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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어둠의 땅에 빛을 비추었지만(사 9:1-4; 고전 1:10-18; 마 4:12-23)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1.2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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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고, 상영 후 최장 15분간의 기록적인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 ‘가버나움’은 레바논 출신 여성 감독이자 배우인 나딘 라바키(1974- )의 작품입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빈민가, 길거리에서 캐스팅한 실제 난민들이 등장하여 촬영 중에 경찰에게 잡혀가기도 하여 화제가 된 영화입니다. 주인공인 12살 소년 ‘자인 알 하지’ 역을 맡은 ‘자인 알 라 피아’는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이고,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 역의 ‘하이타 아이잠’은 베이루트 거리에서 껌을 파는 소녀입니다. 몰래 낳은 아기를 숨어 기르면서 작은 놀이시설의 청소부로 일하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여성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실제 불법체류자입니다.

영화는 치아 상태로 12살 정도의 소년으로만 알려진, 출생기록도 없는 소년, 가난에 찌들어 한 입이라도 덜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어린 나이에 동네 건달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진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중독으로 죽자 건달을 칼로 찌른 죄로 5년 형을 받고 소년원에 수감된 ‘자인’이 법정에 나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인이 법정에 서기 전까지의 과거가 회상됩니다.

베이루트 거대한 빈민가, 폐타이어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 부모와 여섯 아이들이 몸을 뒤틀며 겨우 새우잠을 자는 방, 가짜 처방전으로 구한 약을 탄 주스를 팔고, 무거운 가스통을 배달하면서 연명하는 소년,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대마초를 피고 전쟁놀이를 하면서 온갖 범죄와 폭력에 노출된 어린이들, 지긋지긋한 가난, 국가도 부모도 지켜주지 않는 출생증명서도 없는 삶, 그러나 어린 자인은 자기를 막 대하는 어른들에게 맞서는 당돌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엄마 ‘수아드’는 10대 초반에 조혼으로 낳은 큰아들이 수감된 교도소에 환각성 약품을 밀반입하는 불법 행위에 자식들을 도구로 쓰고, 아빠 ‘셀림’은 ‘우리는 기생충이야’라고 독백하면서, 낮술에 취해 빈둥거리고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습니다. 엄마가 ‘자인’을 학교에 보내려고 남편을 설득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인’의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받아오는 음식과 옷가지 때문입니다.

▲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어린 여동생 ‘사하르’를 동네 건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부모에 반대한 자인, 여동생과 함께 도망가려고 하지만 여의치 않아 혼자 가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에티오피아 출신의 불법체류자 ‘라힐’이 몰래 낳아 기르는 아기 ‘요나스’를(실제 케냐 난민 부부의 딸) 돌보면서 함께 판잣집에서 삽니다. 작은 놀이시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라힐’은 아기 ‘요나스’를 화장실에 숨겨놓고 몰래 수유하면서, 가짜 체류증을 얻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에 잡혀, 불법체류자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배고파 울 ‘요나스’를 생각하면서 구치소 화장실에서 눈물 흘리며 젖을 짜서 버리는 ‘라힐’, 그러나 ‘라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요나스’를 솥에 넣어 끌고 다니는 ‘자인’은 구걸하여 ‘요나스’의 배고픔을 달랩니다.

그런데 ‘자인’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메이소운’이라는 소녀를 만납니다. 시리아 난민 가정의 아이로 시장에서 꽃이나 차를 파는 ‘메이소운’은 브로커에게 목돈을 주면 스웨덴이나 터키 같은 잘사는 나라로 입양될 수 있다고 ‘자인’에게 귀띔해 줍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병에 걸려야만 죽는대’라는 말에, ‘자인’은 희망을 가지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해외로 입양가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무언가 서류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브로커의 말에 집으로 돌아가 서류를 찾다가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중독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자인’, 여동생을 그렇게 만든 건달을 칼로 찔러 살인미수로 소년원에 오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소년원에서 아동학대 고발 뉴스를 들은 ‘자인’이, 감옥에서 전화로 부모를 고소하여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피고가 아니라, 원고로 법정에 나온 것이지요.

