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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공과 운명론 사이 어디쯤창조와 섭리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2.01 17:19

이제 칼빈은 16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언급합니다. 앞서 말했던대로 이 ‘섭리’는 ‘창조’의 교리를 보완하고 해명해주는 교리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고백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부성적인 선하심 가운데서 계속하여 그가 주신 생명을 지지하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 특히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가 보편적인 운동에 의하여 천체와 그 각 부분을 운행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만드신 만물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유지하고 양육하며 보호하시는(마10:29) 영원한 통치자요 보호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I.xvi.1).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부성적 전능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17, 8세기 이신론자들의 생각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신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하나님은 회중시계를 만드는 시계 장인과 같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시계는 시계 장인의 도움 없이 혼자 돌아갑니다. 이렇게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저절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의 창조세계를 유지, 보존, 관리하십니다. 세상 안에는 하나님에게 예속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한 질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만약 우연과 운명들이 있다면, 그것들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I.xvi.2).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필연성도, 행동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유를 제외하고는 자유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이 처분할 수 없는 우연성이란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질서는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은 모두 근거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리고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능으로써 이같이 만사를 지배하십니다.

그러나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전능은 소위 스콜라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들이 마치 이신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허하고 게으르며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것”을 상상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의 깊고 효과적이시며 활동적이시고 계속 일하시는 그런 전능”(I.xvi.3)을 가리킵니다. 칼빈은 『제네바 신앙문답서』(1542)에서 사도신경을 해설할 때, 이 하나님의 전능을 하나님의 부성적인 섭리와 관련하여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라틴어 본문을 보면, “나는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라고, 전능이 단지 하나님의 ‘부성’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이 하나님의 전능을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하심과 그 행사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칼빈은 신앙문답 질문 22항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가 되시는가를 밝히고, 이어서 23항에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그것은 단지 그가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제는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손 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렇게 만물을 그의 섭리로써 처분하시며, 자기의 뜻대로 세상을 지배하시고, 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그가 좋다고 여기는대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질문 24항은 “당신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항상 활동하시고 어떤 것이라도 그에 의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는 말이다”라고 추가적으로 해명합니다.

이와 같이 전능이 단지 하나님의 부성 다음에 언급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전능은 결코 우리가 자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고 상상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때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수수께끼 속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네모난 원이나 둥근 삼각형을 만들 수 있을까? 하나님은 2의 제곱이 다섯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무슨 물건을 본래의 형체보다 크게 했다 적게 했다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그가 만드신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은 무엇이든지 무분별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힘을 행사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피조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칼빈의 『제네바 신앙문답서』를 해설할 때, 이 하나님의 전능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전능의 행사에서만 고려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은폐되고 그리고 계시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전능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영원 전부터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모든 죄와 모든 불행과 죽음까지도 짊어지셨다. 그는 그의 아들 안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그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짊어지시면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승리자, 그것이 바로 그의 전능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우신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여전히 주님으로 계시면서 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곳에 내려오신 분이시다. 또한, 그것이 그의 전능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심판자이시고 인간의 규범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동시에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것이 또한 그의 전능이다.(1)

시계공과 결정론

그러니까 칼빈의 섭리교리는 세계에 관한 두 개의 다른 개념들 사이에 있는 노선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세계의 운행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으로 지각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는 세계를 엄격한 결정론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지각합니다. 첫 번째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의 사건들은 단지 우연의 법칙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반면에 두 번째 세계관에 의하면,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 결정됩니다. 칼빈은 이 양쪽의 세계관들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정교한 시계를 만들고 저절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둔 시계공이 아니다. ⓒGetty Image

그가 첫 번째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섭리교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우연에 내맡기는 것은 하나님을 “게으르고 나태한”(I.xvi.4)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물을 조정”하십니다. 그리고 섭리의 행동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제1 운동자의 그것이 아니라 인자한 아버지의 행동들입니다(I.xvi.3).

이와 같이 칼빈의 섭리교리는 세계가 우연에 의해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지배된다는 신념과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론적인 세계관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이 세계는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고, 그의 특별 섭리는 “비 한 방울도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도, 불지도 못한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말을 할 때, 이것은 그가 세계는 어떤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단지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거절합니다. “우리는 스토아학파처럼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영속적인 관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련의 원인들로부터 필연성을 고안해내지 않는다”(I.xvi.8). 바꿔 말하면, 칼빈은 필연성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필연성에 대한 어떤 관념, 즉 역사적인 사건들이 세계의 본질에 의해 맹목적으로 결정된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엄격한 숙명론을 반대합니다.

