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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다『다석 강의』 18강 풀이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20.01.28 17:57

이 글은 한 곳의 성서말씀(요한복음 13:32-32)과 한글 및 한시 각 한편 그리고 성명자성(聖名自聖), 즉 스스로 거룩한 하느님 이름에 대한 다석의 풀이로 구성되었다. 이 말, ‘성명자성’은 1956년 12월 3일에 그리고 한글 시는 16일 자 『다석일지』에 수록되었다. 한시는 이보다 훨씬 앞선 4월 25일에 쓰여 진 것이다.

비교적 긴 시차를 두고 쓰인 본문을 연결시켜 오늘의 주제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다’를 풀어 낸 것이다. ‘성명자성’을 상기시키는 요한복음서의 말씀(13:31-32)을 적어본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상의 텍스트를 갖고서 다석은 한해의 끝자락 그러나 성탄절이 임박한 1956년 12월 21일에 18강의 강의를 했다. 밤(어둠)이 가장 길다는 동지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다석 역시도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이다. 올해가 벌써 지난해, 간해(去年)가 된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57년 새해를 맞아 새 사람이 되길 스스로 소망한 것이다.

이 날은 성탄절을 3일 앞둔 날이었다. 이 땅에 새로움을 가져다 준 성탄절을 다석은 올(1957년) 인생의 마지막으로 여긴듯하다. 3일 밖에 남지 않은 이 날을 중히 여겨 어찌 움켜잡을 수 있을 지를 생각했던 것이다. 실상 다석이 4월 25일 글을 여기서 뒤늦게 재론한 것은 본래 1년 전에 이날을 자신의 임종일로 여겼던 탓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성탄 3일 전인 21일에 4월 25일로 예정했던 자신의 죽음을 새롭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 1 >

첫시 <성명자성(聖名自聖)>, 스스로 거룩하기에 거룩하다 이름 한다는 말이겠다. 다석은 이 말을 유교의 자성(自誠), 자도(自道)란 말과 같이 썼다. 스스로 성실한 것이 도(道)라는 말이다. 결국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바로 말씀, 自聖, 自誠, 自道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영원한 ‘나’가 참인 것을 가르친다. 나로부터 비롯한 수많은 가면들(인격들), 2, 3. 4로 언표 되는 상대세계의 ‘나들’은 모두 가짜라고 했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일 뿐이다. 앞서 공부한 주역 팔괘가 하나로부터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으로 세상을 확장시키는 것 같으나 실은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點) 앉아 있다(線)가 일어서(體)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모르고 한 자리에 들러붙어 버리는 것이 바로 일패도지물(一敗途地物)의 상태라 하겠다.

하나란 것은 샐 수도 잴 수도 없다, 여기에 하느님, 부처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들이 바로 거룩하기에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거룩하기에 거룩한 존재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한 것은 우리가 빛이기에 빛이라 했다는 것과 의미 상통한다. 다석은 이를 ‘진여진’(眞如眞)이라 불렀다. 맨 처음 말씀이나 참 나는 모두 같다는 뜻이겠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처음 인용했던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풀었다.

‘한웋님이 저로 ᄒᆞㅣ서 환빛을 바드시고, 한웋님도 제로 ᄒᆞㅣ서 환빛을 저에게 주심’, 이 말씀에서 다석은 없이 계신 우주의 한분이신 하느님 하는 일은 오직 ‘주는 것’이라 했다. 영광, 곧 환한 빛을 세상에게 주었듯이 우리 역시 주는 것을 중히 여기며 살라고 한 것이다. 예수 역시 우리에게 주는 것을 가르쳤다.

이렇듯 없이 계신 그분이 주었던 까닭에 세상은 그의 끄트머리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세상 속 끄트머리가 되었다. 그 하나의 끄트머리가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 역시 예수처럼 주면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십자가 사건에서 보듯이 예수에게서 배울 것은 바로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바라기보다 세상에 주기 위해 살라고 했다. 다석은 이것을 예수 종교의 핵심으로 여겼다.

