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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열정과 그릇된 선택(사 60:9-14; 빌 3:17-4:1; 요 18:28-40)사순절 셋째주일(3월1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3.13 16:58

1.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정

지난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이후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들에 의해 당시 유대교의 실권자였던 안나스와 또 그의 사위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려갔다고 말씀드렸었죠? 마태복음 27장에 의하면,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장로들과 의논하여 결국 죽이기로 결정하고 사형 선고의 권한이 있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고 합니다(마 27:1-2). 그리고 빌라도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군중들의 함성에 못 이겨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되죠?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께서 이렇게 빌라도에게 끌려가시어 심문을 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요 18:28a).” 여기서 ‘관정(πραιτώριον)’은 로마총독이 예루살렘에 임시로 머무는 관저, 혹은 사령부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 총독은 평소에는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나, 유월절 같은 축제가 있어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때는, 소요를 대비하기 위해 임시로 예루살렘으로 이동해서 관정, 곧 프라이토리온에서 머물렀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볼까요?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28b-30)

여기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키고자 로마의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기에 이방인 법정(관정)에 서면 더럽혀진다고,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절기를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열심과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도저히 예수의 신성모독,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마 26:65).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에 넘겨,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교적 열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열정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최근 신천지, 정명석(JMS)같은 사이비 이단들도 그렇지 않나요? 예수는 열정적으로, 자기 기분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잘, 성경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2. 빌라도의 그릇된 선택

아무튼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관정에 들어오지 않은 유대인들 때문에 빌라도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를 행악자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 18:31a)”.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 18:31b)” 그러자 빌라도가 어쩔 수 없이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심문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3-36)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속했다면 싸워서 이렇게 빌라도 당신 앞에 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그의 나라는 말세까지 여기에 있으나, 그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순례로서만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말씀이니, 기억하고 계속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7-38)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 하며 세상에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씀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요?

우리시대 가장 도전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은 『빌라도와 예수』 (꾸리에, 2015)라는 책에서 빌라도와 예수를 통해,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를 넘어,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곧, ‘예수의 재판’을 통해 지상 제국의 대리인과 하늘의 왕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아감벤에 의하면 예수는 진리를 증언하는 데 실패했고, 빌라도는 판결을 내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 제국의 진리와 예수의 구원의 진리는 만날 수도, 또한 대화에 성공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는 진위 불명 상태에 남았고, 결국 빌라도와 예수는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예수의 재판!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가 된 이 기이한 재판을 이해하지 않고서 예수가 말한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궁에 빠져버린 재판! 이 재판 속에서 판결도, 구원도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종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판결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의 죽음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 <빌라도와 예수>, 아감벤의 책, 『빌라도와 예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역시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것은 ‘법률적 관점’에서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 곧 로마 제국의 법, 황제의 법은 하늘의 법, 곧 구원을 담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법과 하늘의 구원이 서로를 배척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이유’와 로마 제국의 ‘제국의 법’에 의해 처형당한 것입니다. 아감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판결)과 구원은 적어도 [이 세계의] 시간들이 끝날 때까지는 서로를 배척한다. 서로를 배척하면서 또한 서로를 불러내는 ‘법적 정의’와 ‘구원’은 결코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을, 오히려 우리가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는 자신의 덧없음 속에 갇혀 법적 정의를 원할 뿐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현세에 만족하는 자가 천국을 갈망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끊임없이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예수와 더불어 죽음에 넘겨지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렇습니다. 세계는 자신의 덧없음 속에 갇혀 법적 정의를 원할 뿐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사(진리)가 아니라,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빌라도 보다 못합니다. 적어도 빌라도는, 철학자 니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세련된 말(혹은 질문)’이라고 했던 “진리가 무엇이냐?”를 물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길은 빌라도라는 심연(深淵), 곧 빠져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 심연을 지나, 우리는 예수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감벤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무한(無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유한(有限)의 한계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무한)’에서 ‘이 세상(유한)’의 왕으로 오신 분이신 예수님을 유대인들과 빌라도는 알지도, 또한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자에 얽매인 왜곡된 성경해석 곧, 유한에 속한 잘못된 종교적 열정과 빌라도의 제국의 법에 속한 그릇된 선택이 참다운 구원인 하늘의 법을, 무한의 진리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협상을 제시합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요 18:39-40)

그러나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정이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 외칩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이 구속사의 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 아셨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32).” 따라서 빌라도의 선택은 그릇된 선택이지만, 그 선택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모습,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왜 우리는 옳은 것을 알고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무한과 유한의 관계로 이야기하면, “무한성에 대한 자각이 있으면서도 왜 유한에 머무는가?”라고 질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한과 무한성은 신성이죠? 하늘의 것이자, 영적인 것입니다. 진리 그 자체입니다. 유한과 유한성은 땅의 것이고 인간적인 것이며 육적인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늘의 것을 알면서도 땅의 것을 행할까요? 앎과 실천이 유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기와 예수살기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7-19)

옳은 것을, 또한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땅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맞이하여 이 시대 가장 불온한 철학자 슬로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들’이다. 가짜뉴스와 음모이론이 기승을 부리고, 인종주의가 춤추고 있다.”

