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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비참을 이야기 했을까하나님께만 영광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2.29 17:23

이어서 칼빈은 2권 1장 11절에서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진정한 겸손에 대해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낮출수록 주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시편 70편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우리 자신은 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를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II. ii.11).(박스)

중생을 통해 회복된 은사는 무엇이 있을까

한편의 은혜로운 설교를 듣는 것 같습니다. Soli Deo Gloria! 하나님께만 영광을!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이런 주장에 대해 많은 오해를 했습니다. 16세기는 인본주의적 분위기가 움트고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해가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표어가 당대 사람들에게 굉장히 거슬렸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기본적인 생각은, 그가 성경적인 토대 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하나님만을 우리가 높일 때, 그를 위해 진정으로 우리가 낮아질 때, 우리가 비하되고 비천하게 되고 헐벗게 되고, 하나님만 전부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정으로 내가 나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바로 그러한 흐름을 칼빈의 사고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싸워서 빼앗을 것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그 좋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낮춘다고 해서 아무 손해볼 일이 없고 수치스러울 일이 없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내세울 필요 없잖아요.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항복할 때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의 지성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할 정도로 항상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사람을 짐승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이성은 남아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인간에게 주셨던 은사들에는 ‘초자연적 은사들’과 ‘자연적 은사들’이 있는데, ‘초자연적 은사들’은 인간이 타락할 때 아예 제거되었고, ‘자연적 은사들’은 부패되었지만 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믿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던 이 초자연적 은사들은 단지 중생의 은총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자연적 은사들은 지성의 건전성과 마음의 성실성을 말하는데, 자연적 은사의 부패로 말미암아 지성은 건전성을 잃었고, 마음은 성실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II.ii.12).(박스)

물론, 칼빈은 사도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에 관한 지식, 진정한 의의 본성, 하늘나라의 비밀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력하지만(II.ii.13), “땅의 일”에 관한 지식, 즉 정치, 경제, 학문, 과학, 예술 등 인간생활의 제분야를 탐구하는 데는 참으로 예리하고 투철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II.ii.15). 또한 칼빈은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어떤 개인들에게 훌륭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사례를 들어 해명합니다(출31:2-11,35:30-35). 이러한 사실들은 “인간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모두 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II.ii.16)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칼빈은 18절에서 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이 무엇을 식별할 수 있는지, 그 지성의 한계를 다시 확인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 둘째,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호의, 즉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 셋째,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 특히 둘째 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라도,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는다면,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일순간 비치면 널리 사방을 보지만 한 걸음도 채 전진하기 전에 빛은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1:13)이라고 한다.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마16:17)였다(II.ii.18,19).

여기서 칼빈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개혁교회 신인식론의 매우 특징적인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려진다”는 것은 칼빈에게서 칼 바르트에 이르는 개혁교회 신인식론의 핵심입니다. 칼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사도 바울의 확언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의 교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 그러므로 성령의 비 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와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II.ii.20).

자연법, 인간의 양심

칼빈은 22절에서 영적 통찰의 셋째 요소, 즉 ‘자연법’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연법’이 양심의 형태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과연 자신의 행위를 규제하는데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로마서 2장14-15절을 예로 들어 양심의 진정한 목적은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데 있을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 판에 관해서는 전혀 무력하고, 둘째 돌 판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연적인 지각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라, 그의 고귀성과 의를 올바르게 찬양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고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라는 점들”(출 20:3-17)과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라는 것을 결코 조금이라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비참을 알게 한다. ⓒGetty Image

칼빈은 둘째 돌 판의 교훈들에 대해서는(출20:12 이하) 사람들이 좀 더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교훈들은 그들 사이에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일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고 주장합니다.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는 벗어 버릴 방법만 있다면 참고 견디는 것은 전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반적인 판단은, 이런 지배를 참고 견디는 것은 비굴하고 비열한 인간의 특색이며 체면을 아는 자유인은 이런 지배를 떨쳐 버린다고 한다. 철학자들도 받은 손상에 대하여 보복하는 것을 죄라 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과도한 교만을 비난하시며, 사람들이 수치라고 생각하는 인내를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육욕을 고려하지 않는데, 자연인은 정욕 이라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기도 전에 꺼져 버린다(II.ii.24).

그래서 칼빈은 다시 한번 우리가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윗의 고백을 사례로 제시하며 강조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119:10). 거듭나고 진정한 경건에서 적지 않은 전진을 한 다윗이었지만, 이미 받은 지식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매순간 계속적인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고백했다는 것입 니다.

의지의 부패

26절은 의지의 부패를 말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II.ii.12)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충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II.ii.27).

여기서 칼빈은 로마서 7장 18절 이하를 인용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이 구절을 가지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서로 다른 주장을 했고, 칼빈 당대에는 칼빈과 로마 신학자들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개혁교회 내에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펠라기우스, 세미-펠라기우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여기서 갈등하는 인간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은 이 사람이 바로 중생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이 중생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그가 자기 안에 아무 선도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육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첨부했기 때문이다(롬 7:18). 따라서 악을 행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안에 거하는 죄라고 한다(롬7:20). …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계속 칼빈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든든한 차꼬로 속받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II.ii.27).

여기 흥미로운 사실은 빌립보서 2장12절과 빌립보서 2장13절을 각각 좋아하는 교파적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12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감리교파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개혁파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구는 바로 이어지는 빌2장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신학적인 노선, 강조점의 차이가 좋아하는 성구도 각 각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칼빈이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계속 빌립보서 2장13절을 인용하고 주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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