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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꾼, 꾼, 꾼들이 지배하는 나라나눔은 하나님 자녀의 표징
이이소 | 승인 2020.02.01 17:25

“기레기”라는 말이 가슴 아프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세상을 일깨우는 “사회의 목탁”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 거짓과 왜곡, 과장과 축소, 오보로 만들어내는 쓰레기 뉴스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미 진실과 공정의 감각을 잃고 패거리 문화 속에서 기득권을 위하여 대중언론이라는 막강한 칼을 함부로 휘두르는데도 막을 길이 없어서 더욱 안타깝다.

지사꾼, 신사꾼, 종사꾼

단지 기레기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 혼자 사용하는 말에 “지사꾼”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하여 발언할 권리를 독차지하고 시대와 정치, 사회를 꿰뚫어 보는 보수 또는 진보의 예리한 통찰을 자처하며 가장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들을 위하는 것처럼 떠벌이는 각종 분야의 “지식 장사꾼”이다.

그들은 대학 강단을 독점하고 있으며 정부, 기업, 연구소의 각종 전문 부서에서 고문과 연구원으로 일하며 TV나 신문, 유투브를 장악하고 있으나 결코 나눔을 실천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다. 말이나 글은 그럴 듯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자기의 자리나 명예나 밥그릇을 결코 양보하거나 내려놓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단 한번도 3D의 고난을 감수한 적도 없고 감수할 생각도 없는 자들이다.

평화 시에는 선량하고 양식 있는 지식인의 풍모를 보여주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이나 집단에 불리한 정책이나 법이 나오면 벌떼처럼 일어나서 정부와 법 제정자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은 자기 배만 사랑하는 자로서 자기를 위한 지식과 화려한 학력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위에 군림하며 애국애족을 참칭하고 도용해서 이익을 취하는 집단이다. 친일파와 친일파 후손들, 독재자 후손과 그 협력자들 속에, 명멸하는 정치인들 속에 선동적인 “지사꾼”이 얼마나 많은가! 

“지사꾼”들이 사회 정체의 큰 요인이지만 더 심각한 “신사꾼“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학을 해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신학 장사꾼”들이다. 전혀 행동하지 않으며, 전혀 나누거나 섬기지 않으며 사랑과 정의를 외치는 말 뿐인 강의와 책으로 진리를 죽음과 부패로 이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사꾼“ 보다 더 위험하다. 더 더욱 위험한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반 예수그리스도적인 이념들을 교조화해서 성도들을 세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반 예수그리스도적인 이념이 교회를 농락하며 세상을 향해 악독을 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신사꾼”과 함께 교회를 반 하나님, 반 그리스도의 회중으로 몰아가는 “종사꾼”이 있다. 이른바 지옥과 축복을 팔아서 밥벌이하는 “종교 장사꾼”이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우상의 전을 세우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화려한 제사를 지낸다. 바벨탑의 위용을 뽐내며 정치와 야합하여 시녀가 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 없고 욕망의 성취를 위해 조직으로, 물질로, 심리로, 은사로,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아편”종교로 사람들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고 화를 선포하신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독점과 기득권

“기레기”와 내가 이름을 붙인 “지사꾼”, “신사꾼”, “종사꾼”의 명칭과 일하는 분야가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독점”과 “기득권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혹 이들이 나눈다고 해도 더 큰 이익을 목표로 하는 이해타산적인 장사이지 나눔이 아니다. 이들은 정치나 경제 어느 분야에서든지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눔마저도 정점의 자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이론과 자본주의 논리는 무한 소유와 경쟁을 인정하지만 구약성서의 희년법은 최소한 50년을 주기로 이를 해체하여 독점과 기득권의 횡포가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 하도록 막고자 한다. 희년법은 바로의 폭력과 독재세계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정의롭고 공평한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하여 해방자 야훼 하나님의 신앙에 근거하여 만든 사회 재분배법이며 개혁법이다. 창조의 처음 자리, 가나안 땅 분배의 처음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하여 무너지고 망가진 병들고 불의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원론적이면서도 가장 급진적이며 혁명적인 법이다.