판사가 묻습니다.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자인’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합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 자식을 양육할 능력이 없는 어른은 아기를 갖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폭력, 모욕, 두들겨 맞기, 체인과 몽둥이와 벨트로 맞은 것입니다. 내가 들은 가장 친절한 말이라곤 “쓰레기들, 꺼져버려!”였습니다. 인생은 똥 더미예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난 이곳 지옥에서 살아요. … 난 자라서 좋은 사람, 존중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원했어요. 하지만 신은 우리가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어요. 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걸레가 되길 원했던 거예요. 지금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

영화를 보는 시종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빈민가, 온갖 범죄와 폭력, 사기와 노골적인 탐욕이 앞서는 어두운 세상의 한 편에는 아직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민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확신과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은 정작 칸 영화제에 올 수 없었습니다. 신분증이 없는 불법체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에 출연한 시리아 난민 12살의 소년 자인은 영화 덕분에 가족과 함께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2018년 8월 노르웨이에 정착했고, 생애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4년 넘게 이 영화를 준비한 나딘 라바키(1974- ) 감독은 영화 상영 후, ‘가버나움 재단’을 만들어 영화에 등장한 길거리 어린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 충격을 주고, 경고하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를 찍어요. 파리나 런던의 카페에 앉아 한가하게 글 쓰는 비평가나 만족시키려고 만들지 않죠. 현실은 영화보다 몇 배로 잔혹하니까요.”

저는 레바논 출신의 나딘 라바키 감독이 그리스도인인지, 무슬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 영화의 제목을 굳이 ‘가버나움’으로 정한 이유를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원래 가버나움은 성경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마을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최근 프랑스 문학에서는 혼돈과 기적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모든 모험이 ‘가버나움’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혼돈의 안갯 속에서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잖아요.”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오늘의 레바논의 현실에서, 혼돈과 기적이 공존하는 세상의 전형을 보았고, 또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어디에나 있는 그런 세상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

< 2 >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저주받은 마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 11,20-24)

그러나 가버나움은 동시에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중심지였고,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마 4,13)고 하고, 또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마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마 9,1),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주민들의 호응은 큰 것이었습니다.

가파르나움(Kafarnaum) 또는 가버나움(Kafernaum)은 히브리어 ‘크파르-나훔’(Kfar-Nahum)으로 소급되며, ‘나훔의 마을’로 대게 번역되지만, 나훔의 배후인물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신약성서 시대의 가버나움은 가로 800미터, 세로 250미터 규모의 작은 동네였으며, 대략 1,500명에서 2,000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버나움은 고대로부터 ‘해변의 길’(사 9,1)이라는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서, 국경지역이었으므로 세관이 있었고, 로마의 국경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겐네사렛 호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인 가버나움이 알려지게 된 것은 주전 4년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지배하는 갈릴래아와 요르단 동쪽으로 필립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의 경계지역이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동서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가버나움에서 쉬면서 시장을 보고, 상품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양념들을 가버나움의 건조된 생선들과 겐네사르 평원의 과일들과 교환하는 상업이 활발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관이 생기고, 로마의 국경수비대가 주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어부 출신의 그의 제자들, 즉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고(막1,21-29; 막4,18-22), 로마 군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으며(마 8,5-13),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마 8,14-15). 그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모두 고쳐주셨습니다(마 8,16). 한 지도자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마 9,18-26),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는 여인을 구원하셨으며(마 9,20-22), 눈 먼 두 사람을 고치셨습니다(마 9,27-31). 특히 중풍병자의 네 명의 친구가 예수께서 가르치시던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간 사건(막2,1-12)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이곳 갈릴래아 지역의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왜, 유다 땅도 아니고,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도 아닌, 변방의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마태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이사야서 9,1-2)

예언자 이사야는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 북쪽 영토의 병탄과 정복에 대한 역사적 단서를 담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이 포함된 갈릴래아 지역은 어느 시기에도 순수한 유대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의 티글랏블레셋 3세(기원전 745-727년)가 기원전 733년에 이스라엘 북 왕국의 넓은 지역을 정복하고, 지도층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로 추방했을 때,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와 남은 자들과 섞였습니다. 그 때부터 갈릴래아 지역은 사실상 ‘이스라엘적’이기를 멈췄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그 지역을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표현했던 것이지요(사 9,1).

그 후 기원전 6세기에는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남 왕국 유다가 정복되면서 아람 사람들과 바빌론 사람들의 이주민들이 갈릴래아로 몰려왔고, 프톨레미아인들과 셀류커스인들의 치하에서는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 기원전 200년 무렵에 갈릴래아는 그야말로 이방 사람들의 지역, ‘이스라엘 사람들, 메디아 사람들, 아람 사람들, 아랍 사람들, 페니키아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로 된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 사회였습니다.

