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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조건신(神)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4)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 승인 2020.03.22 17:13

앞선 글에서 보았듯이 이문열은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통해 하느님이 참으로 사랑과 은혜의 하느님이라면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는 육체적 인간들을 저 하늘에서의 위안과 행복에 대한 약속으로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위에서의 풍족한 생활과 행복한 삶으로 구원해 주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문열은 아하스 페르츠가 바라고 있는 메시아의 조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때가 이르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지금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말씀의 단순한 육화여서는 아니 된다. 오는 그는 무엇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오는 그는 반드시 세 개의 열쇠를 가지고 와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가엾은 육신을 주림에서 구해 줄 빵이며, 둘째는 우리의 나약한 정신을 죄악에서 지켜 줄 기적이며, 셋째는 맹목과 잔혹의 역사에 義와 사랑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는 지상의 권세다. 이 셋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그는 결코 우리들의 메시아일 수 없다... 말씀의 육화는 말씀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56)

단죄할 수 있는 의인이 하나도 없는가

인류구원의 문제가 거론될 경우 빠질 수 없는 문제 중 하나가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악의 문제이다. 이문열은 이 문제를 간음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사건을 묘사하면서 제기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당신들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라는 예수의 말에 돌로 치기 위해 몰려들었던 군중이 다 흩어져 가버린 것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보시오. 당신은 용서했지만 결국 그 여자를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지 않았오? 흩어진 모든 사람들 ― 그게 바로 당신이 구해야 할 인간들의 참모습이오”(209).

 

▲ Guercino, 「Christ with the Woman Taken in Adultery」(1621, Dulwich Picture Gallery) ⓒWikipedia
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단죄할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슬프지만 절망하지는 않소. 오히려 그럴수록 저들은 구원돼야 하오”.
“무엇으로 그걸 이루겠오?”.
“내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예수의 이 말에 아하스 페르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겠오? 저들의 모든 악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겠오? 그리하여 저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구원만을 약속하고 떠나겠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방치일 뿐이오. 그래, 저 죄 많은 인간과 더럽혀진 대지를 그대로 버려 두란 말이오?”
“도대체 죄란 무엇이오? 그것은 말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관념일 뿐이지 않소? 선이 없으면 어떻게 악이 홀로 서 있겠으며 계율이 없는 곳에 어찌 죄만 홀로 있겠오? 아름다움이 있어 추함이 두드러졌고 깨끗함이 있어 더러움을 더하지 않았오? 말씀이 그 하나를 추키지 않았더라면 그 다른 하나가 그토록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요. 그래도 말씀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홉 명의 죄인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이제 당신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흔 아홉 명을 단죄하게 될 것이오”(209).

이렇게 「인류의 구원」의 문제에는 죄의 문제가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다. 죄가 무엇이며 죄의 성립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선 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판단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가

아하스 페르츠는 원조 아담 이래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자유(의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과연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 중에서 창조주의 포괄적인 예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분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책임으로 돌릴 행위란 없을 것이고 인간을 단죄할 아무런 근거 역시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선에 대한 보상과 악에 대한 징벌을 약속하는 한 인간에게 그러한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 분의 무책임한 방임입니다. 두 개의 상반된 의지 틈에서 인간들이 피흘리며 투쟁할 때, 그리고 끝내 패배하여 타락과 멸망의 길을 갈 때조차도 침묵하고 계시던 그 분에게 그 결과인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고 벌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 분을 다만 냉혹한 형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70).

아하스 페르츠는 애초에 자유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 자체가 이미 신의 예정의 일부이며, 인간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신이 그토록 자비스럽고 사랑에 넘친 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애매한 자유를 인간에게 주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아담은 감히 선악과를 따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은 원죄의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자유가 꼭 주어져야 했다면, 금지규범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랬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땄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훼 하느님은 그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인간의 나약한 의지 위에 얹어놓고, 선택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으려 한다. 궁극적으로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는, 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거기다가 더욱 나빠진 것은, 에덴에서는 하나뿐이었던 그 금지규범의 수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왜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인간의 구원이나 영생에 그것들이 무슨 본질적인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하스 페르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도 멀고 고통스런 길이 그분의 “사랑하는 자식들”인 인간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가?(71 이하)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에게 절망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말하자면 인간들을 주인의 외아들을 죽인 흉악한 소작인들로 만든다는 것이오? 그래서 그들의 허약한 어깨에 아담의 실수보다 더 큰 부하를 얹겠다는 거요?”.
“그분의 외아들인 나의 피로 저들의 타락한 영혼을 씻어 되부르시려는 거요”(212 이하).

그리스도교 2천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건데 결국 아하스 페르츠의 주장대로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관청인 교회는 인간들을 구원한다는 구실로 빵과 기적과 권세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의 유일신 사상과 도덕률, 그리고 동방의 신비주의와 천재적인 예배소질의 그리스철학을 혼합 절충하여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는 황제의 검을 빌어 교세를 확장하고, 약탈한 구휼미와 자질구레한 기적으로 인간들의 허약한 영혼을 사로잡아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아갔다(219).

지금까지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와의 논쟁적 만남에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서로 대립되는 부분들에 대한 대변과 옹호이다. 즉 예수가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혼을 대변하여 말씀과 율법을 착실히 실천하는 덕행의 의인이 될 것을 종용하며,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말씀을 전파하며 풍족하게 사는 말씀의 대변인들 편에 서서 풍요로운 지상의 삶 다음에 하늘에서도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구원을 거듭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는 빵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육체의 인간을 대변하여 육욕과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의지력이 약한 대중,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핍박받으며 사는 버림받은 민중의 편에 서서 끝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의 이 세상 삶 후에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벌받아야 하는 단죄 받은 다수를 이 지상에서나마 도와줄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철학과)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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