마스크가 부족하다고 언론에서 선동적으로 먼저 떠드니, 시민들이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서고, 정부를 비난합니다. 정부를 비난하니 지금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다고, 걱정된다고 언론은 다시 부추깁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의회권력을 교체해야 된다느니,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느니 선동합니다. 이렇게 ‘자본-보수언론-종교권력층-사법부-신천지 이단-전문가 집단과 어용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아무튼 지젝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감염증 유행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가해진 ‘오지심장파열술(五指心腸破裂術)’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더는 계속할 수 없다는 징후이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여기서 오지심장파열술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빌 2>(2004)에서 나오는 최고 궁극의 무공입니다. 주인공 베아트릭스(우마 서먼 분)로부터 다섯 혈점을 가격당한 빌(데이비드 캐러딘 분)은 짧은 대화 뒤 다섯 걸음을 뗀 후 심장이 파열되어 죽습니다. 빌은 베아트릭스의 원수입니다. 영화 제목도 빌을 죽이자이죠?

▲ 영화 <킬빌> 포스터와 <빌>

아무튼 빌의 죽음에서 시차가 존재합니다. 곧 공격당한 시점과 죽음을 맞는 시점 사이의 시차입니다. 당장은 죽지 않지만 다섯 걸음을 걷는 시간이 지나면 죽게 됩니다. 지젝은 지금 자본주의 체제가 혈점을 가격 당했다고 본 것입니다. 곧 사망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가격당한 혈점의 하나로, 자본주의 사망의 징후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뿐만이 아닙니다. 폭염, 가뭄이라는 이상기후와 해일과 지진 같은 자연 재해가 시시때때로 생태계를 위협하고 인간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핵무기와 핵발전소, 그리고 전쟁과 분쟁, 경쟁과 증오, 혐오와 배타성 역시 매우 심각한 위협입니다. 이 모두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진리인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 유한한 것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나요? 바울의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모든 만물을 예수의 이름 아래 복종시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21절 하반절을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천하고 낮은 몸인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4.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진리이신 주 안에 바로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선지지가 잘 보여줍니다.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사 60:9)

이전까지는 잘못된 열정과 그릇된 선택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으나, 또한 그 결과 징계를 받았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쌍히 여겨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사 60:10-14)

5.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기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많이 힘드시죠? 이 사태가 끝나도 끝난 게 아닙니다. 다시 사람들이 치유되어 경제가 회복되고, 사람이 사람에게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그립고 반가운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영어에 재난이라는 단어, 디재스터(disaster)는 ‘별(astro)’이 ‘없는(dis)’ 상태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합니다. 지중해와 에게 해를 향해하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별을 보고 항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별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배가 방향을 잃는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난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달빛 동맹’을 보세요. 대구(달구벌)와 광주(빛고을)의 아름다운 협력이 대한민국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약사회마스크캠페인인 “나는 OK, 당신 먼저!”도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또한 한국 교회가 대구경북 지역과 감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것은 재난을 극복하려는, 곧 별을 보려는 노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사재기’를 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신천지 집단과 같이 감염을 숨겨 많은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재난을 방관하고 재난에 대처하며 힘쓰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찍이 미국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계적인 재난을 이용해 돈을 버는 백만장자가 미국에서 단 한 명도 나오질 않길 바란다!”

앞서 말씀드렸던 지젝은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합니다. “지금 상항은 세계경제를 긴급히 재편해야 한다는 분명한 신호 아닌가? 세계경제를 규율할 수 있는 새로운 전지구적 조직, 필요에 따라서는 각 국민국가의 주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조직을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저는 지젝이 요청하는 새로운 전지구적 조직이 바로 ‘예수께서 왕이신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내 나라는 재난을 통해 자기 이익을 구하는 이들은 반드시 그 재난으로 자신이 그대로 당하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은 그들의 잘못된 열정(유대인들처럼)과 그릇된 선택(빌라도처럼)으로 심판을 받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재난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망망대해에서 길 잃은 배가 발견한 저 하늘의 밝은 별처럼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저와 여러분들이 만들어 나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밤바다와 별>와 <약사회마스크캠페인>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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