세계의 질서는 자연에서부터가 아니라 의지로부터 흘러나온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역사적인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정하시고, 그들의 역사적인 전개가 그의 보살핌과 능력에 맡겨지는 질서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칼빈은 대 바실(Basil)의 말을 인용하여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I.xvi.8).

섭리교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위에서 간략하게 묘사한 두 개의 다른 세계관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변이 아닙니다. 실로, 그는 섭리교리의 실제적인 의미를 지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선 그는 섭리교리가 인간의 책임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운명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그는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조치와 구제책을 마련해주셨다(I.xvii.4).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살필 책임을 덜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핌이 그 자체로 섭리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돌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제2차적인 원인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단지 명목상의 차이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인은, 그것이 아무리 제2차적인 것일지라도, 여전히 그 결과들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I.xvii.5; xvii.9). 우리는 뒤에서 칼빈이 악의 문제를 다루는 “제2차적인 원인들”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어떤 결론들을 끌어내는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위로

칼빈은 이 섭리교리가 주는 유익함을 성경에서 많은 사례를 인용하며 설명합니다(시55:22, 벧전:5:7, 시91:1, 창15:1, 렘1:18, 사49:15, 25, 시91:12).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것이며, 그의 부성적인 선하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우리를 안심시켜줍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10: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10: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10:30). 머리털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실 때 아버지로서의 돌보심을 특수하게 표현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I.xvii.6).

칼빈에 의하면 이러한 섭리교리는 신자를 고무하여 그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은 없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와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우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I.xvii.7). 바로 이것이 칼빈이 섭리교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시며,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끝까지 지키시고 유지하고 돌보시는 아버지 같은 분이심을 믿을 때,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악에 둘러싸여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죽음에 둘러 싸인 생”(I.xvii.10)을 살아가기 때문에,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성적인 섭리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을 짓누르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일체의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 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I.xvii.11) 때문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칼빈에게 섭리와 악의 존재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해명하게 만들었고, 칼빈은 제1권의 마지막 장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불가피하게 우리의 생명을 괴롭히는 고통에 책임이 있다는 의미인가? 물론 칼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창조의 교리에서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는 섭리 교리에 대한 몇몇 가능한 반대 주장들을 전력을 다해 논박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 사이를 구별하기도 했습니다(I.xiii.1). 그것에 따 르면 고통은 하나님의 의지보다는 그의 허락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구별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 상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의 도구들조차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중 요한 사례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출9: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출10:1)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I.xiii.2).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가 사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은 결코 하나님이 두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 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와 같은 선한 일과 그것이 금지하는 악한 일을 모두 바라신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본질의 단순성을 부정합니다. 칼빈은 하나님께는 의지가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으로 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의 이중성은 단지 문제를 바라보는 인간의 지각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하실 바를 원하기도 하시고 원하지 않기도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다”(I.xiii.3). 칼빈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악행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것인지를 해명하며, 이 논지를 해명합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징계하려고 의도하셨고, 정당한 사유로, 즉 징벌을 위해 압살롬을 이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행동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의도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했습니다. 실로, 다윗의 후궁들을 강간함으로써, 압살롬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I.xviii.4).

즉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밀한 심판으로 작정하신 것을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이나 한 것처럼 용서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실상 저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고의적 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파괴하는 자들이다(I.xviii.4).(박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칼빈의 시도는 여기서 겁탈당한 후궁들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이 악한 행위의 희생자들을 소홀히 한 것, 바로 여기에 칼빈의 해석의 한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섭리교리는, 17장에서 확인했듯이, 무엇보다도 신앙의 고백으로 의도되었지, 이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체계로서 의도되지 않았다는 점이 정당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칼빈이 “경건”(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태도)이라고 부른 것에 근거해 있는 논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섭리교리는 한가한 사변도, 신적인 숙명론도 아니고, 개별적인 신자와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 모두를 위한 신뢰와 확신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신자 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그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 최영 옮김,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서울: 다산, 2000), 111-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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