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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들판의 씨알”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2.13 17:34
…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태복음 2:1~23)

“~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에 열 번 등장하는 성취인용구절이고, 그 중 세 번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언과 성취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 가족이 겪은 일이 구약에 그대로 예언되어 있었고, 그대로 일어났다고 보면 오해입니다.

15절에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러냈다는 선지자의 말씀은 호세아 11:1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이 말씀은 이집트에 종살이할 때, 하나님께서 불러내 나오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집트에 숨게 했다가 다시 나오게 하겠다는 예언이 아닙니다.

17, 18절은 예레미야서 31:15에 나옵니다. 이 역시 메시야를 죽이려는 학살 때문에 많은 아기들이 죽고 그로 인해 통곡하게 된다는 예언이 아닙니다. 신바벨로니아 왕국에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아파하는 눈물의 이야기입니다.

ⓒJerry Uelsmann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게 되리라는 말씀은 구약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구절에서 온 것인지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나실인에서 왔다는 관점도 있고, ‘가지’라는 뜻의 나지르에서 왔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사야 11:1에 나오는 이새의 한 가지가 나지르인데, 이것이 나사렛 사람의 유래라는 해석입니다. 아무튼, 나사렛이 고향이 된다는 구체적인 예언은 없습니다.

구체적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은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살핍니다. 예수님께서 어릴 적 겪으신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 뜻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듯이, 예수님의 가족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다는 깨달음입니다. 강대국에 잡혀가며 피눈물 흘리는 백성들, 주님께서 영아 살해의 처참함 속에도 구원을 이루고 계셨다는 고백입니다.

마태복음은 특히 모세에 빗대어 고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시고, 많은 아기가 살해당하는 이 모든 장면에서 구약의 모세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묘사하곤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듯이. 마태복음도 구약에서 알고 있던 모세를 통해 예수님을 묘사한 게 아니겠습니까. 모세처럼 예수님도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신 메시야셨다는 고백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의 성취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풀립니다. 만일 구체적인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라고 본다면, 위험합니다. 영아들의 처참한 죽음이 자칫 하나님의 계획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계획이자 뜻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함께 아파하고 싸우시며 구원의 뜻을 이루신 사랑이셨습니다.

오해와 왜곡의 위험은 지금도 목격합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하나님 계획하신 심판으로 보는 왜곡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환자는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징벌 받을 죄인으로 낙인찍히기 쉽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신앙의 이름으로 활개를 칠 수 있습니다. 질병과 고통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시고 치료를 위해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을 놓치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마음에서 반드시 붙잡아야할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열 번에 걸친 성취인용문은 마태의 중심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 뜻을 살피려는 의지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도 그 속에는 하나님 뜻이 분명 살아 숨 쉰다는 신뢰입니다.

겨울 들판이어도 분명 그 속에는 새 봄의 씨알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이루실 뜻을 살펴서 참여하는 길과 불안해하며 자신만 지키려는 길! 부디 마태복음 저자처럼 하나님 뜻을 밝히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밝히 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함께 가자고, 함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자고.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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