실로 희년법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절망적인 노동과 고난을 기억하며 사람을 혹사시키는 독재와 독점, 악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공동체적인 선서요,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출발하면서 은혜의 해, 희년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복음은 희년법의 계승

복음은 희년법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씨알이다. 복음은 거듭난 자들에게 무시로 희년법 실천을 촉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년법은 은혜 받은 자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지구상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법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의 포기와 관용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적인 법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희년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서 애굽 같은 폭력국가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은혜로 사는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 법이었다. 희년법은 주기적으로 반복적인 실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애굽화를 막고자 하였다. 희년법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동시에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공동체 회복의 법이었다.

희년법은 경제법이며 사회법이고 종교법이었다. 희년법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고 법이었다. 희년법은 물질의 분배의 법이며 영적인 법이었다. 희년법은 가진 자에게는 자비와 포기를 요구하였고 가난한 자에게는 인간 회복을 선언하였다. 희년법은 에덴동산과 가나안 입주의 처음 자리로 돌아가는 재창조 운동이었다. 희년법은 애굽의 고난을 잊은 후손들에게 강제적이고 불가능한 법이 되었다.

예수는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희년법을 복음에 담아냈고 복음은 이를 사랑의 유출, 나눔으로 표현하였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이 땅에서의 나눔 행보이며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의 나눔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나눔으로 병든 인간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나눈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였고, 예수님이 인간과 나눈 최고의 선물은 그 자신의 피와 살, 곧 생명이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들은 천국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나눔을 일상적으로, 자발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디서나 조건 없이 은혜와 감사로 살아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양의 무리이며 제자들이며 과부이며 벳새다 소년이며 갈릴리의 여자 제자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는 구원과 회복, 치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나눔이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나눔은 사랑의 발현으로 자발적이다. 나눔은 약속이행이나 종교법 준수의 차원이 아니며, 누가 시켜서 하는 강제성을 띤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요식적인 통과의례로서 외식적인 쇼가 아니고 성령의 감동대로 손발이 따라가는 자연스런 생명의 행위다.

둘째 나눔은 이웃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일상적인 굶주림과 질병에 대한 아파함이다. 집 없는 자들과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들에 대한 지지와 관심, 격려와 사랑이다. 생명의 신음 소리를 듣고 즉각적으로 행동함이다.

셋째 나눔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특별한 시간에 특별 행사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반복되는 삶속에서 생존의 필수적인 의식주를 나누는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이다. 이해타산이나 정치를 위한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다. 삶이 나눔이고 나눔이 삶인 것이다.

넷째 나눔은 은밀하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한다. 전혀 자기의 의와 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명으로 행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자존심을 배려한다.

다섯째 나눔은 은혜다.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않으며 조건 없이 나누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나누고자 한다. 은혜로 나누는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겸손히 고백한다.

여섯째 나눔은 신비다. 지극히 작은 자, 불행을 당한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되는 영적인 신비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가 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고백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나눔이 은혜로 이루어지며 양의 표징, 하나님 자녀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누는 자는 아버지께 복 받은 자이며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받는 자이며 이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영생을 얻은 자이다.

“포도원 품꾼들” 의 비유에는 희년법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품꾼을 찾는 주인은 출애굽을 주도하는 하나님이며 품꾼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포도원은 가나안이다. 품꾼들이 받는 한 데나리온은 가나안 입주 때 분배받는 토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이기도 하다.

이 비유는 나눔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첫째, 나눔의 주체는 주인이다. 생명 치유와 회복, 유지를 위한 나눔의 적극적인 주체는 생명을 창조한 주인일 수밖에 없다.

둘째, 포도원은 나눔의 장이다. 포도원은 독점이나 무한 경쟁의 장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살아야할 일터이며 삶의 자리이며 나눔의 실천 장이다.

셋째, 나눔은 주인의 의지이며 선하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모든 나눔은 주인의 뜻을 이행하는 재창조의 작업이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징이다.

넷째, 먼저 온 자들은 품꾼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일했다는 공로의식과 기득권자로서 권리주장이 앞서서 계약을 망각하였다. 그들은 계약이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도 몰랐으며 포도원의 노동이 재창조 작업임을 깨닫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된 노동에 대한 보수, 대가, 권리로 품삯을 받는 가련한 품꾼이 되었다.

