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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말 의롭게 될 수 있는가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3.21 19:57

우리가 지금까지 제2권 3장에서 확인한 내용은 개혁파 신학의 특징,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개혁교회만의 독특한 내용입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의 문제는 신학사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쳤던 주제입니다.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의 상관성에 대해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칼빈도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적 사고 속에도 하나님과 인간은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칼빈과 개혁파 구원론에 관한 오해

그런데 제2권 3장에서 확인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예컨대 소르본르 학파 사람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인간의 가능성, 인간편에 힘을 실으려고 하는 그런 관심을 가진 자들이 볼 때, 칼빈과 개혁파는 하나님만이 전부이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조차도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려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울에게서 보려고 하는 관심을 갖고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여지없이 그런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는 바울의 의도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대로, 칼빈에게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이냐, 칼빈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이 질문에 칼빈은 무엇이라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이미 여기서 충분히 답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확실하게 우리에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를 통일, 통전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 인간, 아니 남성들의 악함의 끝은 어디일까요. ⓒGetty Image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상충 모순 대립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은 온전히 일치 통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전혀 갈등관계가 아닙니다. 지금 칼빈이 말하고, 개혁파 신학에서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말 그대로 다른 사도들보다 정말 열심히 일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최소한 13권을 그가 저술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 예수 그리 스도의 사도로서 정말 죽을 뻔 했던 일들을 수없이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전하는 일에 온 몸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열심히 일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전부이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 말은 최소한 사도 바울에게는 안 통합니다. 정말 사도 바울의 삶은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최선을 다한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삶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삶이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그 일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로 드러나는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칼빈은 우리에게 떠올려주면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의 저 관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고전 15장 10절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칼빈에게 주었던 것 같습니다. 칼빈의 삶은 바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어거스틴 그 이상으로 바울의 삶이 칼빈에게 많은영향을주었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개혁파 신학윤리의 핵심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도 이와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성화도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칭의는 그렇더라도, 성화는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며 이루어야 하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중생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죽을 때까지 이 중생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칼빈이 말하는 대로 회개를 통한 치료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되고 성화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

칼빈과 개혁파의 성화론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ator)는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서 의롭다는 여김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어떤 업적을 이룬게 아무것도 없이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다고 여겨지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라 일컬어지지만(참고, 벧전2:9), 우리가 여전히 불결􏰀고 죄 가운데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칭의를 이해할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된 자들이기 때문에 다시 새롭게 칭의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예배 시에 죄의 고백과 죄의 용서의 선언을 계속 반복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유일회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다시 죽으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의 문제는 바로 그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는 일을 거듭 재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는, 이 성화 자체도 우리가 이미 선물로 받은 것이지만, 로마서 7장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괴로워하며, 영적인 갈등을 겪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고 거룩해진 자들이지만, 우리 삶 속에서는 영적인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죄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성화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론을 다룰 때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의 관계’ 이런 주제를 다룰 때 개혁파는 여기서 확인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계속 강조하고 성령의 은혜를 계속 강조하지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배제하고, 마치 구원받은 사람은 안락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가 건강한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닙니까. 제3권에서 확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자발적으로 기꺼이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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