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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페르츠’와 예수의 논쟁신(神)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3)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0.03.15 16:01

육체의 대변(빵이냐 말씀이냐)

「빵이냐 말씀이냐」 하는 양자택일로서 부각되고 있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둘러싼, 육체의 대변인 아하스 페르츠와 영혼의 대변인 예수 사이의 숙명적인 만남을 이문열은 광야에서의 예수의 유혹을 약간 수정해서 묘사하고 있다.

인간 육체의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빵이다. 그래서 헐벗고 굶주린 인간들에게 먼저 빵을 줄 것을 요구하는 아하스 페르츠와 인간은 빵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꾸하는 예수의 논쟁을 살펴보자.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이오. 당신은 이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 수 있오? 다시는 저들이 빵이 모자라 고통받는 일은 없도록 해줄 수 있으시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오. 성서의 오랜 기록이니, 흙에서 빚어져 필경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한 덩이 빵으로 기를 수 있지만, 내 아버지의 입김으로 불어넣어져 그 분과 함께 영원할 영혼은 오직 그 분의 말씀으로만 살 것이기 때문이오. 내 아버지의 크고도 깊은 사랑을 단순한 물질적인 은혜로 끌어내리려 하지 마시오”.

아하스 페르츠 역시 처음에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말씀이 인간에게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 이하의 상황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가, 노예 작업장, 지하감옥, 문둥이 계곡 사람들의 고통뿐인 현실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에는 말씀이 인간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관들과 율법사들이 아름답고 희망에 찬 말씀을 소리 높여 떠들고 있는 동안도 사람들은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말씀은 주린 자를 채우지도 못했고 헐벗은 자를 입히지도 못했다. 사람을 죄와 질병에서 보호하지도 못했으며 거기서 온 비참과 불행에는 더욱 무력했다. 지금 이 순간도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이 말씀의 미신에 젖은 채 고통 속에 헛되이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빈정대듯이 반문한다.

“그렇소? 여전히 그분의 뜻은 그러하오? 저들이 겪어 온 그 오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오? 결핍과 갈구만이 저들 육신의 영원한 숙명이란 뜻인가요? 그 육신이야말로 저들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명이며, 영혼을 헛되이 떠도는 망령의 신세에서 구해주는 것, 하나하나로서는 덧없는 생사의 반복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만 전체로서는 저처럼 면면한 흐름을 이어 가는 것이언만”.

“영혼의 삶이 더 크기 때문이오. 당신이 아무리 그 귀중함을 과장한들 바람 앞의 겨와 같고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육신의 삶이 저 영원한 참생명에 비해 무엇이겠오? 거기다가 이제 약속의 날도 가까왔오? 머지않아 주린 자는 채우게 될 것이고 목마른 자는 적시게 될 것이오. 어찌 그들의 결핍과 그로 인한 고통이 영원일 수야 있겠오?”.

“아, 그 가혹한 심판의 날 말인가요?  그날에 웃을 몇 안 되는  그 “의인들” 말인가요?   하나를 위해  아흔 아홉이 불에 던져져야 하는 그 재앙의 날에”(191 이하).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에 걸맞게 말씀의 육화인 예수는 귀중한 영혼의 참생명을 위해 모든 육체적인 욕구를 멀리하며 살았지만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하늘의 말씀을 위해 지상의 빵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영혼의 성화를 위해 육신의 요구를 희생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육적인 행복을 대변하며 예수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더구나 땅위의 영화와 쾌락에 이르면, 아직껏 아무 것도 스스로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않소?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숲을 지나 본 적도 없고, 빛나는 보석이나 향기로운 술에 취해 본 적도 없을 것이오. 화려한 연회와 풍성한 미식의 즐거움도. 그러나 지난날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세계와 그 곳의 사람들을 구경했고, 때로는 내 스스로 거기에 끼어 들어 본 적도 있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들은 행복하였오. 그 행복을 헛됨이나 죄로 몰아간 것은 다만 말씀의 독선일 뿐이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그것을 겪는 이의 주관에 달렸으니까 말이오”(195).

지상의 나라 건립 (참행복이란)

이문열은 광야에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을 다음과 같이 약간 바꾸어서 서술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바위산 한 기슭의 벼랑가로 인도해 가서는, “당신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한다. 이에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을 듣고 이번 물음의 답도 짐작은 했었오. 그렇지만 아아, 오관을 통한 증거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너희들, 백의 거룩한 말씀보다 단 한 번 어줍잖은 기적에 더욱 기울어질 너희 인간의 맹목이여. 너희는 아직도 얼마나 긴 미망과 방황의 세월을 울고 신음하며 더듬어 가야 할 것인가”.

“물질적인 은혜로 산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에 의해 강요된 것도 참된 믿음이나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오.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 속에서 인간적인 불신과 회의를 이겨낸 선택만이 저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소”.