기원전 104년 마카베오 아리스토불(기원전 104-103년)이 갈릴래아를 정복하고, 일부는 이방 이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일부는 유대적인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이곳을 다시 유대화시켰으나, 이방문화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갈릴래아 지역의 사투리와 자유를 위한 100년 동안의 투쟁에서 형성된 저항의식과 적대적 공격성 때문에, 예루살렘의 교육받은 도시 주민들에게 갈릴래아는 경멸할 만한 지방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사야가 표현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압제자에 의해 백성이 멍에를 메고, 몽둥이로 맞고, 통나무로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어둠 속에서 헤매는 곳,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 이방인의 도시였던 것이지요(사 9,4).

그러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고, 그곳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 장소로 삼았습니다.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깊은 애정은 역설적으로 그의 저주담론(마 11,23; 눅 10,15)에서 분명하게 증명됩니다. 가버나움을 하늘까지 올리는 것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그의 갈릴래아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은 더 인상 깊게 설교하지 않으셨고, 가버나움 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은 더 많은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버나움이 지옥에까지 내려갈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버나움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이 완전히 좌초되었음을 전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환호했던 가버나움 주민들은 왜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을까요? 가버나움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설교하고, 성서를 해석하는 랍비에게 경탄했습니다(막 1,22-27).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는 이적을 행하시고(막 1,21-29), 가난한 사람들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는 예수님에게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은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세리와 창녀 같은 쓰레기, 혹은 기생충 같은 사람들과도 교제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과 십일조에 대한 율법을 비판하는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더 철저하고 급진적으로 율법을 해석하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어렵게 한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그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유대인 이웃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까지도 포함시키는 예수님의 원수사랑 요구를 그들은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고,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1-22),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8)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라디칼’(radikal)하고 철저해서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이상일 뿐이라며 예수님을 공상가로 여겼을 것입니다.

‘라디칼’이라는 단어는 흔히 극단주의와 혼동됩니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가 아니듯, ‘라디칼’도 극단주의가 아닙니다. 과학자이면서 급진주의 좌파운동에 헌신했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부고에서, ‘리처드 르원틴’은 라디칼을 ‘사물을 근본 뿌리부터 고려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첫 번째 원칙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즉 ‘라디칼’은 끊임없이 본질에 대해 묻고 이를 실천의 원리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것이지요.

특히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와 함께 폭력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열혈 당원들(첼롯)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대중은 예수님에게서 돌아섰습니다. 다만 몇 명의 친구들만 남았습니다. 아니 그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버나움’, 곧 ‘예수님의 도시’(마 9,1), 한 때 하늘에까지 치솟았던 도시는 이제 쓰라리고 고통스런 실망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 3 >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쪽의 변방,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여러 마을 가운데서 특별히 가버나움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선택하신 것은 가버나움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 이점이나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분단 이전의 통일 왕국에 대한 희망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곳, 앗수르 이후 끊임없이 강대국들에게 짓밟힌 고통에 대한 기억과 해방에의 열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곳, 유대적인 것과 이방적인 것이 만나는 곳, 백성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 그 곳 외에 큰 빛이 비치어야 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곳 외에 메시아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백성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말씀이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는 그 곳 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나딘 라바키가 오늘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기생충,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취급되는 불법체류자들과 난민, 길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들의 고통과 그런 고통에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혼돈과 기적의 가버나움’을 떠올린 것처럼, 우리는 2천 년 전의 ‘예수의 마을’, 이방의 도시, 죽음의 그늘진 땅, 가버나움에서 우리 시대의 ‘혼돈과 기적’을 봅니다.

시대의 혼돈과 심판의 파멸은 회개하지 않는데서 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회개하지 않는 사회나 공동체는 필히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들 칠천 명을 남겨 놓으셨습니다.’(왕상 19,18).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한 사람, 예수님 생각에 다시 일어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혼돈의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다 그래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사람, 예수님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이, 어둠의 땅 가버나움에 빛을 비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법체류자라고, 난민이라고, 성소수자라고 외면한다고 해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고 말씀하신 주님 생각에,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바로 그 사람이, 죽음의 땅 가버나움에 생명의 꽃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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