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부자 청년과 부자 삭개오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3.14 17:47

『기독교강요』 2권 3장 6절은 구원과 관련하여 ‘자유의지’의 전적인 무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 우리는 아무것도 공헌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명확히 설명됩니다. 칼빈은 빌립보서 1장 6절을 인용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칼빈에 의하면 이 말은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자랑할 점이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에스겔서 36장 26-27절의 말씀을 아래와 같이 주석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 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만일 돌이 부드러워서 어느 정도 굽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사람의 마음도 그 불완전한 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충하면서 바른 일에 복종하도록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전연 선한 것을 짜낼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II.iii.6).

사람은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 인간의 노력과 어떤 업적은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수님과 어떤 부자청년의 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마19:16-22절; 병행구, 막 10:17-22; 눅18:18-30). 어떤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답변하십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러자 그 청년이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 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본문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생의 문제에 관한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이 대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 구원의 주체는 전적으로 다만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 부자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겠습니다 하는 진전된 대답을 했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 네 목숨까지도 이웃을 위해 바치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까요? 역시 부자였던 삭개오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러한 상상이 무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과 식사할 때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자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식사하는 도중에 자리에 서 일어나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19:9)는 선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네 갑절로 갚을지라도 역시 부자였을 것입니다.

▲ 부자 청년은 근심에 싸여 돌아갔다. ⓒGetty Image

그러나 부자 삭개오는 예수님께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는 말씀을 들었고, 그 부자청년은 계명들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아왔지만 예수님께로부터 영생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근심하며 떠나는 그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쉬울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몹시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바로 6절의 주제와 관련하여 정확히 들어맞는 답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7절에서 9절까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 여러 성구들을 인용하며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II.iii.7) 펠라기우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논박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5).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 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나를 떠나서 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포도나무 가지를 줄기에서 끊어 수분을 빼앗으면 싹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체로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선을 행할 가능성 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 우리도 포도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떨어질 때 우리는 마르고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II.iii.9).

칼빈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렸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이 말씀은 칼빈이 자주 인용하는 성구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선행을 하려는 의지와 선행을 수행하려는 강력한 노력이 모두가 하나님께 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행의 처음 부분은 결심이며 다음 부분은 그것을 성취하는 강한 노력이다. 그리고 두 부분은 모두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결심이나 성취에서 우리가 자신이 무엇을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가 주의 공적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신다 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의지를 만 드신다고 하면 의지에 있는 선은 모두 우리의 밖에 있게 된다. … 의지가 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끝으로 이 모든 일을 사람이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견인불발하는 것도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II.iii.9).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개혁교회 신앙의 특징적인 주장입니다. 칼빈은 12절에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사람은 단 하나의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그들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자기들의 뜻에 맞도록 곡해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이 발언을, 자신을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낫다고 말하면 너무 교만하게 들릴 것 같았기에 바울은 그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돌림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시정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시정 내용을 보면, 자기를 은혜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지라고 불렀다는 것이었다. … 사도는 주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수고해서 자기를 동역자로 만들었다고 쓴 것이 아니라, 수고한 공로를 전부 은혜에만 돌리는 의미에서 이 수정을 한 것이다.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모호한 표현 때문에 그들은 속았고, 특히 라틴어 번역이 졸렬해서 헬라어 관사의 그 힘을 잃었다(II.iii.12).

잘못된 성서번역과 해석, 잘못된 신학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가능게 한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로 인문주의자들의 성경번역을 꼽았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가 갖고 있던 성경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 즉 textus vulgatus(문자적으로 ‘평범한 본문’이라는 뜻)였습니다. 그러나 이 불가타역 성경은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을 읽던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 많은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오류의 상당부분이 성경번역의 오류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컨대, 본문비평을 통해 밝혀진 번역의 오류에 대한 아래의 세 가지 고전적인 예들은 로마 가톨릭의 일곱 성례의 목록에서 두 개의 성례를 제외시킴으로써 종교개혁자들에게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중세신학은 결혼을 성례의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혼을 ‘성례’(sacramentum, 엡 5:31-2)로 말하고 있는(적어도 불가타 번역에서) 신약성경 본문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여기서 ‘성례’로 번역된 헬라어 “뮈스테리온”(musterion)은 단지 “신비”(mystery)를 의미할 뿐이며, 결혼을 “성례”로 언급한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결혼을 성례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고전적인 증거 본문의 하나는 이처럼 사실상 소용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둘째, 불가타는 예수의 공생애의 첫 마디(마4:17)를 “‘참회하라(do penance)’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은 하늘나라의 임함이 참회의 성례(고해성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그 헬라어는 “‘회개하라(repent)’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가타가 외적 실천(고해성사)을 가리키는 것 처럼 보인 곳에서, 에라스무스는 내적인 심리적 태도, 즉 “뉘우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중세 교회의 중요한 성례를 정당화하는 제도가 다시 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불가타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혜가 충만한 자”(gratia plena, 눅1:28)라고 인사를 함으로써, 곤란한 중에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충만하게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가 지적한 대로, 헬라어는 단지 “은혜를 입은 자” 혹은 “마음에 든 자”를 의미했을 뿐입니다.(1)

이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근거하고 있던 아주 중요한 신학적 기반들이 성경번역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칼빈도 여기서 고전 15장 10절의 주석을 다시 새롭게, 정확하게 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근거, 토대, 무엇인가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해서 인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어서 계속 읽겠습니다.

만일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는 은혜가 자신의 동역자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있는 은혜가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점을 분명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의 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사보다 앞서는 때가 많지마는 모든 은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런 은사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앞지르시며(시59:10), 그의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라(시23:6)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II.iii.12).

칼빈은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를 제외하지 않고,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돕는다고 말􏰀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는 핵심적인 주장을 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같은 그 은총에 의해서 기쁨을 받으면 사람의 의지는 지속하게 되며, 불굴의 용기로 강화되며,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면 즉시 패망한다. 주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의해서 선으로 전향하며, 일단 전향하면 끝까지 선에 머무른다. … 즉,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II.iii.14).

 

미주

(미주 1) A. E. 맥스라스, 소기천 외 2인 옮김, 『신학의 역사』(서울: 지와 사랑, 2002), 194-6.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