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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가르침: 진리파지(眞理把持)『다석 강의』 21강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20.03.10 16:25

이 강의에서 다석은 자신에게 일식(一食)의 삶을 가르쳐 준 간디의 진리정신을 주제로 내걸었다. 1948년 1월 30일에 서거한 간디의 삶을 추모한다는 말을 듣고 단식 중에 있던 다석이 9주기를 맞는 1957년 같은 날에 간디의 ‘진리파지’에 대해 강의 한 것을 풀어 적은 것이다. 1869년 10월 2일에 출생하여 1948년 1월 30에 죽은 간디의 산 날 수가 28608일, 살았던 주(週)수가 4087주, 월수가 969월 그래서 78세 남짓 살았다고 계산해 놓았다.

일외무타(一外無他)라는 한시도 같은 날 『다석 일지』에 수록되어 있다.

< 1 >

단식 하던 중에 힘겹게 연경(硏經)반에 나왔는데 학생을 비롯하여 7명이 참여 한 것을 보고 다석은 감격하여 강의를 시작했다. 7명, 그의 명성에 비해 참으로 적은 숫자였으나 다석은 감사했고 이들을 위해 열심히 강의했다. 숫자에 연연하는 오늘 추세에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신 재직 시 고 김흥호 선생께서 강의 전 이른 시간 연구실로 필자를 불러내어 독대하며 가르쳐주신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때는 정초, 새해 첫 달 중이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즐겁게 지내는 이 시기에 다석은 단식을 했던 모양이다. 소화제를 먹을 정도로 과식, 탐식하며 이 시기를 사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먹을 것이 없어 자기 목숨을 끊는 이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였다. 이 세상이 유기체로서의 역할을 못한 탓으로 여겼다. 유기체가 고장 났기에 한 부분이 망가져도 다른 쪽이 그 아픔을 알아채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나’란 존재가 누군지를 모르고 산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하느님도, 부자지간도, 부부, 형제관계도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다석은 ‘나’를 알기 위해 다시 단식에 돌입한 것이다. 자신도 자신을 모르기에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단식 중 떠오른 생각이 있었기에 다석은 자신에게 일식(一食)을 가르쳐준 간디를 주제로 이날의 강연을 시작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디를 기념하는 일로 분주한 것에 못마땅하였다. 모두가 그처럼 살 생각이 없는 까닭이다. 자신이 간디뿐 아니라 예수, 공자, 부처를 말하는 것은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냈던 제소리를 배워 익히고자 함이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간디의 살괴 피를 먹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를 위해 단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 몸을 고생시키는 단식은 다석에게 자기 피를 마시고 자기 살을 먹는 일이었다. 이로써 예수, 간디의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런 뜻으로 다석은 간디가 세상 떠난 날을 앞두고 단식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진리파지(眞理把持)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 2 >

다석은 진리파지(眞理把持)를 다음 다섯 글자로 풀었다. 외(畏), 진(眞), 선(善), 의(義), 논(論)이 그것이다. 간디 이름 앞에 붙은 마하트마(Mahatma)는 ‘큰 혼(魂)’이란 뜻이다. ‘참’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해야만 세상 일이 바르게 된다는 의미겠다.

우선 참(진리)을 전하는 사람은 무서운 것(畏)이 없어야 한다. 세상 살면서 무서운 것 없는 사람은 참을 꽉 붙든 사람이다. 다음으로 진(眞)은 하나, 곧 하느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경우 하느님이란 말을 쓰지 않으나 붓다 역시 참이고 하나일 뿐이다. 진리가 바로 하느님이라 믿는 것이 불교다.

참 하나가 가장 두렵고 무섭다. 이것 외에는 세상서 무서울 것이 없다. 세상에서 두려운 것이 없다는 확신은 이 참 하나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참)가 으뜸이고 외(畏)는 그 다음이라 하겠다. 예수도 오직 하느님만을 두렵게 여기라 했다. 그가 바로 참이기 때문이다. 참(진리)을 두려워하며 살자는 것이 종교이다. ‘참’ 그것 하나만 붙들자는 것이 종교적 삶이겠다.

