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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이기는 길하나님의 산(출 24:12-18; 벧후 1:16-21; 마 17:1-9)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2.26 17:51

< 1 >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시내 광야에 이르렀고(출 19,1), 하나님은 그의 종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 19,4-6)

이 언약은 십계명(출 20,2-17)과 여러 법규들로(출 21,1-23,33) 표출되었는데, 모세는 온 이스라엘 백성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선포했고, 백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출 19,8; 24,3).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시내산 꼭대기로 내려오셨고, 또 모세를 그 산 꼭대기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출 19,20). 모세는 그의 부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께서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 때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고 합니다(출 24,15-17).

그래서 그랬을까요, 후에 이스라엘을 침략한 시리아의 왕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산의 신’이라고 칭했습니다(왕상 20,23). 그러나 모세만 하나님을 산에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산은 대부분의 종교전통에서 신의 현현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약성서 전통을 살펴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모리아 땅, 주님이 알려주신 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창 22,2). 모세가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도 호렙 산인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곳이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5).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할 곳도 바로 그 산 위였고(출 3,12), 모세가 최후를 맞이한 곳도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 쪽에 있는 느보산의 비스가 봉우리였습니다(신 34,1).

산, 특히 높은 산이 신의 현현 장소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은 신이 사는 이상적 세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잇는 공간으로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높은 산의 정상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신이 자신을 계시하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생각된 것이지요.

또한 산은 종교체험의 상징적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격수양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자(知者)는 요수(樂水),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요산(樂山), 즉 어진 자는 산을 좋아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화시키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해 지혜를 배울 수 있고, 산은 움직이지 않으나 변하고, 변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니, ‘인’(仁)을 배울 수 있다는 뜻 아닐까요? 산은 단지 건강회복에 도움을 주는 등산이나 산책의 도구가 아닙니다. 산은 인생에 빗댄 수많은 교훈을 주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것이지요. 산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고, 언덕이 있으면 골짜기도 있듯이, 인생의 굴곡과 무욕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 2 >

산을 신 현현장소, 혹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특별한 공간으로 이해하는 전통은 신약성서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 전통적으로 시내산으로 알려진 예벨무사 ⓒGetty Image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악마에게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은 높은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 4,8-9)고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보석 같은 가르침이라는 산상수훈도 마태는 산 위에서 주신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마 5,1-7,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 위에 세운 마을처럼 숨길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선을 행하라고 하셨고(마 5,14), 수시로 홀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마 14,23). 수많은 기적을 보고 자기를 왕으로 모시려고 한다는 것을 아신 주님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 6,15)는 요한의 보도는 예수께서 ‘자주’, 그리고 ‘홀로’ 산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심으로써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으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힘을 산을 옮길만한 능력에 비유하셨고(마 17,20), 즐겨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 앉아 계셨습니다(마 24,3). 최후의 만찬 후, 병사들에게 잡히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 26,30).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으로 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고, 주님은 그 산에서 이른바 마지막 대위임령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6-20).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마지막도 모두 산에서 일어난 것이지요. 오늘의 설교 본문인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마 17,1). 이 높은 산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마가(9,2-13)와 누가(9,28-36)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두려운 일이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는 것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간을 초월하여 율법을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예언전통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스승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인물을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인물임을, 율법과 예언의 전통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은 확인한 것이지요. 예수님은 역사를 관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분, 이생과 내생을 오갈 수 있는 분,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시대는 율법과 예언이 말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시대임을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스승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놀라고 흥분한 베드로,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마 17,4)라고 말했습니다.

놀랍고 신비한 종교체험, 우리는 기꺼이 이런 체험을 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지속적으로 그런 체험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 위에서 머물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셨고,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 17,9; 막 9,9)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이 비록 그의 공생애를 산에서 시작하시고 산에서 끝내셨고,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도 산에서 행하셨지만, 신 현현 장소, 영적 체험의 공간으로서의 산 자체의 중요성에 그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와(마 16,21) 두 번째 수난 예고(마 17,22-23)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직전에 제자들에게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님에게 대들었습니다.’(마 16,21-22).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 16,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자신의 죽음을 처음으로 예고한 것에 충격을 받고 절망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이 마침내 영광의 길임을, 수난이 있은 후에 영광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다는 소망을 준 사건입니다. 지금 죽음의 길을 가는 스승이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좋아하는 아들이라고, 그 정체성을 하나님 자신이 확인해주신 분임을 깨닫게 해준 사건입니다(마 17,5). 이로써 예수님은 수난이 있은 후에 영광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음을 예고하신 것이지요. 고난 받지 않고서는 영광의 길이 있을 수 없고,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3 >

