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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 김일성의 생명을 구하다북한 선교를 위해 꼭 알아야 할 주체사상 100문 100답(76)
정대일 연구실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20.03.12 16:36

Q: 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의 관계는 어떠했나요?_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3)

A: 지난 연재에서는 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의 관계는 사상과 이념의 공통성에 기초한 동지적 관계였습니다. 이에 따라 해석 손정도 목사는 김형직 선생에 대한 동지적 사랑과 의리를 그의 장남 김성주(일성)을 돌보는 것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해석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일성)의 인연과 관계를 직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김성주(일성)의 실망

1918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형직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강으로 거처를 옮습니다. 그리고 다시 1919년 3.1 독립투쟁 이후 중강에까지 감시가 심해지자 그 해 5월 솔가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쪽 임강에 정착하게 됩니다. 1923년 김성주(일성)는 ‘조선혁명을 하려면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 김형직의 뜻에 따라 조선으로 들어가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교장으로 있는 칠골의 창덕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듣고 1925년에 다시 만주로 나왔습니다.

▲ 김일성 주석 기념관으로 만든 길림육문중학교 도서관 정면 풍경

김형직은 국내 압송 도중 탈출하였고, 길림에서 민족유일당 건설에 매진하다가 ‘고려혁명당’을 결성한 직후인 1926년 6월 5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형직으로부터 장남 김성주(일성)의 교육 문제를 유언으로 부탁받은 김형직의 친구들은 상의 끝에 김성주(일성)에게 화성의숙 입학을 권유하였습니다. 화성의숙은 정의부의 무관학교였습니다. 살아생전 김형직의 노선이 무력항쟁 노선이었기에, 그 장남에게 무관학교 입학을 권유한 것입니다. 송암 오동진은 당시 화성의숙 숙장이었던 최동오에게 소개신을 넣어 김성주(일성)의 입학을 도왔습니다.

