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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돌리다”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1.27 17:31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 (마태복음 1:17~25)

족보를, 가문을 중시하던 시절에는 혈통이 그 사람의 가치를 증거했습니다. 그 가문의 피를 타고난 것만으로 권위와 권력과 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 안에 들어가서 권위와 영광을 이어 받았습니까? 이방 여인들, 성 노동자, 시아버지를 속인 며느리, 남편을 죽인 왕과의 결혼… 오늘날의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기이한 족보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도 아닙니다. 만일 유전자검사로 친자확인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는 그 집안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생물학적 혈통은 메시야 탄생의 계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방인이 계보 안에 들어있는데다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순혈주의의 자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계보의 권위와 영광을 이었다기보다 그 반대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케 하신 마리아가 요셉의 아내가 됨으로써 이 족보가 메시야의 계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 계보의 의미가 구원의 역사로 탈바꿈합니다.

▲ Vladimir Kush, 「Infinity Trail」

요셉은 그 탈바꿈에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은 요셉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파혼하려 했지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20절)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단순히 천사의 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 배속의 아기가 누구인지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이 말씀을 들었고 그 뜻을 다른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리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아들였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1:37) 두려움과 놀라움에도 마리아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잉태되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처럼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24절) 십대였을 마리아와 요셉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역사는 드디어 움틉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었을 당시에는 불편했을지도 모를 계보입니다. 이방 여인을 통해 기이한 방식으로 이어진 족보, 그 계보가 구원 역사의 줄기로 드러났습니다. 이 계보를 음미할수록 이름 없는, 혹은 없인 여기기 쉬운 타자를 다시 발견합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없는 그대로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 많은 타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의미 없어 보이던 인생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에 주목합니다. 요셉의 믿음과 사랑, 요셉의 받아들임을 바라봅니다. 혈통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받아들임에서 움텄습니다. 한 사람의 받아들임에서 구원의 물꼬가 텄습니다. 민족을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길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인 사랑입니다. 조용히 감추고 거부할 일을 그 믿음은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 믿음이 기이한 족보의 물길을 구원의 바다로 돌립니다.

피하고 싶은 일이나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을 때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 일과 사람도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구원하고 살려내는 길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품으로 안는다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바다로 물길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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