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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여행(2/2)”블라디미르 쿠쉬, 「은유의 여행 Metaphorical Journey」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1.24 17:19

삶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입고 먹고 쓰고 행하는 모든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어딘가를 향해, 어떤 길을 누구와 어떻게 걷든지, 그 모두가 의미를 담고 있는 은유이자 상징이다. 그렇다, 삶은 은유로 가득한 여행이다. 다만 은유를 이해하며 그 안에 자기 마음을 담아 걷느냐, 아니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눈먼 걸음이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타자가 부여한 의미에 갇혀 끌려가느냐, 아니면 자신만의 은유로 시를 써나가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블라디미르 쿠쉬의 「은유의 여행」도 그 자체로 의미의 여행을 보여준다. 쿠쉬가 담고 싶었던 이야기, 드러내고 싶은 의미가 왜 없겠는가. 열 개 이상의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나간 관점이 있으리라. 그러나 같은 길을 가도 저마다 다른 발자국을 내지 않던가. 같은 길을 걸어도 누군가는 무겁게 발을 끈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는 춤추듯 흥겨운 흔적을 남긴다. 쿠쉬가 그려놓은 은유의 여행도,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쿠쉬가 열어놓은 은유의 여정을 따라 마음의 길을 걷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여정을 펼쳐간다.

작품 앞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하나의 정답에 갇힐 수 없다. 작가의 의도를 밝히거나 작품성을 설명하는 해설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실은 그 작품이 비춰준 자기 이야기고, 그 작품 앞에서 벗과 함께 나눈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게 떠난 은유의 여행이 이제 중반을 넘어섰다. 어디쯤 가고 있나 뒤를 돌아본다. 어디쯤 왔는지 알아야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으니, 다시 그림 전체를 살펴본다.

▲ Vladimir Kush, 「은유의 여행 Metaphorical Journey」 37x94 inches ⓒU.H.M.Gallery 단해기념관

전체 전경을 살펴보면, 왼편 육지의 풍경과 오른쪽 바다의 풍경이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어둡게 내려앉은 육지의

풍경을 살펴본다. 큰 물고기를 잡았어도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는 사람, 자신을 지켜줄 단단한 껍질에 짓눌려 살아가는 달팽이 인생, 껍질뿐이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견디는 두 사람의 포옹, 노동자의 블루셔츠는 바람에 날려 바다로 가고 싶지만 건물의 묶어 버렸고, 사람들은 바다 쪽을 바라보며 동경할 수밖에 없다.

바다의 풍경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나비의 날개를 단 배는 자유롭게 항해를 떠난다. 바람에 묶이지 않는다. 바람이 없어도, 맞바람이 쳐도 가고픈 곳으로 나아간다. 하늘은 비를 통해 땅을 만나고, 땅에서는 천지합일의 기쁨에 젖어 사람들이 춤춘다.

앞선 글 『은유의 여행 ⑴』은 육지와 바다의 대비를 살펴본 후에, 그 사이에 보이는 흐름을 이야기하고 끝냈었다.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이 구름을 통해 길을 보여준다(노란 화살표). 그 길에는 세 가지 관문이 있었다. 나무와 사자와 양이다(세 개의 원).

▲ Vladimir Kush, 「은유의 여행」 부분

영혼의 날개를 단 배의 항해, 그 날개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비의 비행을 따라 거슬러 가보면, 육지의 끝에 선 나무가 보인다. 나비의 날개는 그 나무의 나뭇잎이었다. 나무를 가만히 살펴보면, 나무가 손으로 보인다. 육지의 끝에서 나무가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자신의 몸을 떼어주는 나무의 손길이 영혼의 날개를 달아준다. 이 작품을 아무 설명 없이 본 어머니 한 분이 육지는 자기와 남편의 삶 같다고 했다. 그리고 자식은 저 바다의 배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 어머니의 표현이 저 나무의 마음이 아닐까? 고통스러운 삶의 벼랑 끝에서 자기 몸을 떼어준다. 누군가 영혼의 날개를 달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Vladimir Kush, 「I saved my soul」 20 x 23 inch

바로 옆에는 사자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양이 뛰놀고 있다. 이 장면은 쿠쉬의 작품 「I Saved My Soul」을 넣은 것이다. 양과 사자는 강자와 약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억누르는 자와 억눌리는 자, 갑과 을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사자와 양의 관계는 역전된다. 사자는 양을 풀어주고 우러러 본다. 하나님의 어린 양, 속죄의 양을 올려다보는 사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양으로 인해 사자의 영혼은 구원 받는다.

