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사 59:1-3, 9-20; 딤전 1:12-17; 요 19:1-16)사순절 넷째주일(3월2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3.20 17:03

1. 정의가 멀고 공의가 미치지 못한즉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쓰신 ‘세 본문 성경 말씀 공책’을 펴 놓으시고 메모도 하고, 체크도 하면서 함께 읽어 볼까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1-3)

이사야 59장은 제 3이사야, 곧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사야’에 해당됩니다. 이사야 56장부터 66장까지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고향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B.C. 520-515년)하기 전에 등장하여 예언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 시대를 뛰어 넘은 예언자입니다. 동시대 예언자인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 건축을 독려하고 지지했지만 이사야는 ‘민족’과 ‘성전’의 개념을 넘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여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사 66:21).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요즘은 신천지 이후, 개신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죠? 감염병이 돌고 있는데도 예배를 강행하여 교인들 가운데 확진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지역 사회 감염이 우려되고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물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염병이 돌고 있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이웃이나 지역 사회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지금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염을 피하기 위해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하며 동시에 이번 감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사회적 관심 갖기’를 실천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는데(삼상 15:22), 고통 받는 이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상황을 미리 본 것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우겠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 개신교인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의 일꾼으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사야는 넓은 시야를 가졌으며 보편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열방 가운데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민이자,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세우시겠다고 하는 걸까요? 바로 유대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신앙적으로 연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악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을 보면 놀랍습니다. 그들의 손이 피에! 그들의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그들의 입술이 거짓을 말하며 혀가 악독을 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사 59:9a)”, 그렇습니다. 정의(tsedakah)와 공의(mishpat)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强壯, 힘이 세고 혈기가 왕성)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사 59:9b-11)

구약성서에 나오는 정의라는 말인 ‘체다카’는 ‘노예들의 울부짖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나아가 ‘공동체 내에서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혹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의 도덕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반면 공평 혹은 공의라는 말인 ‘미쉬파트’는 법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자유로운 사회는 공명정대하게 집행되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따라서 죄인은 벌을 받고, 죄 없는 이는 풀려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서에서는 체다카와 미쉬파트가 함께 쓰이며 한 단어 역할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단어 모두 사람들 사이의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믿음 없음, 불순종, 교만을 죄라고 보았으나, 오늘 이사야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의 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공의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할 때, 공의를 시행하지 못할 때, 그것을 이사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속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를 행하지 못할까요?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사 59:12-14) 

우리의 허물 때문에 정의와 공의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2. 한정된 마스크를 어떻게 분배해야 될까요?

사실 철학과 윤리의 역사에 있어서, 정의의 개념은 ‘분배’를 어떻게 할까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분배를 어떻게 할까요? 최근 마스크 관련으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마스크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경매, 혹은 경쟁에 붙이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스크는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약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가져가겠죠? 자유주의는 능력주의라, 그렇게 되면 경쟁에 뒤쳐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두 번째로 마스크 분배를 다수결에 붙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국민들이 다수결로 부족한 마스크를 누구에게 주자고 결정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방식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대의 민주주의로 국민의 대표를 뽑아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와 국민의 대표자인 대통령과 시장,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자유주의적으로 선출하지 않고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하죠?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방식도 문제가 있습니다. 의술과 과학 같은 전문가의 영역을 대중들이 다수결로 결정하게 되면 이것 또한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마스크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서 최대의 효과를 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공리주의’입니다. 한정된 재화(input)에서 최대의 효용(out put)을 산출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이러한 공리주의는 결과는 유익해도(다수가 행복해도), 과정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방법은 그냥 마스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주자는 방식입니다. ‘능력에 따라 벌고, 필요에 따라 쓰자!’, 마르크스주의의 방식이죠? 그러나 필요하지도 않는데, 받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과 또 그 마스크는 그럼 누구 돈으로 제공하느냐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방식은 마스크를 써서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주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이 있습니다. ‘목적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신데렐라의 구두는 누가 신어야 합니까? 신데렐라가 신어야죠?

따라서 분배의 문제는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상황이 동일한 조건일 때는 자유주의의 분배 정의로, 사람들의 대표를 뽑을 때는 민주주의의 정의로, 편의 시설은 공리주의의 정의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정의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맡은 바, 달란트 곧 재능의 맥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로 분배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욕망이 이것들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조율이 필요합니다. 즉, 위임 받은 국가 권력이 어느 정도 개입하고 빠져야 하는지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답이 나와 있죠? 모든 사람이 사랑의 윤리, 곧 성서의 황금율로 판단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모든 정의와 공의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산처럼, 2020)에서 제니퍼 라이트는 고대 로마에서 창궐했던, 그리하여 로마 제국 몰락의 시발점이었던 안토니누스 역병(Antonine Plague)을 소개합니다. 이 역병은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추정되는 병입니다. 소아시아(중동)에 원정 갔다가 복귀한 로마 병사들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에 퍼졌습니다. 165년부터 180년까지 15년간 총 5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정되는데, 로마의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180년) 황제의 제위기간에 일어났고, 또한 안토니우스 황제 본인이 이 역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 합니다.

▲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 표지』와 ‘쥘 엘리 들로네’의 「로마의 역병」

당시 로마는 이 역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우렐리우스가 먼저 취한 행동은 거리의 시체를 치운 것입니다. 이것은 위생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살아남은 시민들의 공포감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또한 국가가 시민들의 장례식 비용을 지출했고, 역병으로 무너진 군대에는 검투사를 차출해 넣었습니다. 나라 곳간이 비자, 황실 재산도 매각했습니다.