김성주(일성)는 부푼 기대를 안고 그 제안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의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1925년 초에 세운 정의부소속의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다.
민족재생의 출로를 실력배양에서 찾은 독립운동자들과 애국적인 계몽활동가들은 일반학교의 설립과 함께 군사인재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무관학교의 설립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만주각지에는 신흥강습소(류하현), 십리평사관학교(왕청현), 소사하훈련소(안도현), 화성의숙(화전현)을 비롯한 여러 개의 무관학교들이 일어섰다.
이 무관학교설립운동에서는 량기탁, 리시영, 오동진, 리범석, 김규식, 김좌진과 같은 독립운동의 거두들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성의숙의 입학대상은 정의부 산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였다. 우에서 입학생수를 쪼개여 내려보내면 중대별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보냈는데 2년 동안의 학습과정을 마치면 성적에 따라 새 직급을 주어 출신중대에 되돌려보내였다.
… 오동진은 의산 최동오 선생한테 소개신도 보냈으니 화성의숙에 가라, 화성의숙에 가서 군사를 배우는 것이 네 포부에도 맞을 것이다, 입씨름으로는 독립을 못한다는 거야 너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냐, 학교를 졸업하면 그 후의 전도문제는 우리가 책임지고 돌봐줄테니 의숙에 가서 마음껏 공부하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친우들은 장차 나를 자기들의 대를 이을 후비인재로 키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독립군지도자들이 후비육성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인재양성을 중시한 것은 좋은 일이였다.
나는 오동진의 제의에 쾌히 동의하였다. 나의 전도를 그렇게도 살뜰히 걱정해주는 독립운동자들의 진정이 참말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무관학교에 보내여 독립운동인재로 키우려는 그들의 의도는 일생을 조국해방위업에 바치려는 나의 지향에도 부합되는 것이였다. 군사적 대결에 의해서만 일제를 타승할 수 있고 군사를 알아야 독립운동의 전렬에 설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의 나의 견해였다. 이제는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나는 화성의숙을 반일독립투쟁의 활무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화전으로 떠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성주(일성)의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김성주(일성)는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방향을 전환한 부친 김형직의 영향으로 막연하나마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있었는데, 화성의숙은 민족주의 이외의 사조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화성의숙의 사상적 분위기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내가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아직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다. 나의 세계관은 맑스-레닌주의를 자기의 리념으로 완전히 삼을만큼 원숙한 단계에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내가 공산주의를 지식으로 섭취한 것이 있었다면 무송에서 『사회주의대의』와 『레닌의 일생기』라는 소책자를 읽은 것뿐이고 사회주의 리념이 실현된 신생 쏘련의 발전모습을 풍문으로 들으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끝없이 동경하였을 뿐이다.
내 주변에는 공산주의자들보다 민족주의자들이 더 많았으니 고장을 옮길 때마다 내가 다니던 여러 학교의 선생들은 공산주의사상보다 민족주의사상을 더 많이 고취하였다. 우리는 새 사조에 의해 교체될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반세기이상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포위 속에 있었다.
… 얼마 안 되여 화성의숙의 교육은 점차 나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였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세운 학교이고 아버지의 연고자들이 주관하고 운영하는 학교이지만 나는 여기서 전 세대가 남긴 사상과 방법에서의 낡은 잔재를 발견하게 되였다.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력사가 수 십 년 되지만 의숙의 교육에는 그것을 집대성하고 비판적으로 분석총화하는 리론이 없었다.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은 수 십 년 동안이나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해오면서도 그 운동의 지침이 되고 교훈이 될 만한 론문이나 교과서 하나 똑똑히 만들어놓지 않았다. 화성의숙에 찾아오는 독립군의 거두들이나 애국지사들도 그저 막연하게 연탁을 두드리며 독립하자고만 부르짖었다. 혁명력량은 어떻게 편성하고 대중은 어떻게 동원시키며 독립운동대렬의 통일단결은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도 없었고 무장투쟁의 교범이나 전술 같은 것도 변변치 못하였다. 조선력사과목은 왕조사본위로 엮어져있었고 세계혁명사도 부르죠아혁명사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화성의숙에서 배워주는 것은 민족주의사상과 구한국냄새가 나는 낡은 군사훈련 뿐이였다.
민족주의사상에 깊이 물젖은 선생들이 비록 반일과 민족적 독립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투쟁방법은 뒤떨어진 것이였다. 학교당국은 전투경험이 있는 독립군대원들을 데려다가 무훈담을 자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 무훈담을 통해서 고취하는 것은 안중근, 장인환, 강우규, 리재명, 라석주와 같은 렬사들이 적용하였던 개인테로의 방법이였다.
… 나를 제일 실망케 한 것은 화성의숙의 사상적 락후성이였다. 학교당국이 민족주의 외통길로만 나가면서 다른 사상은 다 경계하다나니 학생들도 자연히 그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화성의숙에는 왕조정치에 미련을 가지거나 미국식 민주주의에 환상을 가지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런 경향은 세계혁명사 과목의 학과토론시간에 제일 우심하게 나타났다. 선생의 지명을 받은 학생들은 강의시간에 취급된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해 옮기면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하여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들의 그 교조적인 학습태도에 나는 불만을 금할 수 없었다. 화성의숙의 정치과목 수업에서는 조선독립과 조선의 민중이라는 산 현실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다. 그저 교과서나 교수요강에 제시된 내용들을 기계적으로 배워주고 받아낼 뿐이였다.

화성의숙을 떠나 육문중학으로

화성의숙의 사상적 낙후성에 실망한 김성주(일성)가 택한 길은 화성의숙을 떠나서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학교로 배움의 장을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김성주(일성)는 1927년에 길림 육문중학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길림시절에 그는 해석 손정도 목사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김성주(일성)가 화성의숙이 소재한 화전을 떠나 난생처음 가보는 생소한 길림으로 가면서 지니고 간 수첩에는 길림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의 명단과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수첩에 적힌 이름들은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현익철), 고원암, 박기백, 황백하 등이었습니다. 김성주(일성)는 송암 오동진을 제일 먼저 찾아갔고, 오동진은 그날 오후 김성주(일성)를 삼풍여관으로 데려가 길림지역 독립운동자들과 만나게 하였습니다.

이 삼풍여관은 태풍합정미소와 함께 길림에서 독립운동자들이 숙박소 겸 연락장소로 이용하는 2대 거점이었습니다. 이 여관주인은 해석 손정도 목사의 동향인이었습니다. 그는 평안남도 중산에서 살다가 손정도 목사의 권유로 길림에 들어와 삼풍여관을 운영하였습니다.

간판은 여관이지만 기숙사나 공회당과 같은 인상을 더 주는 집이었다고 합니다. 해석이 길림지역에서 묵묵히 ‘바다 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삼풍여관은 훗날 본격적인 공산주의 운동에 나선 김성주(일성)도 자주 이용하는 활동거점이 됩니다.

김성주(일성)가 화성의숙을 떠나 길림으로 올 때 소개신을 써 준 사람은 정의부 산하 화전총관소의 총관이었던 김시우였습니다. 그는 정의부 소속 총관이었으나, 원래 김형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공산주의로의 방향전환에 함께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화성의숙 시절 김성주(일성)에게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제공해주었던 인물입니다.

