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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거기에만 계시지 않습니다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출 17:1-4; 롬 5:1-5; 요 4:5-24)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3.18 19:01

< 1 >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전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요 4,3).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긴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 여행자들이 흔히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간 당시 관습을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마리아를 거치신 것은 분명히 의도를 가진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야곱의 우물가에서 쉬고 계셨을 때, 물을 길으러 나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은 매우 퉁명스럽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퉁명스런 이 여인의 태도가 어디에서 왔는지 요한은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친절하게 설명합니다(요 4,9).

왜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을까요? 이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주전 920년 경, 솔로몬 왕이 죽은 후,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된 역사로 소급됩니다. 당시 12지파들의 동맹체였던 한 나라가 둘로 분열, 10지파들이 남왕국 유다로부터 분리하여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이와 함께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전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그래서 북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건설하여 예루살렘과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남왕국의 다윗 왕조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새 나라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던 북왕국은 최초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특별히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꿨던 야곱에게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온 우물의 이름이 ‘야곱의 우물’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정치적, 종교적 분열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근본적으로 서로를 적대적인 대상으로 보게 했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상대에 대한 증오와 편견은 내부 단속에 효과적이었기에, 정치적 의도를 가진 집단이나 권력층에 의해 더욱 조장되고 조작되었습니다.

이런 팽팽한 긴장관계는 주전 721년경에 극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의 전쟁으로 멸망하는 동안, 남왕국 유다는 오히려 아시리아의 동맹이 되어 형제국인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북왕국을 점령한 아시리아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했고, 정복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켰습니다. 족외혼으로 인종이 혼합되었고, 종교의식도 이방종교들과 혼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남 왕국 유다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제 더 이상 같은 민족, 형제자매가 아니라, ‘혼혈인종’, 종교혼합주의자들로 여긴 것이지요.

두 왕국 사이에 또 다시 갈등이 악화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초,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고, 그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되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 지도층 사람들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더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 안식일 규정, 정결 음식법, 할례규정 등의 관례들을 매우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자신들을 비유대인들과 비유대적 전통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바빌론 제국이 멸망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유대인들은 고향 땅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혈통이 의심되고 종교적 관습도 타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들을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차별하고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이름이 곧바로 유대교와 유대인의 순수성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과 동일시된 것이지요.

‘분리와 배제’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면서, 동시에 전형적으로 내부결속을 위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특히 취약한 국가권력은 외부의 희생양을 찾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것이 역사의 증언입니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도 그랬고, 인종주의, 민족주의, 성차별주의도 그랬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진원 지역, 감염자에 대한 ‘분리와 배제’가 자칫 방향을 잘못 잡아 ‘차별과 폭력’으로 나아갈지 걱정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세계적 대유행’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격화되어 지구촌을 산산조각 내지 않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징후가 종종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일본 사이타마 현 사이타마 시 당국이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 등 어린이 시설에 마스크를 배포했는데, 유독 재일조선인 어린이 41명이 재학 중인 사이타마 조선 초·중급학교를 제외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치졸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뉴스를 들은 일본 시민들이 조선학교로 마스크 등 위생물품을 기부하기도 하고 국내외에서 항의하자, 사이타마 시 당국이 물러섰지만, 이런 일이 다시, 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으로 자원봉사에 나선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들, 지역 경계를 넘어 환자들을 받고 치료해주는 자치단체들, 차분하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재기를 하지 않는 시민들, 자기 몫의 마스크를 사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시민들, 헌금과 헌물로 동참하는 시민들, 힘이 되는 메시지로 서로를 위로하는 시민들 때문에, 그래도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일들도 많이 있지요. 그래서 오히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감염병을 극복한 가장 모범적인 나라, 그래서 세계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2 >

어쨌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안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과 갈등의 전(前)역사가 내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 예수님의 부탁에 퉁명스럽게 반응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적대적인 말투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새로운 초대로 응답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 4,10).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깊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요 4,11) 되묻습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의 조상을 야곱으로 소급시킴으로써,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과의 계약의 파트너임을 주장한 것이지요.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유대인으로부터 차별받고 경멸받고 있는 현실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4)고 말씀하십니다. ‘생수’는 문자적 의미로 ‘신선한 흐르는 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도 생수를 인간에게 생명을 주어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은유로 사용합니다(렘 2,13). 그리고 요한도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라고 함으로써(요 6,63), 생수를 생명을 제공하는 성령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그 물,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이지요(요 4,14).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물을 자신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말해진 말만 듣고, 그 속뜻을 깨닫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은, 다시 빈정대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요 4,15).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고 말씀하시고, 여인은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요 4,16-17).