베드로후서는 서두에 저자가 자신을 시므온 베드로라고 밝혔고, 또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를 목격한 증언자처럼 서술하는 내용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저자라고 전통적으로 여겨졌지만, 학문적 연구에 의하면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베드로전서의 저자와도 다르고, 베드로를 존경하는 저자가 그의 이름을 빌려 주후 2세기 중엽에 쓴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주후 2세기 중엽의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한편에서는 교리가 확정되어 규범으로 수립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단 사설이 나타나 자기들의 거짓된 교훈을 하나님의 계시인양 가르치며 부도덕한 윤리적 행동을 부추기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로(벧후 1,16),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부인하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하고(벧후 1,20), 이단을 몰래 교회 안에 끌어들였습니다(벧후 2,1).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이니(벧후 3,4), 주님이 약속하신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벧후 3,13).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들의 욕망대로 사는 것이고(벧후 3,3),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있습니다(벧후 2,3). 그들은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며, 마음은 탐욕을 채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벧후 2,14).

이런 이단들, 거짓 교사들에게 위협받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후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지식을 강조합니다(벧후 2,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벧후 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벧후 1,8). 그리스도를 아는 바른 지식을 갖추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합니다(벧후 1,4-7).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는 믿음은 있는데 덕이 없는 사람, 덕은 있는데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은 있는데 절제가 없는 사람, 절제는 있는데 인내가 없는 사람, 인내는 있는데 경건은 없는 사람, 경건하기는 한데 신도간 우애가 없는 사람, 신도간 우애는 있는데 낯선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없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어디 그런 사람들만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 아니 그 지식을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데 악용하는 이단들, 거짓 교사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이단들, 거짓 교사들은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준동(蠢動)하지요.

< 4 >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19’ 확진 환자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데 ‘신천지’ 교인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여 새삼스럽게 ‘신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만희 교주(89세)가 1984년에 창설한 신천지를 한국교회는 이단이라고 규정했지만, 공식 명칭이 ‘신천지 예수증거 장막성전’이니, 80퍼센트 이상의 비그리스도인인 한국인들은 신천지를 기독교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신천지 교주이자 총회장인 이만희가 지난 20일에 신도들에게 전달한 ‘총회장님 특별편지’에서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 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입니다. 욥의 믿음과 시험같이 우리의 발전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씨로 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 모든 시험에서 미혹에서 이깁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종교의 언어가 아무리 신화적이라고 해도,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시대’, ‘인공지능시대’라는 우리 시대에 바이러스 감염사태를 마귀의 짓으로 보는 행태가 공존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가 하면 어느 순복음교회 소속 목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발흥하는 것이 국무총리 이름이 ‘정세균’이어서 그렇다고 발언했다는데, 도대체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말장난이라고 해도 심각한 명예훼손이자 현 사태를 지나치게 경솔하게 보는 소치이고, 무식의 극치라면 그 목사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더 걱정스런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와 목사를 싸잡아서 다 똑같은 집단으로 보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또 지금도 생명을 위협하면서 빠르게 지구촌으로 확산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 19’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 자체’인 것 같습니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균은 DNA와 RNA를 함께 가지고 있어 스스로 복제하지만, 바이러스는 숙주를 통해서만 복제 혹은 전파된다고 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온갖 유언비어와 가짜 뉴스를 생산하여, 위기를 돈벌이의 기회로 삼는 이들이 사회적 악성 바이러스이지요. 이들이 사회적 바이러스의 숙주(宿主)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초대교회 안의 악성 바이러스의 숙주는 이른바 ‘거짓 교사’, ‘이단’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의 하나는 특별한 종교체험을 절대시 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기를 절대화하며,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고 신비한 종교체험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비체험 없는 종교도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가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산꼭대기로 가는 것은 마침내 산 아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베드로, 산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 그것은 바로 이 변모 사건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였습니다. 놀라운 신비 체험과 영광이 빛나는 산꼭대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살해음모와 로마제국의 십자가형이 기다리는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는 것,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7). 제자들의 엎드러짐과 예수님의 일으켜 세우심은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이 모든 공포를 제거하시며 생명을 부여하시기 위해 어루만지신다는 것을 형상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길, 그것은 모세도 엘리야도, 어떤 율법도 예언서도 아니고, 오직 창조주이시며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 있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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