김시우의 소개신에는 김성주(일성)의 내력과 함께 사상적 지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길림의 김사헌은 화전의 김시우가 보낸 소개신을 보고서, 자신이 알고 있는 조선사람인 김강이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는 길림육문중학교를 추천하였습니다. 당시 길림육문중학교 교장인 이광한은 주은래의 중학시절 동창이었고 민족주의 좌파에 속한 양심적 인사였습니다.

또한 교원들 중에는 중국 공산당과 관계가 있는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김시우의 소개신을 받은 김사헌이 김성주(일성)에게 길림육문중학을 추천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김성주(일성)의 ‘혁명적 세계관’이 형성되게 됩니다.

따라서 해석으로 대표되는 ‘김형직의 친구들’인 길림의 독립운동자들이 김성주(일성)를 길림육문중학교로 편입시키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단순히 도움을 베풀었다는 말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김형직의 친구들’은 살아생전 김형직의 방향전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며, 고인의 유지를 이어가는 방향에서 가장 좋은 진로,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진로를 그 장남인 김성주(일성)가 택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는 김형직 선생의 장남인 김성주(일성)가 부친의 방향전환을 계승하여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며 보장하고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해석 손정도 목사의 지지와 격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손정도가 류길학우회 고문이였으므로 나는 그와 자주 상종하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이 분하고 애석하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을 위해 투신하라고 격려하군 하였다.
내가 길림에 와서 육문중학교에서 3년 동안이나 공부할 수 있은 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의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였다.
손정도 목사는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겨우 유지되여 가는 우리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나에게 학비를 여러 번 보태주었다.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명절 때면 그 부인이 나를 청해다가 조선식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주었다. 그 집에 가서 먹던 토끼고기를 넣은 두부지지개와 쫀드기떡이 참말로 별맛이였다. 쫀드기라는 풀은 잎에 보드라운 털이 난 것이였는데 냄새도 없고 독도 없었다. 손목사의 집에서는 평양에 있을 때부터 그 풀로 떡을 해먹었다고 하였다. 그날 내가 목사의 집에서 먹은 떡은 북산공원에 가서 뜯어온 쫀드기로 만든 것이였다.
손정도에게는 아들 둘에 딸 셋이 있었다. 길림에서 우리의 운동에 관여한 것은 둘째 아들 손원태와 막내딸 손인실이였다. 손인실은 그때 황귀헌, 윤선호, 김병숙, 윤옥채 등과 함께 조선인길림소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내가 청년학생운동을 할 때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나의 심부름을 많이 들어주었다.

손정도 목사, 김성주(일성)를 구하다

▲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도서관의 김일성 주석 항일기념관에 세워진 김일성 주석 중학시절 모습의 동상과 사진

해석 손정도 목사가 결정적으로 김성주(일성)의 ‘생명의 은인’이 되는 사건은 1929년에 일어났습니다. 김성주(일성)가 이끌던 비밀독서회 조직이 발각되어, 김성주(일성)가 중국 군벌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감옥에 수감된 것입니다. 이 때 해석 손정도 목사는 장작상과 장학량을 비롯한 중국 군벌들에게 백방으로 손을 써서 1930년 5월 초에 김성주(일성)를 석방시키게 됩니다.

