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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음을 솔직히 말하라사랑 (1)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20.02.12 17:48

문: 정의보다 더 훌륭한 것이 사랑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알려진) 새로운 의에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답: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문: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답: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이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3-48).

문: 이 요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이것은 어떤 한계를 폐지함으로써 율법을 최종적이고 최고의 형태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우리는 같은 친척, 같은 국민, 같은 인종,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에게 친절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들과는 도덕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율법은 여기서도 의무를 만들고 물론 의무를 신성화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정한 삶의 영역을 울타리로 둘러싸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증오로부터 그러한 삶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범위를 정하고 경계선을 긋는다. 그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같은 친척, 같은 국민, 같은 신도들은 굳이 말하자면 사랑의 대상이지만 낯선 사람이나 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미움의 대상이다.

문: 구약은 정말로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는가?

답: 분명한 표현으로 그렇게 말한 곳은 한군데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어땠는지가 중요하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특별히 민족의 적들에게 해당된다. 구약의 전쟁이야기와 복수를 기원하는 시편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사회의 법이요, 통상적인 도덕법이다. 적대관계에는 적대관계로, 나아가 보다 심한 적대관계로, 적대행위에 이자를 붙이고, 이자에 이자를 붙인 행위로 반응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특히 국제현실에서 이런 법칙이 통용된다는 것은 오늘날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인간은 인간에 늑대라는 데서 출발하는 정치이론도 있고, 모든 정치는 “적과 동지”라는 관점에 입각해 있으며 또 그런 관점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정치이론도 있다. 사람들이 증오를 찬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의 요구는 이와 반대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좀 더 나아가 통상적인 번역을 따른다면, 우리는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까지 한다.

▲ Käthe Kollwitz, 「Woman with Dead Child」(1903)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courtesy Ikon Gallery

문: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즉 아이, 아내, 형제, 자매, 친구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미워하고 헐뜯고 박해하고 우리에게 온갖 악행을 하는 사람들을 기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도덕적 이상향이요, 환상이며, 너무 높은 봉우리가 아닐까?

답: 이미 앞에서 무저항에 대해서 말할 때 언급했던 것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즉 원수 사랑을 피상적으로 혹은 환상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이 높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말씀이다. 이 말씀은 지상에서 적용되는 말씀이지 하늘에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는 있다. 즉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의 삶은 그분을 향하고 있다고 산상설교 전체에 적용되는 그런 기본 전제에서 원수사랑은 현실적인 말씀이다.

문: 그래도 원수사랑이란 늘 어려운 것이 아닌가?

답: 물론이다. 주일날 예배시간이나 그렇지 않으면 심적으로 고양된 어느 순간 원수사랑에 심취하여 “무사한 인간들아 사로 얼싸 안자.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고 외치기는 쉽다. 그러나 원수가 실제로 있는 현실 앞에서는 달라진다. 정말 끔찍한 것이 원수일 수 있다. 살인자보다 더 나쁜 것이 원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살인자는 신체만을 죽이지만 중상비방자는 영혼까지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상비방이란 교활할수록 치명적이다. 그런 원수를 너는 사랑할 수 있겠는가?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원수가 너 자신을 해치려고 할 때 설사 네가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수가 네 민족, 네 종교, 혹은 네 가족, 형제, 자매나 친구를 해치려고 한다면 너는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해도 되는 것인가? 오늘날 유태인이 그의 소중한 부모를 루브린으로 끌고 간 독일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중국인이 소이탄으로 그의 전 가정을 파괴한 일본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체코인인 체고의 전 마을을 포탄으로 폐허로 만들고 남자들을 쏴 죽이고, 여자들을 끌고 가고, 아이들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독일화”시킨 독일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체코 국민의 엘리트들이 철천지원수를 죽이는 것에 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들 중 수백명을 살해하고 명백히 체고 전국민을 살해코자 했던 독일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폴란드인도 그와 유사하게 자기 국민을 말할 수 없이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멸절시키고자 했던 독일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세르비아, 그리스 사람들은 독일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너는 네 누이, 네 딸을 더럽힌 자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해도 되는 것인가? 너는 그를 반드시, 당연히 미워해야만 하지 않는가? 네가 우연히 그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너는 그를 반드시, 당연히 죽여야 하지 않는가?

문: 당신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우리가 이처럼 어려운 예수의 요구에 직면 했을 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진실성이다. 예수의 요구와 연관되어서 많은 기독교적 위선이 있어 왔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친절하라는 것이 예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 명령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명령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예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이 매우 언짢아도 애써서 지킨다. 여기서 심각한 위선이 나온다.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런 기독교적 원수사랑은 솔직한 미움보다 더 불쾌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예수께서는 위선을 가장 싫어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 바로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면 네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고백하라.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거짓말을 둘러대지 말라는 것이다.

문: 그래도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답: 제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진실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치 못한 그리스도의 제자보다 낫다. 당연히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즉 네가 온갖 종류의 위선을 미워하는 한, 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제자이며 또 “나는 제자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며 원수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 적어도 어떤 경우에서나 그럴 능력이 없으며, 적어도 아직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너는 예수의 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문: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어려운 제자직의 과제를 완수할 수 있을까?

답: 우리는 먼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뜻하고 있는 원수사랑이 무엇이며 무엇이 원수사랑이 아닌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대단히 많은 원수사랑의 단순한 복제품, 대용품, 위조된 원수사랑까지 있어 왔다. 금과 은처럼 귀한 사랑 외에도 겉보기에만 금같이 보이는 많은 가짜 사랑이 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하게 원수사랑에도 적용된다. 그러면 예수의 의도에 의하면 무엇인 원수 사랑이며 무엇이 아닐까? 다음의 세 가지는 원수사랑이 아니다.

첫째, 원수사랑은 우리가 새색시나 아이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원수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사랑의 한 가지 형태이지만 자연스러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사랑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아, 모두 서로 얼싸 안자”는 의미의 열광적이거나 감상적일 뿐인 사랑의 태도가 있는데 이것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사랑이 아니다. 이런 류의 사랑은 예수에게는 낯설다. 또 이런 류의 사랑을 우리가 복음 안으로 으끌여 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의 방식, 예수의 사랑은 때에 따라서는 부드럽고 연약하기도 하지만 준엄하고 남성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늘 진실하고 순수하다.

거짓 사랑의 세 번째 유형은 그러나 더욱 더 나쁜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나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악은 사실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단지 늘 승인하고, 정당화하고, 미화하려 드는 저 평화주의와 중립주의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입에서 뱉어 내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사랑과 반대로 우리는 다름 아닌 분노를, 거룩한 분노를 외치고자 한다. 우리는 감히 말하건대, 전혀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전혀 사랑할 줄도 모른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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