하지만 석가모니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왕권을 버렸고 부모와 처자도 떠났던 사람이다. 자신의 눈, 수족, 골수까지 다 내어준 존재였다. 세상에 와서 자신의 것을 모두 주고 떠나는 것이 바로 없이 계신 한분의 빛(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역시 부처가 될 수 있었다. 예수가 자신을 내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 일상은 언제든 ‘덜’없어 더러운 상태로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우리 역시 일체를 줘버려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끄트머리로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의 사는 이유이자 과제일 것이다. 구원의 길이라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요한복음서 31장에 대한 다석의 해석이다.

< 2 >

이상과 같은 요한복음서 내용은 다석에게 ‘성명자성’(聖名自聖)이란 말로 요약되었다. 그는 이 뜻을 한시로 다시 풀어냈다.

‘신인불신면정면’(神人不神面正面). 神人, 하느님의 사람이란 뜻이나 다석은 이를 성서 속 바리새인이라 보았다. 그래서 바리새인 그는 하느님일 수 없었다(不神). 남의 얼굴만 처다 보며 인생을 살았던 탓이다. 체면치례에 급급한 인생이란 뜻이다. 그래서 사람의 속마음에 관심도 없고 들여 다 볼 생각조차 않고 산다.

하지만 먼저 깨달은 자가 있어야 그를 보고 다시 깨치는 일이 발생한다. 선각(先覺)과 후각(後覺)의 사람이 시차를 두고 생겨나는 법이다. 먼저 알고 깨달은 자, 바로 그를 거룩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세계를 참이라 여기지 않았다. 예수께서 죽기 3일 전에 하신 말씀인지라 진리인 것이다. 속마음의 진면목을 드러낸 까닭이다. 면전, 곧 얼굴 낯짝이란 빈껍데기 일 뿐이다.

‘성전명일일천이’(性全命日一天已). 다석은 이 말 전체를 일컬어 ‘천상’(天上)이라 풀었다. 자신의 전체 생명이 오로지 하늘에 달렸다는 것이다. 상대계인 현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처럼 3일 후면 자신 삶도 끝일 수 있기에 이는 결코 헛말이 아니다. 다석은 없이 계신 ‘하나’에 대한 큰 확신을 갖고 살았다.

‘월공주결삼일전’(月空週缺三日前). 달이 사라지고 한 주도 3일만 있으면 채워지는 이 날, 이 시간이 지나면 다석은 예수가 죽었듯이 자신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석은 산 날수를 세고 살았으나 때론 주(週)와 달(月)도 헤아렸다.

이 강의를 하던 1956년 12월 까지 다석은 818달을 살았던 셈이다. 자신도 죽으면 예수나 부처처럼 ‘하나’에게로 돌아갈 것을 믿었다. 본래 하나(전체)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돌아갈 ‘하나’, 그래서 하느님은 거룩하다. ‘하나’이기에 거룩하고 거룩하기에 ‘하나’인 것이다.

다석은 요한복음서를 죽을 날을 앞둔 예수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로 읽었다. 글이란 것이 그(하나)를 그리워하는 글월(文章)이라 본 것이다. 다석 역시도 이 글(요한복음)에 자신을 동화시켜 ‘하나’에 대한 그리움을 적시했다. 뿐만 아니라 다석은 삼라만상(자연)과 역사 모두가 ‘그’를 그리는 글월이라 할 만큼 자신의 그리움을 깊게 표현하였다.

지금 이곳서 내일(영혼)을 생각하는 것이 그를 그리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이다. 하루(ᄒᆞᆯ우)는 할 일을 위에 놓았다는 뜻이다. 자신을 위로 이끄는 삶, 나를 내일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가온찍기(ᄀᆞᆫ)이다.

< 3 >

이어서 다석은 거지반 7-8개월 앞서 써놓은 한시(4월 25일)를 풀어갔다.

‘지상달도자고천’(至上達道自古天), ‘철하강송지금지’(澈下講誦止今地). 죽는 당일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선각자 옛 사람이 올랐던 천상(天上), 그 하나‘에 오를 생각을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 본심이겠다.

하지만 사람은 하늘에 오르고자 하나 그곳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책 읽는 일(講誦)을 그만두곤(撤)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가 맨 아래(바닥)인 것을 인지하는 일이다. 더 이상 나락이 없을 정도로 바닥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야 오를 수 있는 힘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지상철하신소견’(至上撤下身所見). 몸을 갖고 사는 동안 오르고 내리는 일이 반복되나 궁극적으로 몸의 생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끄트머리인 우리들 밑둥(바탈)은 몸과 이별한 후 위로 올라간다.

