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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현상, 더 무서운 사회적 바이러스시험을 이기는 길(창 3:1-7; 롬 5:18-19; 마 4:1-11)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3.04 17:54

< 1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 번역’ 구약성경은 모두 1,530쪽인데, 그 가운데 창조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를 포함하여 겨우 5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짧은 창조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고, 특별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생각을 규정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창세기에서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과학적 답을 할 의도도, 충분한 과학적 지식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질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제기하고, 그 답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신학적 관심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진화생물학이나 사회학적 관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고, 그 해석과 주장을 둘러싸고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많은 과학적 진실, 특히 지질학, 고고학, 인류학, 진화생물학 등이 쌓아온 엄청난 증거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지금도 창세기를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근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진짜 후손으로 생각합니다. 이른바 ‘창조과학회’는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6천년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과학자들은 46억년으로 계산하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빅뱅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가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설화, 그러나 유치한 옛 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다시 말해 ‘자유를 주는 동시에 파괴적이며, 인간 책임성에 대한 찬가이자 인간의 사악함에 관한 어두운 우화이고, 과감한 행동에 대한 찬사이자 폭력적 여성 혐오 선동’ 이야기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는 여러 시각이 있지만, 오늘 우리는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왜 뱀은 이브를 시험했는가? 인간은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가?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이후, 낙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합니다.

창세기는 뱀이 이브를 유혹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 신화에 의하면 뱀이 생명나무 열매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 인간을 먼저 유혹하여 눈이 밝아지게 한 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찾게 하여, 뱀 자신이 그 열매를 먹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중요한 것은 이브가 마침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지요. 신적 존재가 되는 것만큼 인간에게 강력한 유혹은 없을 것입니다.

▲ 사회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포비아 현상이 만연한다. ⓒGetty Image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창 3,7). 고대 교부들은 벗은 몸을 성적 욕망이 없는 상태, 타락 이전의 순수한 상태로, 벗은 몸인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을(창 3,10) 죄의 결과라고 추정했습니다. 하여 벗은 인간에게서 수치를 보았고, 성적 욕망을 원죄로 이해했고, 몸을 가린 무화과나무 잎을 ‘남근’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거의 대부분의 회화작품들은 아담과 이브가 성기를 가리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벗은 몸’은 원죄로서의 성욕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보호받지 못함’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옷의 원초적 의미는 보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에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던 것입니다(창 3,21). 그렇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인간의 타락과 실낙원 이야기의 초점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에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으나, 눈이 밝아져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처럼 된 자신이 아니라, 벗은 몸, 곧 보호받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본 것이지요. ‘보호받지 못함’은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이것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창 3,22)고 생각하시고, 낙원에서 추방하시지만,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한 인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이야기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 2 >

인간을 유혹하는 시험들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오욕’(五慾)이라고 말하는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도 거부하기 힘든 시험이지요. 그러나 ‘신(神)처럼 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시험이 아닐까요! 최초의 인간, 아니 인간의 원형인 이브와 아담을 유혹한 시험이 바로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 예수님도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받으셨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 곧 악마에 의해 시험받으셨는데, 첫째 시험은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고, 둘째 시험은 ‘거룩한 도성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하여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시험은 모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전제와 함께 제기됩니다. 다시 말해 이 두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이적을 통하여, 곧 경제적, 종교적 이적을 통하여 입증하라는 것이지요.

세 번째 시험은 아무런 전제 없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은 네게 주겠다.’고 합니다. 누가의 병행말씀에 의하면, 악마는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눅 4,6-7)고 했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자기 것이라고 악마는 주장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당하신 세 가지 시험, 그것은 모두 권력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경제권력,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종교권력,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소유한 정치권력이 그것입니다. 이 절대 권력이 예수님에게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험에 약하고, 유혹은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주님의 기도’가 1세기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과 대결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여 이 기도는 ‘로마의 폭력적인 지배에 폭력적으로 저항할 유혹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말도록’ 하나님께 요청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시련을 피하게 해달라는 간청이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유혹을 피하게 해달라는 간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악마로부터 받은 마지막 유혹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폭력을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그 왕국을 사탄의 왕국으로 받는 것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폭력적인 불의에 의해 세상 나라들을, 그 권세와 영광과 더불어, 얻고 소유하는 것은 사탄을 예배하는 것이고, 비폭력적인 정의에 의해서 세상나라들을, 그 권세와 영광과 더불어, 얻고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신명기 8,3; 신 6,16; 신 6,13) 개인적, 집단적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악마의 마지막 유혹, 폭력으로 세상 나라들을 그 권세와 영광과 더불어 얻고 소유하라는 시험을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비폭력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극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 3 >

사도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삶에서, 최초의 인간이자 모든 인간성의 전형인 아담의 범죄 행위와 죽음이 극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신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것이지요(고전 15,45).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나,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1-22). 첫 사람 아담이 악마의 시험에 들어, 죄를 지었고, 그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으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롬 5,19).

< 4 >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 40일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주일이자, 한국교회가 삼일절 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해마다 삼일절이 오면, 우리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스런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또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목숨을 잃은 순국열사들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조한 이른바 ‘친일파’들을 규탄합니다.

그러나 역경의 시대 후에 태어나 평온한 시대를 사는 세대들이 앞 선 세대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칭찬보다는 비난을,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하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손가락질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시대 이후의 세대에게는 그 시대에 대한 개인적 책임은 면제될지 모르지만, 역사적 책임으로부터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역사적 책임은 지금, 여기에서, 당대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입니다.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당대의 역사적 책임이지요.

일제의 식민지배 역사 가운데 특별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 사건입니다. 지진 때문에 십여 만 명이 사망하자, 조선인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 일본인 습격에 나섰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고한 조선인 수 천 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지요. 이른바 ‘조선인 포비아’였습니다. 특정 물건, 환경 또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불안장애의 일종으로, 극심한 공포 때문에 스스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특징을 포비아(phobia)라고 합니다. 중세 흑사병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린 ‘유대인 포비아’, ‘이슬람 포비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19’ 때문에, ‘중국 우한 포비아’, ‘신천지 포비아’, ‘한국인 포비아’ 등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적 바이러스’인 ‘포비아 현상’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는 우리 인류가 함께 죽든지, 아니면 함께 살든지 공동운명체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했습니다. 타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유혹은 매혹적이고 시험은 우리를 흔들어 놓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유혹과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돈이건, 종교적 카리스마건, 정치권력이건, 그것이 절대화 될 때, 그 유혹과 시험은 더욱 치명적이 됩니다. 그 유혹과 시험, 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악마의 것이고, 악마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눅 4,6)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런 유혹과 시련은 오직 말씀과 함께, 말씀을 힘입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 4,4)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마 4,7)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 4,10)

이 세 말씀 안에 모든 시험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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