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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암 9:7-15; 롬 8:12-17; 막 3:20-35)주현절 다섯째 주일(2월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2.07 17:16

1. 은사 입은 사역자에서 가족으로

2020년 올해의 트렌드를 ‘느슨한 연대(Weak Ties)’로 전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김용섭 경영전략 컨설턴트입니다. 그는 『라이프 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부키, 2019)에서 2020년의 첫 트렌드를 ‘느슨한 연대’로 전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전적으로 ‘느슨하다’는 잡아맨 끈이나 줄 따위가 늘어져 헐겁다, 마음이 풀어져 긴장됨이 없다 등의 의미다. 이런 ‘느슨하다’는 말을 ‘관계’ 앞에 붙이면 서로 연결은 되었으나 아주 긴밀하거나 끈끈하지 않은 관계, 즉 ‘따로 또 같이’가 좀 더 원활한 관계를 말한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장점은 일부 취하되, 그런 연결이 주는 부담과 복잡함을 덜어 내겠다는 태도가 ‘느슨한 관계’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느슨한 연대는 집단주의적(공동체적, 전통적,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이기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개인주의적(젊은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태도가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약한 연결’, ‘약한 연대’라고도 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가 기존의 모든 관계에 대한 재해석과 변화를 요구할 때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기존의 관계와 연대가 가진 문제의 대안으로 느슨한 연대가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에 관한 관점의 변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느슨한 연대는 결혼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로도 이어집니다. 과거의 관성을 고수하려는 측(곧, 기존 결혼제도를 옹호하는 측)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측(곧, 결혼 제도의 변화를 수용하려는 측)과의 관점 차이는 이제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아니라, ‘시대 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충돌을 빚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슨한 연대는 단지 가족과 연애, 사람들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직장문화와 조직 문화, 나아가 주거 환경과 부동산, 도시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느슨한 연대는 ‘외롭지 않으면서도 질척이지 않고’, ‘멀지 않지만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의 매력으로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은사 입은 사역자가 어떻게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시스템이 중요하고, 또 그 만큼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은사 입은 사역자, 혹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으로까지 관계가 확장이 됩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일까요? 또한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는 이 시대정신에 가족이라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답은 분명하죠?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 친구를 넘어 가족으로까지 관계를 확장시켜주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의 확장을 통해, 가족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먼저 전제가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 전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왜 그렇습니까?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죽을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아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증하는 분으로 성령의 증언을 이야기 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사실 로마서 8장의 전체 주제가 ‘성령의 역할’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성도들이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영적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죠? 복음서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가족이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줍니다.

3. 예수님 가족의 조건

예수께서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막 3:31-32).” 어머니, 동생, 누이는 가족이죠?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3-35)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아니,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시인할지라도!) 그들은 범죄한 나라의 죄인들입니다. 구약 본문 아모스 선지자가 이것을 잘 지적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암 9:7)” 말씀이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공동번역이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티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내 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암 9:7)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에디오피아의 흑인인 구스인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셨듯이, 블레셋 사람들도 갑돌에서, 아람 사람들도 기르에서 구해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은 고대 가나안 지역 서부 지중해 연안에 살던 민족입니다. 원래는 크레타 섬(갑돌)에서 살던 사람들인데, 고대 미케네 문명을 건설한 그리스계 이주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로 이주한 후, 나중에 지금의 팔레스틴 땅인 가자, 아스글론, 가드, 아스돗, 에그론 등의 다섯 개 도시를 중심으로 연맹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의 이주와 이주 경로를 아모스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아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의 이동경로를 출애굽과 같다고 말하는 아모스 선지자>
<블레셋 도시들>

곧 선택된 백성들에게 행한 것과 똑같은 일을 이스라엘이 원수라고 생각하는 블레셋과 아람 사람들에게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암 9:8a)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 9:1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수님의 가족은 복을 받을 것이고, 입술로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 믿는다고 하고, 우리에게 화가 미치지 아니한다고 말하며 범죄한 나라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기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 가족을 깨뜨리는 이들

다시 복음서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지난주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신 말씀(막 3:13-19)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 3:20).” 이때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1).” 열 두 제자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이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미쳤다하여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늘 이렇게 공동체를 훼방하며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눅 3:22)” 바알세불(Beel-zebub)은 ‘파리의 왕’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블레셋 땅 에그론에서 숭배하던 파리(fly) 신으로, 일명 ‘똥신’이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에도 예수님께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들을 고친다고 예수님을 비방한 적이 있었습니다(마 12:22-24).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막 3:23a).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막 3:23b-26)

그렇습니다. 가족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분쟁하면 그 집은 제대로 된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7-29)

물론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막 3:30). 아무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지,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지,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7문은 인간의 죄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 관련하여 살펴야 할 법칙들’ 네 가지를 살펴볼까요?(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문 해설에서 인용)

“첫째,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모든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사울과 유다 등, 성령으로 말미암아 빛을 받았고 그리하여 진리를 충실히 납득했던 자들에게서만 나타난다.
둘째, 성령을 모독하는 모든 죄는 지배하는 죄요, 양심을 거스르는 죄이지만, 그 역(易)은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무지하여 -혹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특정한 오류들을 주장하거나, 혹은 연약함 때문에나 혹은 환난이나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면서도, 진리를 해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이나 악의가 없이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거룩함에서 전적으로 타락하여 계속해서 쾌락을 추구하며 신성한 모든 것을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도 있고, 죄를 회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형태의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셋째, 택함 받은 자들이나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은 절대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멸망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안전히 보존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또한 딤후 2:19; 벧전 1:5; 요일 5:15 등을 참조할 것).
넷째,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관하여는 누구도 성급하게 나 경솔하게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어느 경우든 그 누구에 대해서든 다 겪어 본 후(a poeterion)가 아니면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는 구체적인 예시가 없지만, 가톨릭교회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여섯 가지로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여줍니다. 

“첫째, 구원을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
둘째, 공로 없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함(공로가 구원의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에 대한 반대).
셋째, 알려진 진리를 반박함(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반박한 종교개혁가들과 그 후손들의 죄).
넷째, 타인이 받은 영적, 육적 은혜(재능, 재물 등)를 부러워하는 것(질투).
다섯째, 완고하게 죄에 머무름(어느 교회가 참교회인지 연구하기를 소홀히 하고 완고하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만든 교회에 남아 있음).
여섯째, 임종 시까지 회개하지 않음”

물론 둘째, 셋째, 다섯째는 개신교에 대한 반박이지만, 넷째는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하면 이해가 됩니다. 바리새인들(마태복음)과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왜곡하고 흠을 잡으려고 비난했죠?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반박했지만, 그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5. 가족의 사명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가족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 고난도 함께 받아야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의 사명, 상속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온전히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암 9:8b-10)

또한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시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또한 다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또한 상속자가 되어 주신 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어 다시는 멸하지 말며, 뽑히지 않는 진실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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