대비되는 두 풍경을 이어주는 길, 나무와 사자와 양은 바로 그 길이다. 해변에 펼쳐진, 고통에 짓눌린 삶이 자유로운 항해와 합일로 나아가는 길이다. 무력감과 묶임과 짓눌림의 삶으로부터 영혼의 자유와 합일과 아름다움으로 건너가는 통로다. 나무는 생의 벼랑 끝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손길로 영혼의 날개를 선물하고, 사자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 받는다. 더 이상 약자를 억누르지 않고 풀어준다. 약자로 인해 구원에 이른다. 고통의 삶에서 자유와 합일의 삶으로 가는 길은 이 세 관문을 통해 열린다.

다시 작품 전체를 바라본다. 무엇이 보이는가? 그저 시원스러운 바다 풍경으로 보이던 「은유의 여행」이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자유와 합일의 삶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보인다. 어떻게 해야 영혼의 날갯짓을 따라 하나 되어 춤추는 삶으로 나아가는지 보여주는 지도다.

그러나 만일 이 작품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순진한 윤리교과서 정도로 보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착하게 살면 잘 된다 정도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맞다. 자신을 내어주고 약자를 강자가 우러른다면, 자유와 합일의 삶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던가? 이 작품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아직 반전이 남아있다.

오른쪽 맨 밑에 묘한 표현이 반전의 힌트다. 사진에는 정확히 담기지 않았지만, 파도가 보자기처럼 들춰졌다. 그 아래는 나무로 된 무대 같은 것이 보이고 나비 한 마리가 있다. 파도가 파도가 아니다. 바다가 그저 한 장의 보자기다. 육지에서부터 바다에 이르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한 장의 보자기라고 슬쩍 밝혀 놓았다. 누군가 이 보자기 끝을 잡아당긴다면 어떻게 될까? 육지에 있든, 바다 어디에 있든 다 무너진다. 영혼의 날개를 달고 자유를 항해해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를 이루며 춤을 춰도 다 넘어지고 만다.

오른쪽 한 구석의 이 장면은 삶의 부조리, 불안, 허무를 슬쩍 들춰 놓았다. 삶이 그렇지 않던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던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 무엇이든 한 순간에 꿈처럼 사라질 수 있다. 나무와 사자와 양, 자기 몸을 떼어주고, 양을 우러러 영혼이 구원받고, 자유를 항해하며 하나를 이루는 여정이라 해도 허무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이라고 예외일까? 주님의 사랑을 믿고 그 충만함을 맛보아 알아도, 어느 순간 갑자기 무력감과 허무함이 덮쳐올 수 있다.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영혼의 어두운 밤도 있지 않던가.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린 영성가도 적지 않다.

들춰진 보자기를 가만히 바라보면, 성경의 전도서가 떠오른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래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도서 1:2,9,14)

어릴 적 전도서를 보면서 의아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성경에 왜 허무로 가득 한 전도서가 있을까?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전도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허무의 파도에 쓰러지고 공허의 밑바닥을 밟아보니 전도서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또한 전도서를 선포하던 맥락 속에서 허무의 의미와 가치가 분명해졌다.

전도서는 초막절(장막절)에 회당에서 읽어주던 말씀이다. 이 맥락이 전도서의 의미를 분명히 해준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고, 그 해 거둬들인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에 읽었다. 감사와 기쁨의 절기에 오히려 허무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날이라면 추수감사절예배를 드리러 오는데, 입구에서 안내하는 분이 전도서를 읽어주는 격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너무 잘 어울린다. 허무를 절절히 깨달을 때, 참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허무한지 절절히 깨달을 때,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 산속에서의 목회, 서울 어머니를 일 년에 몇 번이나 찾아뵈었는지. 전화 통화도 자주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말기암 선고를 받으셨다. 그러자 그렇게도 중요하고 급해만 보이던 일들이 일순간에 허무해졌다. 그러나 허무의 밑바닥에 가라앉자, 서서히 삶의 충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일 틈만 나면 전화해서 어머니와 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수다 떨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어떻게든 서울에 올라갔다. 어머니 손잡고 동네를 걷는 산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때 알았다. 거실 소파에 앉으신 어머니와 나누는 담소가 행복했다. 모이기만 하면 가족예배를 드렸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가족 예배가 그렇게 행복한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중요한 일들이 다 허무해진 순간, 오히려 잊고, 잃고 지낸 삶의 충만이 되살아났다. 허무를 처절하게 맛볼 때, 오히려 행복의 충만이 깨어났다.

장막절, 한 해 동안 애쓴 결과를 거둬들일 때, 늘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바라던 만큼 열매를 거둘 때가 얼마나 될까. 열매가, 성취에 붙들리면, 감사하기보다 실망하기 쉽다. 다른 이를 질투하기 쉽다. 그러나 그 열매조차 실은 헛되고 헛되다는 진실을 깨달을 때, 거둔 그대로와 거두지 못한 그대로를 감사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와 있지 않은 그대로를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전도서는 기쁨의 절기에 선포된 것이다.