사태를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은 채 제국의 역량을 총동원한 발 빠른 대처 덕에 다행히 역병은 차차 잦아들었고 민심도 빠르게 진정됐습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후, 또 다시 찾아온 전염병에 대해 후대의 통치자들은 제대로 대응할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건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전염병을 대하는 권력자의 정치적 수완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니퍼 라이트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앞으로 국가지도자를 뽑을 때, 반드시 전염병 대처 능력을 검증하라.” 곧, 분별력이 있고 침착한 지도자를 뽑으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안토니누스 역병부터 시작하여 가래톳페스트(흑사병), 무도광(舞蹈狂), 두창(천연두), 매독, 결핵, 콜레라, 나병, 장티푸스, 스페인독감, 소아마비 등 익숙한 역병뿐 아니라 기면성뇌염(嗜眠性腦炎), 전두엽절제술 등 조금은 낯선 병(혹은 수술 기법)들까지를 살펴봅니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염병이 발병했을 당시 상황과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생긴 일들, 그리고 이를 어떻게 대처하며 극복해냈는가를 소개합니다.

사실 전염병이 퍼질 때,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염병의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정부와 시민들이 힘을 합쳐 이 공포가 ‘비이성적인 은폐’와 ‘차별과 혐오’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 정부, 곧 권력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제니퍼 라이트가 소개하는 매독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나폴레옹, 슈베르트, 콜럼버스, 니체, 링컨 등이 모두 매독으로 죽거나 고통 받았습니다.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독은 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운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감염자들은 그저 숨기기에 바빴고, 그럴수록 전염병은 더 활개를 쳤습니다. 에이즈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니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염병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다.”

사실 전염병이 퍼지면, 사람들은 감염자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공포를 달랩니다. 하지만 ‘질병’ 그 자체가 아닌,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그 대가는 참혹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신천지 교인들을 혐오하지만, 신천지의 잘못된 ‘포교전략(이삭줍기)’, 기성 교회를 무너뜨리는 ‘산 옮기기’ 등 교주와 교권, 교리의 잘못이지, 사람 자체의 잘못은 아닙니다. 제니퍼 라이트도 이렇게 말합니다. “마녀를 만들지 말라.”

또한 감염병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을 드러냅니다. 청도대남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던 정신질환자들의 집단감염에 의료인들이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집단 감염보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비극적이라 섣불리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한 보험회사의 콜센터 집단감염으로 비정규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도 드러났습니다. 이들에게 재택근무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근무하는 콜센터가 전국에 많습니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뒤에야 그들의 노동환경이 언론에 보도됩니다.

이렇게 은폐된 곳은 콜센터뿐만 아닙니다. 코로나-19 방역의 또 다른 구멍은 바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입니다. 법무부는 ‘불법 체류자’라고 부릅니다. 2020년 1월 기준 40여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마스크 배급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감염되더라도 의료 기관을 찾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추방 공포에 시달린 탓에 이들에게 보건소나 병원 문턱은 높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도 우리와 함께할 이웃입니다. 감염병 전문가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배제와 격리로는 바이러스를 박멸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혐오가 아니라, 연대와 포옹으로 전염병을 막아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무도광입니다. 밤낮 없이 쉬지 않고 춤을 추는, 그러다 죽기까지 하는 돌림병입니다. 1518년 유럽의 한 마을에 이 무도광이 돌았습니다. 집단히스테리 증상으로 해석되는 이 전염병을 보고 사람들은 ‘미친 놈’이라고 외면하고 내칠 수 있었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그들을 품었습니다. 딱히 의학적인 치료랄 건 없었지만 무도광에 걸린 사람들을 마을 주민들은 따뜻하게 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 덕분에 환자들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도광 전염병을 멈추게 한 것은 혐오가 아닌 사랑과 포옹, 그리고 따뜻한 연대였던 것입니다. 제니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서로가 아니라, 역병과 싸워야 한다.”

4. 빌라도의 비겁함과 예수의 죽음

그러나 우리는 오늘, 역병과 싸우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서 말씀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사람 한명과 한 무리의 사람들을 봅니다. 바로 본디오 빌라도와 유대인들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요 19:1).” 이후에는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요 19:2-3).” 그리고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요 19:4).”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에서, 로마와 상관없이 유대의 법대로 예수님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 19:5-6)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에 빌라도가 두려워합니다. 오직 황제만이 신의 아들인데 예수가 어찌 그런가 하여 의문을 품습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무한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다시 질문합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8-10)”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 19:1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속사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 19:12-14)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흐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소개하자, 유대인들이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15a)” 그러자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요 19:15b-16)”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간 것이고, 빌라도는 비겁했기에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했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구속사를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그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낮아지심, 곧 겸손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구약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5. 긍휼을 입은 까닭은

앞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문제를 언급하고 정의와 공의가 없음을 그 죄의 시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없다는 것을 한탄합니다. 말씀을 같이 볼까요?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 59:16-18)

왜냐하면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사 59:15)”,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의 갑옷을 입으시고 정의를 시행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의와 정의는 원수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받을 자들은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19-20).”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자가 시온에서 임한다고 합니다. 또한 야곱 자손 가운데 죄에서 떠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합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4-17)

이 고백 이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은 용서받습니다. 따라서 바울도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코로나-19로 많이 힘드시죠? 얼굴과 얼굴을 맞보고 예배드렸던 지난날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함께 공동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던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리석은 유대인들처럼, 또한 빌라도처럼 비겁하게, 불의하게 살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긍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릇된 길로 갔다면 이제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전염병을 이기기 위해 혐오가 아닌 사랑과 포옹, 그리고 따뜻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배웠습니다. ‘물리적 거리두기’도 필요하겠지만, ‘사회적 관심 갖기’도 중요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교회가 진정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신들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곳인지를 알려야 합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