다섯째, 나중 온 자들은 품꾼으로 일한 것이 주인의 은혜임을 알았으며 품삯을 은혜로 받는다. 여섯째, 주인은 나눔으로 꼴찌,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며 그들의 구원과 회복을 선언한다. 일곱째, 먼저 온 자들은 주인의 공평한 품삯에 분노하였다. 그들은 먼저 포도원에 들어온 자신들이 나중에 온 자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음에 대하여 분노하며 기득권을 주장한다. 여덟째, 주인은 먼저 선택 받은 것이 은혜일뿐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능력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품꾼이 동등하다고 선포한다.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는 품삯, 나눔이 주인의 자비와 은혜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한 데나리온은 최저 생계비로서 품꾼들의 일의 시간, 수고와 헌신, 노동의 질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그러므로 나눔은 땅의 일이며 하늘의 일이 되고 사람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이 된다. 나눔은 언제나 이해타산 없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간다. 고아와 과부, 사회적 약자와 실패자 등을 지향한다.

나눔은 독점과 기득권을 허문다

무한 성장과 독점, 기득권을 생명처럼 여기는 “기레기”와 “지사꾼” 그리고 “신사꾼과 종사꾼”에게 거룩한 나눔, 세상을 변화시키는 나눔, 작은 자들을 살리는 나눔, 사람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나눔은 불편하다. 그들은 은혜로운 나눔이 자신들의 가식과 위선을 드러내기 때문에 포도원에 “먼저 온 품꾼들”처럼 주인의 관용과 선을 거부하며 비난한다. 특별히 자신들의 거룩한 소명을 확신하는 “신사꾼”과 “종사꾼”들은 자기들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또한 자기들이 매사에 “지적봉사”와 “영적인 봉사”에 헌신하므로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양떼들의 나눔도 세상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으며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간다. 그들은 명목과 과시, 자기선전과 영광을 위하여 숭배자들과 자기 패거리들, 고위공직자들과는 지속적으로 나누며 자기 신분과 지위를 업그레이드 한다. 설혹 그들이 가난한 이웃과 나눈다 해도 “지극히 작은 자”를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상술과 계산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는 심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은 팔레스틴을 넘어서 로마제국으로 들어가 로마를 변화시켰지만 나눔 없는 한국교회는 건물의 대형화, 교회의 체인화, 혈연 승계, 기복주의와 세속주의 첨병으로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교회가 말하는 사랑을 세상은 거짓이라고 비웃으며 심판한다. 카톡에 올라온 신영전의 ❰세상읽기❱ “사랑은 없다”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릿아릿 아팠다. 만약 교회의 나눔이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일들이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그는 지난 한 해 한국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다쳤고, 2천여 명이 출근한 날 죽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석탄화력발전산업 산재 사상자 334명 중 98%가 하청 노동자이며 임시 가설물에 나사 하나가 빠져서 떨어져 죽은 자가 300명이었다. 길에서 죽은 노숙자가 150명이 넘고 자살자가 1만 4천명에 이르렀고 70여 명의 일가족이 동반 자살을 하였다고 말하며 이들을 외면하는 종교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은 모두 거짓이라고 일갈한다.

“깜깜한 밤 도시 전체에 펼쳐진 붉은 십자가 군상, 신용카드는 안 되고 현금으로만 통행료를 받는 화려한 사찰들은 이 땅이 공동묘지요 조폭의  소굴임을 보여준다. 사랑이란 말이 범람하는 이 시대는 사이비 종교의 시대다. ‘사이비 종교’란 특정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한 자. 아픈 자, 집 없는 자,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 약자들이 천사임을 모르는 종교가 사이비다. 이 땅에서 신의 추종자들은 미워하느라 더 바쁘고 돈을 세는 데 더 노련하다. 침략자의 맨 앞자리는 늘 그들 차지였다. 이 땅엔 종교만 있을 뿐 사랑은 없다.” 

나는 이 비판에서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듣는다. 강자의 교회, 승자의 교회, 부자의 교회, 세상을 추구하는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나눔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자녀들의 교회가 아니다. 생명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은혜로 받지 못 하고 은혜로 나누지 못 하는 교회는 예수의 교회가 아니다.

어떻게 예수의 교회로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회로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교회를 주님에게 돌려드릴 것인가? 어떻게 나눔을 회복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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