“하지만 그것은 의인 욥이나 선지자 요나에게서도 어렵지 않았오”. 그러면서 아하스 페르츠는 간곡한 설득에 가까운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땅의 민중들이 가장 열렬하게 고대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요. 먼저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고 이 땅의 왕홀과 권세부터 손에 넣읍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 다음이라도 늦지 않소. 검이 없었던 판관의 시대보다는 검을 가졌던 열왕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말씀에 충실하였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신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종족이 권유하는 신이었오. 인간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방식대로 따르는 게 가장 나을 것이오”(192 이하).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의 편에 서서 기적을 통해 어리석은 민중들의 오관에 굳어버린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하고 하느님의 아들의 강력한 능력에 힘입어 지상의 권세를 한 손에 장악해서 믿기에는 더디고 죄의 유혹에는 약한 백성들을 양떼처럼 이끌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지상의 권세와 쾌락은 순간이지만 천상의 권능과 복락은 영원하다”는 걸 주지시킨다.

▲ 드라마 「사람의 아들」의 한 장면 ⓒGetty Image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 있었던 날 예수를 찾아가 인간에게 있어 참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진다.

“아직도 인간과 이 대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오? 그 독선의 말씀과 공허한 천국의 약속으로 우리를 당신들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소?”(200).

그런 다음 예수의 참행복의 메시지인 「진복 팔단」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당신은 무슨 대단한 선심을 베푸는 양 진복 팔단을 외쳤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참된 복일 수 있는가요? 그것은 기껏 우리들에게 부당하게 짐지워진 불행의 자의적인 삭감, 실은 부끄럼 속에 되돌려 주어야 할 약탈물이 아닌가요? 왜 인간은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당해야만 참으로 복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요? 수천년의 기다림 끝에 당신이 왔는데도 그런 고통스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내릴 참행복은 없는가요? 그것들이 사랑과 은혜의 하느님을 자처하는 분의 선물이라면 그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요? 위로받지 않아도 되도록 이 땅의 슬픔을 모두 거두어들일 생각은 없오? 만족을 몰라도 좋으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 수는 없오? 나중에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어도 좋으니 애초에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는 없오? 저 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못되어도 좋으니 따로 평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이 세상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오? 또 당신은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으라 하셨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목숨을 이어 갈까,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하고 가르치셨오. 그러나 당신은 비록 사람의 몸을 빌어 왔지만 육신을 가진 진정한 비참을 모르고 있오. 언제 우리에게 지상의 빵으로 육신을 배불리고 다시 천상에 영혼의 재물을 쌓을 여유가 있었오? 당신 아버지의 저주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고 좋은 기둥감 하나를 얻기 위해서만도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소? 당신은 자식에 대한 부양 의무를 저버린 채 효도만을 강요하는 무정한 아버지의 대리인일 따름이었오”(201).

이러한 항의섞인 불평에 대해 예수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분은 못 하실 일이 없오. 약속하신 날이 오면 순간순간 새로워지는 행복으로 영원을 채워 주실 것이오”.

이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약속의 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먼 앞날의 일이고, 또 우리로서는 그날이 꼭 올 것인지도 알 수가 없오. 그런 그날을 위해 한 번뿐인 이승의 삶을 희생할 사람이 그 얼마이겠오? 누가 천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날을 위해 작지만 가능하고도 확실한 땅 위의 행복들을 포기하려 들겠오? 차라리 나와 함께 내려갑시다. 내 반드시 당신을 도와 이 땅의 왕홀을 손에 쥘 수 있게 하겠오. 설령 땅 위의 영화와 쾌락이 당신 말과 같더라도 그 왕홀만은 당신에게 여전히 필요할 것 같소. 왕자의 권세라면 빵이나 기적 없이도 이 백성을 말씀 아래 묶어 둘 수 있다고 믿소”(195 이하).

그러나 예수는 이번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믿음의 결단을 강조하며 기적도 거부하고 지상의 왕홀도 거절한다.

“참으로 완벽한 말씀의 육화요. 몸은 사람을 빌어도 마음은 말씀 그 자체구려. 나는 이만 물러나겠오. 그러나 모든 일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인간의 집을 짓던 끌과 대패로 신의 궁전을 지을 재목을 다듬고 있지만, 결코 그 궁전을 이 대지 위에는 세울 수 없을 것이오. 당신이 인간을 향해 쏜 독선의 화살이라면, 나는 그 방패가 될 것이오”(196 이하).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의지가 약해 선의 실행보다는 악의 유혹에 잘 빠지는 대다수의 인간들을 대변해 그들을 도외시하는 하느님의 나라의 건립은 완전한 인간창조가 아님을 역설한다. 선은 지혜에 의해 절충되어야 하며 그럴 때 충분히 이 지상에서 신이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나라를 건립할 수 있다고 본다.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를 이대로 두시오.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절망과 죄책감이 분노의 팔매가 되어 당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것은 모조리 누리게 해주시오. 말씀으로부터의 자유를. 공허한 약속이나 소름끼치는 위협이 아니라도 우리가 당신이 근심하는 그런 혼란과 어둠에 묻히는 일은 없을 것이오.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당신의 아버지의 선과 함께 여러 지상의 이익들이 우리들의 행위를 조절할 것이며, 우리의 지혜 또한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터득해 줄 것이오”(202 이하).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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