쿠쉬의 「은유의 여행」도 오른쪽 맨 아래에서 들춰낸 허무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무와 사자와 양의 관문을 통과하다가 무너질 수 있다. 영혼의 날개를 단 항해 중에, 하늘과 땅이 하나 된 기쁨 중에도 다 허물어질 수 있다. 그렇다, 삶은 허무하고 부조리할 수 있다. 그러나 허무를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때, 오히려 충만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역설의 신비가 정반대쪽, 그러니까 작품의 왼쪽 맨 위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관람객에게 오른편에서 손바닥 만 한 여자의 얼굴을 찾아보라고 해도 한 참 걸린다. 허무를 통과해 만나는 충만도 그리 쉽게 찾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구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얼굴이 보인다. 구름이 긴 머릿결을 흩날리는 여인의 얼굴을 담고 있다. 구름은 허무한 인생의 대명사다. 구름 같이 허무한 인생! 그 구름에서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허무한 인생 전체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로 가득하다.

어머니 소천 이후 처음으로 맞는 봄이 무척 아파왔다. 변함없이 꽃은 피는데, 함께 걷던 꽃길을 어머니 없이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디를 봐도 어머니가 보였다. 어디에도 어머니가 계셨다. 구름이, 꽃이, 바위가, 길이… 모든 것이 어머니를 비춰줬다. 그 모든 허무가 어머니로 피어났다. 아무리 헛되고 헛된 인생이어도, 사랑한 한 영혼이 있다면, 너무나 사랑한 한 영혼이 있었다면, 비록 지금 곁에 없다 해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생의 허무 그대로 충만하다.

쿠쉬의 「은유의 여행」은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으로 돌아온다. 서양화는 무의식적으로 글씨를 쓰는 순서로 그리고 그 순서로 읽는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씨를 쓰듯, 그림도 그렇게 그리고 그렇게 읽는다. 그래서 서양화 전시는 시계방향으로 전시하고, 동양화 전시는 반시계방향이 적절하다. 「은유의 여행」도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바람이 분다. 고통에 짓눌린 삶에서 자유와 합일의 항해로 나아간다. 그 길을 보여준 은유의 여행이다. 그 끝에, 오른쪽 맨 밑에서 허무를 들춰냈다. 그리고는 다시 왼쪽 맨 위에서 구름의 여인을 보여준다. 구름의 허무가 사랑의 충만으로 보이는 눈뜸이다. 허무에서 충만을 보는 눈을 뜰 때, 허무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시 나무처럼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 처절한 허무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날개를 달고 파도를 타고 노닐 수 있다.

전도서에서 ‘헛되다’(헤벨)는 말은 ‘사라져 버릴 숨이나 바람’을 의미한다. 메시지 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번역한다. “연기다. 한낱 연기다! 모든 것이 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1:2) “나는 내가 이룬 모든 일, 모든 땀방울과 노고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연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기요, 허공에 침 뱉기였다.”(1:11) 숨과 바람으로 표현한 허무는 하나님의 숨결을 떠오르게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 새번역은 하나님의 영을 수면 위에 움직이는 ‘하나님의 바람’으로 번역한다. 하나님의 첫 모습은 바람이다. 흑암과 공허의 수면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꼴 지어 고정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허무한가보다. 바람을 붙잡을 수 없듯이 하나님도 고정된 틀에 가둘 수 없다. 이 바람이 빛이 있으라는 소리가 된다. 인간을 흙으로 빚고 호흡을 불어 넣어 생령이 된다. 이 호흡 역시 숨, 바람이 아닌가.

주역의 환괘(煥, 風水煥 )도 물 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이다. 문제 전체가 해결되는 괘상으로 “‘봄에 얼음이 녹듯’ 문제가 저절로 풀린다는 의미”이다. 수면 위에 바람이 불 때, 돛을 단 배가 앞으로 나아가듯, 문제가 풀린다는 뜻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순조로운 상괘가 하괘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바람이 물위를 다니는 것으로 이해”(이기동 『주역강설 하』 249,251)한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바로 환괘의 모습이 아닌가. 흑암과 공허의 문제를 봄눈 녹이듯 풀어내 창조의 꽃을 피우시는 수면 위의 바람이다.

헤벨, 숨과 바람의 허무는 하나님 안에서 흑암과 공허를 쓰다듬는 사랑의 손길이자 창조의 바람이고, 살리고 살리는 생명의 바람이다. 성령 역시 급하고 강한 바람,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 아니던가. 자기를 지키려는 집착에게 바람은 불안과 허무이다. 자기를 위해 쌓은 그 무엇도 무너뜨리는 허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에게 바람은 창조와 살림의 가능성이다. 바람은 파도를 헤치고 창조와 살림을 향해 나아가는 가능성이자 동력이다. 나비(영혼)의 날개를 단 배처럼 허무의 바람에 사랑의 날개를 펼치리라, 구름에서 사랑이 보인다면!

참고

하태혁 목사의 그림 이야기: 「은유의 여행」 https://youtu.be/EOl_Q64-Uqc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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