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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믿으라사랑 (3)
레온하르트 가라츠/신요섭 | 승인 2020.02.26 18:00

문: 하지만 원수가 나에게 입히는 손해는?

답: 네가 원수로 하여금 너를 해치도록 하지만 않는다면 원수는 너를 해칠 수 없다. 그는 결국 네게 봉사할 것이다. 모든 것이 틀림없이 좋게 될 것이다. 그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원수도 봉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믿으라!

문: 하지만 그것은 믿기 힘들지 않은가? 그것은 믿기 너무 힘든 경우가 많지 않은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있지 않은가?

답: 비내가 말했듯이 복음의 기준에서 보면 회복할 수 없는 것이란 없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놀라운 방법을 알고 계신다. 이것을 믿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확실하게 약속하신다. 믿기가 어려운 것일수록 믿음의 보상은 큰 것이다. 우리가 이런 기적조차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부활과 (나사로를) 다시 깨우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나 실제로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참조: 요한복음 11장 11절)

문: 이것은 우리가 원수에게 심판이 내리기를 빌 권리도 없고, 또 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유태인, 폴란드인, 체코인, 노르웨이인,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독일 사람에게 심판이 있기를 바래서는 안 되는가? 저들 독일인들이 그들의 행위로 그토록 끔찍하게 모독한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심판받게 되기를 바래서는 안 되는가? 그들을 그저 용서하고 죄를 사해주어야만 하는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저 심각한 오해인 듯하다. 사랑은, 진리도 그렇지만, 결코 정의를 포기해선 안 된다.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바랄 필요도 없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저절로 올 것이다.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그 확실성은-옳지 않은, 불타는-증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데 유익할 것이다. “복수는 내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신명기 32장 35절) 그렇다면 인간의 정의도 그의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의 정의가 증오와 복수에서 나온 정의여야 하겠는가? 세상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듯, 인간의 정의를 넘어선 어떤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의와 그에 따른 심판이 그만큼 필요해졌다는 것은 고통이기도 하지 않은가? 없어서는 안 될 그 정의를 넘어서 은혜도 당연히, 또 반드시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만약 은혜가 정의와 동시에, 또 정의보다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증오와 복수에서 나온 정의가 자기 자신을 태워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정의일 수 없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참된 사랑은,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최후의 결정권을 가진 것인 아닐까? 이 사랑이-제대로 이해된다면-세상의 구원이 아닐까?

▲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Getty Image

문: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답: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도 단지 이 가능성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하나님처럼 완전하라는 이 말에도 이 말을 그릇되게 과장하는 오해가 있는데, 이미 번역에서 우리를 오도하고 있다. 번역은 원래 이런 뜻이어야 한다. 즉 “너희들은 완성해야 한다. 제약받지 말아야 한다. 가장 높은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는 단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만 쓰여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늘 “완전”하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자면 그 자체가 아름답고 부러워할만한 모든 덕목들의 총화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극히 추상적인 것이다. 또한 전혀 기쁜 일도 아니다. 이런 포괄적인 완전이 우리의 노력의 목표가 아니고 단지 개개인의 완성이 우리의 목표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로서,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인 우리의 특성 속에서 우리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봄으로써, 그를 본받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율법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무제약성과 무한성만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것은 순결을 실천하는 데서도 그렇거니와 잔리, 정의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이야기되듯이)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현하는 데서도 그렇다. 이것은 산상설교 전체의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에서 혹은 단순한 도덕이나 종교, 자신의 힘이나 위대함, 거룩함, 자기의 사랑에서 자기가 나갈 방향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에게 자신의 방향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 마침내 쉬워지고 특별한 것은 당연하게 된다.

문: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목표에 늘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떤 큰 부족함이 생기지 않을까?

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는 말씀이 여기에도 유효하다. 그 부족함이란 하나님 나라의 전제 조전이 되는 저 가난을 뜻하는 것이다.

문: 예수의 이 요구도 역시 단지 사적인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답: 물론이다. 정말 옳다. 이 요구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에 속한 것이다.

문: 그와 함께 전쟁은 폐지될까?

답: 물론이다.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나간다면 그들은 서로 미워할 수 없을 것이며 서로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서로 간의 깊은 연결감과 상호간의 의무를 틀림없이 인식하고 느낄 것이며, 서로를 옳다고 인정하고 (그들이 정당한 것 이상으로) 서로 기뻐히기까지 할 것이다. 본능적인 대립과 이해관계에 따른 충돌, 적대심을 틀림없이 극복할 것이다. 평화는, 모든 평화는, 사회적 평화 역시, 이처럼 이해된 사랑에 근거한다.

문: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을까?

답: 물론이다. 그들은 마땅히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많지 않은가? 그들에게서부터,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및 그리스도의 나라와 함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이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문: 이제 “도덕의 혁명”은 남김없이 다 논해진 것인가?

답: 남김없이 다 논해졌느냐고?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밝혀졌을 뿐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로서,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의해 밝혀진 관점으로, 다른 모든 요구와 문제들을 독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광범위한 도덕의 혁명이요, 또 세상의 혁명이다!

문: 산상설교의 원리를 적용하는데서 예수의 윤리라고 할만한 것이 나왔는가?

답: “예수의 윤리”라는 말은 산상설교를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학문으로 변질시키는 것처럼 들린다. “윤리”라는 개념은 그 주제 자체도 그렇지만, 그리스에서 유래했으며, 세상으로부터,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윤리란, 율법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에게 했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폐쇄된 학문 체계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하지만 전적으로 그 나라에 직접 속해서 그들의 주님이요, 아버지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바로 이 점에, 율법을 폐지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고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율법을 폐지하며, 율법을 넘어서 하나님의 광대무변함을 보여주는 새롭고 보다 나은 의인 산상설교를 통한 도덕의 혁명이 있다.

레온하르트 가라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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