김성주(일성)가 석방된 바로 같은 달인 1930년 5월 30일에 길림에서는 5.30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만약 해석 손정도 목사가 제때에 손을 쓰지 못해 김성주(일성)의 석방이 조금만 늦어졌더라면 악화된 정세에 의해 김성주(일성)의 형량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 다음 해인 1931년 9.18사변까지 옥중에 있었더라면 만주를 집어삼킨 일제에 의해 장기 구금되어 영영 항일무장투쟁에 나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애 말년의 김일성은 해석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 박사와 해후하면서 해석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손 목사는 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손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중국반동군벌에 체포되여 감옥에 갇혀있을 때 나를 빼내기 위한 구출운동을 적극 벌렸습니다. 선생도 생각나겠는지 모르겠지만 1929년 가을에 길림시에서는 큰 학생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학생사건으로 하여 길림 제5 중학교와 제1 중학교, 길림육문중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여 길림감옥에 갇혔습니다. 내가 중국반동군벌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 갇힌 것도 바로 그 학생사건 때문이였습니다. 그때 길림감옥에 갇힌 학생들은 대부분이 중국인학생들이였는데 제5 중학교 학생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 나는 혁명동지들의 적극적인 투쟁과 손 목사를 비롯한 진보적 인사들의 도움으로 길림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의 아버지는 내가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어떻게 하면 구출하겠는가 하여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손 목사는 우리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나를 감옥에서 구출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손 목사는 나를 빼내기 위하여 장작상과 장학량을 비롯한 중국 길림성정부와 길림독군서의 실권자들과 교섭도 많이 하고 그들에게 돈도 많이 먹였습니다. 장작상과 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의 실권자로서 군벌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당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장작상은 코대가 센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일제놈들이 남만철도를 가로타고앉아 전횡을 부리자 그것을 리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길림에서 봉천까지 철길을 따로 놓았습니다. 장학량은 장작상의 조카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작림이 베이징에서 동북으로 들어오다가 일제가 조작한 렬차폭파사건으로 죽었으므로 일제를 몹시 증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작상, 장학량과 교섭을 잘하면 국민당과 일제특무기관에서 주목하는 대상도 감옥에서 빼내올 수 있었습니다.
손 목사가 나를 빼내기 위한 운동을 벌리는 데는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진한 학생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감옥에서 빼내는데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손 목사는 장작상과 장학량에게 김성주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보증한다, 그는 학생사건련루자들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로 취급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에는 박일파의 아버지와 고원암, 김사헌, 오상헌, 오인화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참가하였는데 손 목사가 주동적인 인물이였습니다.
… 1930년 가을에 오가자에 있으면서 황수전을 비롯한 학생사건관계자들이 다 석방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그때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5. 30폭동련루자들과 같이 있었더라면 큰일날번 하였습니다.
나는 길림감옥에서 나온 다음 그곳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재미없을 것 같아 인차 돈화로 갔습니다. 내가 돈화에 있는 고재봉의 집에서 쇠약해진 몸을 추세우기 위하여 치료를 하고 있을 때 5. 30폭동이 일어났습니다.
5. 30폭동은 소위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하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저들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으킨 좌경모험주의적 폭동이였습니다.
… 내가 5. 30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감옥에서 나온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후 일제놈들은 만주를 강점하자마자 길림감옥에 가서 나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이미 감옥에서 나간 것을 알고는 한발 늦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때 내가 손정도 목사를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지 못하고 감옥에 한 1년만 더 갇혀있었어도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갔더라면 큰 죄는 없었지만 김형직의 아들이라고 하여 한 10년동안은 감옥생활을 시켰을 것이며 그렇게 되였더라면 나는 항일무장투쟁을 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손목사를 은인으로 생각하면서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해석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한 이유는, 단지 해석이 김성주(일성)의 육체적 생명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생명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석이 제때에 김성주(일성)의 석방을 이끌어내지 않았다면, 김성주는 항일무장투쟁에 나서지 못하였을 것이며, 북의 역사에 김일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해석 손정도 목사는 ‘김성주’의 ‘육체적 생명’도 구하였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김일성’의 ‘사회정치적 생명’도 구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말년의 김일성은 해석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해석 손정도 목사가 제때에 김성주(일성)의 석방을 이끌어내지 않았다면, 주체사상도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의 구상이 길림감옥에서 완성되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29년에서 1930년에 걸쳐 길림감옥에서 1920년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의 경험을 분석하여 주체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심각한 교훈’을 얻게 된 것입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 민족주의 운동과 초기 공산주의 운동이 분산성과 산만성을 면치 못하는 실태를 분석하여 보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김일성은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이것이 지금 말하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1930년 5월초에 길림감옥을 나섰다. 궁륭식으로 된 감옥문을 나서는 나의 가슴은 신념과 열정으로 차고 넘치였다.
나는 감옥에서 초기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을 총화하였고 그 교훈에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앞길을 설계하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는 평양감옥에서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모색을 하였고 나는 이렇게 길림감옥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조선혁명의 앞길을 구상하였다.
불행한 망국노의 아들들이여서 아버지도 나도 감옥 안에서 나라와 민족의 전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해석 손정도 목사는 한마디로 말하여, 김성주(일성)가 공산주의 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때인 길림시절을 뒷바라지 하였고, 김성주(일성)가 1920년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을 총화하여 주체사상을 구상할 때인 길림감옥살이를 옥바라지 하였습니다. 1930년 5월 김성주(일성)의 석방을 이끌어내어 그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의 육체적 생명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모든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평가하여, 생애 말년의 김일성은 해석 손정도 목사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정대일 연구실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jungsc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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