‘자고지금심유지’(自古止今心攸知). 사람은 옛적부터 우리들 마음으로 영원을 느껴 알았다. 심유지(心攸知)란 말이 그것이다. 영원이란 바로 ‘하나’의 끄트머리로서의 나(我)이다. 이것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의 소유이다. 이런 ‘참’을 예부터 선인들이 가르쳐 온 것이다.

‘지견중지개은광’(知見中止皆恩光). 하느님을 만나서 그 삶에 머무르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 삶에서 이것이 은총이다. 자신 속에서 ‘하나’의 끄트머리를 찾는 일이다.

‘거래적시도혜명’(去來適時都慧命).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들 속의 영원, 곧 참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자신원무아’(自身元無我). 인간의 몸 그것이 본래 나일 수는 없다. 나라는 것이 존재할 경우 ‘참’은 그 속에 거하지 못한다. 몸으로 사는 내가 사라질 때 참이 살아 움직인다. 이것을 우리는 영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심본신물’(是心本神物). 우리들 마음이 본래 하느님이란 뜻이다. 우리 몸은 하느님과 무관하나 ‘참’이 담긴 우리들 마음은 그자체로 신성하다. ‘시심본신물’이란 말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순사일존래, 안녕야몰거’(順事日存來, 安寧夜沒去). 하느님의 뜻을 좆아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진실로 살 수 있다. 사실 인간 삶이란 것이 아침에 멀쩡하다가도 저녁시간에 사단(私斷)이 나는 경우가 많다. 졸지에 죽을 수도 장애를 입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 삶이다. 자신의 계획대로 죽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던가? 하느님 뜻을 좆아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내거유내하 거래무외상’(來去有內下, 去來無外上), 하늘이 내게 주신 것이 우리들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갖고 세상에서 살다가 다시 본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 삶다. 하지만 일체 오고 감(去來)에는 거저가 없다. 새로움을 낳아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이다. 새 생명을 위한 노력이 반듯이 수반되어야 한다. 돈을 모으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삶과는 달라야 한다는 뜻이겠다. 이처럼 다석은 동짓날을 맞아 과거 6개월 전에 썼던 시를 다시 끄집어 내여 자신을 향한 송년의 메시지로 삼았던 것이다.

< 4 >

마지막 한글시 한편이 남아 있다. <낯보기 낫에 깩기>란 이상 이상야릇한 제목의 시이다. 1956년 12월 16일에 썼던 것으로 3연으로 되었다.

‘몬으로 된 몸, 몽기길, 몽킬 길만 길고 긴데’, 여기서 ‘몬’이란 물(物), 곧 물질을 말한다. 인간의 몸이란 무수한 ‘몬’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 경우 몬은 자연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끊임없이 자연의 변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몸이란 것이다.

‘몸이 낯을 좆는 낮엔 낯읋 낮히 깍는 낫이지’, 이 둘째 연에서 시 제목의 뜻이 살아난다. 인간의 몸이 체면치레로 사는 동안 실제로 그의 삶이 한없이 초라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뜻이 아니라 맛(멋)을 찾는 인생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해칠 수 있다고 보았다. ‘몸에서 몬을 논 ㄱ낫 모를 Korean이슴나’, 몸에서 ㄱ을 빼면 몬이 된다. ㅁ이 ㄱ과 ㄴ의 합으로 구성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ㄱ을 생략하면 우리들 몸이 온통 몬이 되는 것이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낫이 ㄱ자로 되어 있기에 이를 모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다석은 우리 한국인들이 몸에서 ㄱ을 빼면 몬인 것을 모르고 있다고 나무랐다. 이처럼 나(我)가 몬인 것을 모르는 탓에 낮에 낯(체면)만을 좆아 살면서 정작 자신의 낯을 낮게 만들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석은 동짓날에 팥죽 한 그릇 먹고 한국 사람들 모두가 이점을 깨달아 새로운 해를 맞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을 것이다. 2020년 설 연휴에 읽고 새길 내용이 참으로 많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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