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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와 김형직 그리고 고려혁명당북한 선교를 위해 꼭 알아야 할 주체사상 100문 100답(75)
정대일 연구실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20.03.05 02:34

Q: 해석 손정도 목사의 김형직 선생의 관계는 어떠했나요?_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2)

A: 지난 연재에서 해석 손정도 목사가 1920년대 후반기에 김성주(일성)을 그의 영향 하에서 보호하고 있었고, 바로 그 시기에 김성주(일성)는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가 1920년대 후반기에 김성주(일성)의 보호자가 된 것은 김성주(일성)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해석과 김형직은 1910년대부터 이미 숭실중학 동문으로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선생

김형직,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사이를 잇는 다리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이 생전에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고 하면서, 해석 손정도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감옥생활을 할 때 손정도 목사한테서 많은 방조를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한 전 기간 나를 친혈육에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이였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같은 학교(숭실중학교) 출신이라는 관념도 작용하였지만 그보다는 사상과 리념의 공통성이 아버지와 손정도를 뜨거운 우정으로 결합시키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생전에 손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손정도는 3.1운동직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림시정부에서 한동안 의정원 의장직을 맡아보았다. 한때는 상해에서 김구, 조상섭, 리유필, 윤기섭 등과 함께 무력항쟁을 담당할 군사인재양성의 사명을 띤 로병회를 조직하고 그 단체의 로공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로병회가 해체되고 림시정부 내부에서 파벌투쟁이 심해지자 그에 환멸을 느끼고 길림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길림에 와서는 례배당을 하나 꾸려놓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가 대중교양장소로 널리 리용하고 있던 례배당이 바로 그 례배당이였다. 원래 손 목사는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길림의 기독교신자들과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 신자들 속에는 손정도처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도를 드려도 조선을 위한 기도를 드리였고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여도 망국의 불행을 덜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신앙심은 항상 애국심과 련결되여 있었으며 평화롭고 화목하고 자유로운 락원을 건설하려는 그들의 념원은 시종일관 나라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쟁에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천도교와 불교계 신자들의 절대다수도 애국자들이였다.

손정도 목사와 김형직의 공통분모, 단재 신채호

김일성은 해석과 김형직의 우정이 ‘숭실중학 동문’이라는 관념보다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해석과 김형직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던 ‘사상과 이념’을 헤아리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단재 신채호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해석과 김형직이 공통적으로 존경하고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석과 김형직이 공유했던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을 짐작할 수 있는 단재의 사상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로선상으로 보면 신채호는 무력항쟁의 제창자였다. 그는 리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다같이 현실성 없는 위험한 로선이라고 보았으며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게 된 정황에서 우리 2천만 민중은 하나가 되어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일부 인사들이 리승만을 상해림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해 나선 것도 평소부터 리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리승만은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것은 그가 림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림시정부를 탈퇴한 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도 리승만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이따금씩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신채호는 성미가 면도날 같고 주장이 무쇠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리승만을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탄핵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신채호의 말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었다. 단재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채호와 함께 림정을 결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발언을 참고해보면 손 목사의 정견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치론도 위임통치론도 다같이 망상이라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의 립장을 취하였으며 대중을 동원하여 거족적인 항쟁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우리의 전민항쟁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런 혁신적 립장은 그로 하여금 리승만과 같은 사대주의자, 야심가가 수반으로 군림하고 있는 상해림시정부에서 각원으로 남아있을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게 하였으며 결국은 림정과 결별하고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용단을 내리게 하였던 것이다.
손 목사는 길림에 온 후 일본경찰들이 ≪제3의 세력≫이라고 규정한 혁신파 인물들과 련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새 세대의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었으며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의를 다하여 후원해 주었다. 그가 교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문 밖의 례배당은 우리의 전용집회장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례배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 손정도 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김일성은 해석이 단재의 ‘무력항쟁 노선’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남측의 학계에서는 해석의 사상을 주로 도산 안창호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왔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회상에 의하면, 해석은 도산의 ‘실력양성론’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반신반의’했으며, 오히려 단재의 ‘무력항쟁론’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는 것입니다.

▲ 숭실중학 재학 당시 학생 시위를 이끄는 김형직 선생.

김형직 또한 독립운동에 나선 초창기부터 무력항쟁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그가 주도적으로 결성한 ‘조선국민회’ 역시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력으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무력항쟁 노선’을 표방하였습니다. 해석이 1912년 진도 유배형을 받을 때의 죄목이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918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된 김형직 역시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처럼 단재와 해석, 그리고 김형직의 노선이 ‘무력항쟁’의 기치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정도 목사와 고려혁명당

1918년 일제에 의해 체포된 조선국민회 회원은 대부분 기독교계 인사였으며, 하와이계와 만주계를 제외한 국내계는 거의 모두가 다 숭실중학 동문들이었다는 점에서 해석과 조선국민회 사이에서도 일정한 사상적 유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인 유대에 기초하여 해석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방향의 전환을 모색하던 김형직과 연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김성주(일성)를 친아버지의 사랑으로 지지하고 보호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석과 김형직의 유대는 1926년 고려혁명당 결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925년부터 김형직은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영도할 수 있는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면서 해석과 재회하게 됩니다. 북측에서 발간한 김형직 선생의 전기는 이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형직 선생님께서는 길림에 머무르시는 기간 당시 길림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정도 목사와도 만나시였다. 손정도 목사는 한생을 반일애국사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량심적인 독립운동자였다. 손목사는 길림에서 교직자의 간판을 가지고 혁신계 인물들과 함께 시대의 변천에 순응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전환과 애국력량의 단합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김형직 선생님께서는 이미 손정도 목사와 구면관계였다. 선생님께서는 평양숭실중학교에 다니실 때부터 손정도 목사를 잘 알고 계시였다. 선생님께서는 출옥 후 중강에서 활동하실 때에도 오동진과 함께 손정도 목사와 련계를 가지고 있었다.
김형직 선생님께서는 이런 친분관계가 있고 또 영향력 있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온 손정도 목사와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전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시고 독립운동대렬의 단합과 관련한 귀중한 말씀을 하시였다.

이 전기는 해석과 김형직의 만남이 있은 지 1년 후인 1926년 4월 5일에 국내에서 온 천도교 혁신파 대표와 형평사 대표, 연해주에서 온 대표들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현금의 사유재산제도를 소멸하고 현존한 국가조직을 철폐하여 공산제도에 의한 세계 단일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혁명당의 의의에 대해서는, ‘고려혁명당이 창건됨으로써 만주일대의 반일독립운동단체들과 자치조직들에 대한 정치적 령도기관을 가지게 되였으며 반일독립운동대렬의 단합을 이룩하며 전반적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방향전환의 길을 따라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정치적 령도조직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석이 고려혁명당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고려혁명당의 주요 인사들인 양기탁, 오동진, 장철호, 양세봉, 최동오, 김시우, 김사헌, 현정경 등과의 친분관계를 고려할 때, ‘바다 돌’이라는 그의 호처럼 드러나지 않게 민족유일당으로 창건된 고려혁명당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고려혁명당 선언문 표지

해석 손정도 목사는 김성주(일성)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과 지연과 학연을 같이 하는 세상적 인연에 더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애국심을 공유함으로 인하여 한 차원 더 높은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의 사상은 민족주의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에로 방향을 전환한 김형직의 사상 궤적과 유사하게, 말년으로 갈수록 ‘혁신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석은 김형직과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기반한 ‘동지적 애정과 의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김형직 사후 그의 장남인 김성주(일성)를 ‘친아버지의 사랑’으로 맡아 3년 동안이나 보호하고 돌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대일 연구실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jungsc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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