 법적 처벌과 위협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폭력은 인간을 사물로 만들고 정의는 인간을 인격으로 만든다. 어떤 형식이든지 진정한 정의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거룩한 정의를 반영한다. 그것은 외경심이며 모든 도덕의 근본을 이루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정의는 인간을 지키고 신성하게 한다.

문: 그러나 어떻게 예수께서는 그런 정의를 폐지하게 되었는가?

답: 예수께서는 정의를 완전히 이루기 위해서 정의를 폐지하고, 또 그 반대로 정의를 폐지하기 위해서 정의를 다 이루신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의는 충분한가? 정의가 불의로 될 때는 없는가? 정의라는 것도 일종의 허구가 아닐까? 정의 속에는 폭력의 요소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분쟁과 전쟁을 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정의가 분노, 원한, 증오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정의는 사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삶 속에서도 모든 것을 야기할 수 있지 않는가? 정의가 정의일 수 있기 위해서 바로 정의보다 더 고차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바로 이 보다 고차적인 것이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이고, 관대하게 더 동행하는 것이며, 거저 주고 꾸어주는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한다. 예수께서 더 동행해 주라고 할 때 말이 나온 김에 말해두지만, 그것은 자기의 마소를 가지고 로마의 역참까지 가야만 하는 그런 강제노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런 부역은 당연히 전혀 유쾌한 일이 못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께서 좋아하시는 역설적인 화술이다.

예수는 우리가 우리의 정의를 너무 완고하게 주장하지 말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다른 사람을 옳다고 인정하고 심지어 인정해 주는 것을 넘어서 은혜를 베풀라고 한다.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인정한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도 옳게 여기신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물질적인 것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서도 반대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에게 형제간에 의, 즉 사랑을 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자녀요 동시에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 정의도 역시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본질서의 하나인 하나님의 공산주의요, 그리스도의 공산주의의 한 형태이다. 정신적인 세계에서도 절대적인 개인 소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도 공동소유이다. 정의는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가난의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여기서 너의 소유를 강경하게 주장하려고 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독선(Rechthaberei)을 경계하라. 샤일록(Shylock)처럼 그대의 외모만을 주장하지 마라. 꼭 복수하고 말겠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그대가 복수를 한다면 그대를 화를 입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게 될 것이며 그대가 하나도 남김없이 죄값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독선에 대한 심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관용으로 독선을 변화시켜라. 그대는 원래 항상 그릇된 점이 있다는 것에 마음을 쓰라.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을 형제들에게도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대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그대도 형제를 용서하라. 용서란 주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에게 입은 은혜를 형제에게 베풀라. 그것이 그에게는 죄의 용서로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말씀의 참뜻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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