이 말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마치 성적으로 매우 부도덕하고 방종한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인에게 죽거나 이혼한 전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은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살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여자의 남편과 동거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뜬금없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여인의 답을 긍정하신 후, 예수님은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했다며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투시하듯 말씀하십니다. 놀란 사마리아 여인,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눈으로 보듯 잘 알고 있는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예언자임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어떤 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사실로 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은 이 여인의 부도덕성보다는 견디기 어려운 불행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몇 번 결혼하건 법적으로 아무 상관없었지만, 당시 랍비들은 세 번 이상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부도덕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이 여인의 삶이 윤리적으로 그르다고도, 옳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서 이혼이 아니라 차별을, 부도덕이 아니라 고통을 보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른 학자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가족사는 바로 사마리아의 역사적 상징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이 여인에게 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말은, 아시리아 왕이 다섯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 도시들에서 살게 했고, 다섯 지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각자의 우상들을 섬긴 것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입니다(열왕기하 17,24-34).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사마리아의 다섯 지역을 다섯 남편으로 상징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한 사마리아 여인의 회개에 관한 교훈이 아니라, 한 때 하나의 통일된 형제국이 역사를 통해 분열되고,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을 어떻게 예수님이 새로운 인간 의식 속에서 극복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대화의 초점을 더 이상 자신의 가족사가 아니라, 예배로 옮겨간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그리짐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적대적 관계는 성소의 분열로 더 심화되어 있었습니다. 남왕국은 예루살렘을, 북 왕국은 사마리아를 중앙성소로 여겼고, 각자의 성소를 절대화하고, 다른 성소는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곳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주장일 뿐,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느 공간에도 매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특정 공간에 묶어둘 수 없다는 뜻과 동시에, 특정 교리나 신학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성전과 예전이 아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과 예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간도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개혁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하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곳, 그곳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때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형태의 종교적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 이스라엘로부터 모든 세계로 뻗어나가고, 따라서 구원이 더 이상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특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놀란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런 세부 묘사는 그녀가 흥분했고, 마음이 급했음을 나타낼 수도 있고, 더 깊은 의미에서 물동이는 한 편으로 그녀의 삶의 모든 과거를,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미 생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길러 우물에 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육체의 목마름을 해결하던 물동이 대신에 결코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얻은 사람의 모습니다. 한 번 구원을 맛본 사람은 결코 자신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새 세상을 본 사람이 어떻게 옛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마을로 달려간 사마리아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계시의 전령 역할을 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오랫동안 축적되고 단단해져 결코 부술 수 없다고 여겨온 경계선들, 북 왕국과 남 왕국,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마리아 성소와 예루살렘 성전, 여성과 남성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경계선들과 높은 장벽, 편견과 배제가 예수님과 함께 무너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진 것은 그동안 사마리아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리하고 차별했던 유대인의 장벽만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자신의 의식 안에 깊이 내재해 있던 열등감과 적대감의 장벽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타자를 보는 눈도, 자신을 보는 눈도 달라진 것이지요.

< 3 >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세상의 장벽만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마음의 장벽도 붕괴시킨 것입니다. 이런 장벽을 허무는 일이 주님의 사역이고,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양식, 주님을 보내신 분의 뜻이자, 그 분의 일이었습니다(요 4,32-34).

사도 바울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롬 5,8),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롬 5,10), 실증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고,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로 인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길(롬 5,1)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지, 성, 계급, 민족, 인종, 종교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관계가 된 하나님과 인간,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극복하는 길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세계를 향하는 길을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경계를 넘어, 유다와 사마리아의 국경을 넘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민족을 넘어, 예루살렘과 그리짐 성소라는 종교를 넘어, 세상의 구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요 4,42). 그리고 이런 모든 형태의 장벽, 인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을 허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자, 그 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해야 할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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