이어지는 다음 말은 선(善)이다. 다석은 이것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었다. 독사와 맹수일지라도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이들 역시 세상 속 피조물로 존재하는 까닭이 있다고 믿은 것은 것이다. 저마다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갖고 태어난 까닭이겠다. 이점에서 불살생(不殺生)을 선이라 말할 수도 있다. 험한 세상도 미워 말라고 한다. 스스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만큼 선은 무조건적이다. 사랑의 극치라 말해도 좋겠다.

다음으로 의(義)를 말했다. 이것은 불사(不詐), 마음에 거짓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한다. 나다나엘을 향한 예수의 평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상태라 할 것이다. 악마와 그리스도가 함께 섞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 마음이 없는 상태라 하겠다.

간디는 이렇듯 5가지 조목을 내걸고 당시 영국 지배 체제에 항의 헸으며 불의와 맞섰다. 무저항으로 저항한 것이다. 노자가 말하듯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경지에서 싸웠다 하겠다. 함께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은 세상이 무서워진 탓이다. 그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일 뿐이다. 우리들 싸움은 선(善)을 위한 투쟁이기에 악을 무력화시키면 된다. 참인 하나가 있기에 악은 질 수밖에 없다.

< 3 >

다석은 이제 동일한 맥락에서 자작시 “일외무타”(一外無他)를 풀이했다.

‘세계집멸방’(世界集滅方). 세상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사라지는 과정 속에 있다. 하여 세계를 집멸(集滅)의 방(方)이리고 일컬었다. 역사도 이와 같다. 헤어져야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역사이다.

“천도성명시”(天道誠明時). 여기서 천도는 하나인 참을 말한다. 진리 자체인 하나가 밝아(혀)져야 할 때란 뜻이다. 집멸방의 세상에서 ‘하나’가 밝아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맹애요마색”(盲愛幺麽色). 색(色)은 물체를 일컫는다. 온 우주자연이 색, 곧 빛깔로서 물체인 것이다. 많이 화려해보여도 있다 없어질 것(生滅)이기에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할 때 종종 두려워 질 것이다. 우리들 눈이 어둡게 될 경우 색물(色物)에 미혹되기 때문이다. 요망한 색(色)에 대한 사랑, 집착을 맹애(盲愛)라 하였다.

“역궁객기혼”(役躳客氣昏). 이렇게 되면 몸은 혹사당하고 기(氣)조차 혼미해진다. 객기가 어두워져 나쁜 일들이 거듭 발생하게 된다. 탐진치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그로써 세상은 더욱 더럽고 캄캄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새벽오기를 바랄 것이나 더디 올 뿐이다.

“첨모절대공”(瞻慕絶大空). 절대 빈 곳, 허공을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절대 공, 이것은 ‘없이 있는’ 텅 빈 공간을 적시한다. 이것만이 참이고 하나이다. 허공 없이 존재(실존)없고 진실 또한 없다. 물건과 물건, 심지어 세포와 세포사이, 원자와 원자 사이가 모두 허공의 일부 인 까닭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허공 탓에 존재한다. 이 허공 사이에 잠시 빛이 지나가는 것이 색(色), 곧 물체일 뿐이다. 주지하듯 기독교와 달리 불교가 허공에 대해 더 많이 강조해 왔다. 있음이 곧 없음이란 가르침 말이다. 기독교 역시 이 가르침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체신자기단”(體身自己旦). 자기 몸을 단련시켜야 자신만의 아침이 오는 법이다. 우리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뜻이다. 새벽 오기를 바란다면 체신(體身)의 길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궁극적 믿음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절대자하강”(絶大子下降). 허공 안에서 하나의 절대자가 바로 ‘나’이다. 허공우주의 독생자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자신을 절대자의 하강으로 믿고 알고 깨치는 것이 가장 근본적 사안이다. 그래서 다석은 예수만이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독생자인 것을 믿으라했다.

“호천부상달”(號天父上達). 자신이 허공의 아들인 것을 알아야 한웋님(하나)을 부르며 나갈 수 있다. 하나에 이르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허공인 하늘이 그의 오도송처럼 나를 차지하고 나를 맡을 수 있다. 내가 허공을 점령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비로서 내 삶의 새벽이 동터올 수 있다. 이런 삶을 살고자 종교가 있는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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