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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위선종교의 혁명(2)
레온하르트 가라츠/신요섭 | 승인 2020.03.25 17:22

문: 위선적 행동을 하게끔 하는 과시라는 해악이 바로 종교와 아주 강하게 연관되어 있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답: 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것이자. 즉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문: 무슨 뜻인가?

답: 우리는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상 사이의 투쟁이라는 역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투쟁에 직면한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 편에는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종교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다. 달리 말하자면 예언자들은 종교에 맞서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운다. 이것이 그들이 혼신을 바치는 싸움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세상 위에 계신 것처럼 그는 종교를 넘어서 이 투쟁에 빛나는 정상에 높이 계신다.

종교와 맞선 (또 도덕과 맞선) 모든 자유로운 정신의 투쟁은 해로울 것은 없지만 예수의 투쟁과 비교해 본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피상적인 것이다. 세상이 이 사실을 한번 알아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수는 예언자 중에 예언자로서 이런 정상에 서 있으며 인간의 모든 진리와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가 그 분 안에서 나타난 분으로서 서 있다.

문: 그것을 좀 더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답: 이 핵심적인 투쟁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해악은 하나님과 종교의 혼동이다. 비로 이런 뒤바뀜으로 인해 가장 크고 근본적인 위선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이 위선이 예언자들로 하여금 종교를 적대시하여 싸움터로 나가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산상설교의 저 말씀들의 포괄적인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에 이어서 이야기하겠다. 저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번에는 율법이란 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하나의 일거리요, 교설이며, 제도이자 행사며, 전승이다. 종교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온 것이며 인간은 좋든 싫든 그것을 넘겨받아 또 좋든 싫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곧잘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삼기는 것은 하나님 아니라 인간의 업적이요 인간의 규례이다.

▲ 종교라는 굴레에 갇혀 쳇바퀴만 도는 그리스도인은 아닐까 ⓒGetty Image

문: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위선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과시가 그로부터 생겨나는가?

답: 거기에는 아주 단순한 법칙이 지배한다. 즉 밖에서 들어오기만 할 뿐인 것은 바깥으로 나가야만, 그것도 과시라는 의미에서 바깥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이요, 인간이 만든 규정으로써 종교는 인간의 입장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즉 과시로써 고찰되어야만 한다. 종교란 달리 말하자면 율법과 같은 것으로써 일종의 업적이 된다. 종교는 신학에서 말하듯이 은혜를 가져오는 효과적인 행위(Opus Operatum)요,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로 된다. 이런 일은 당연히 보여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런 일은 괴로운 일이요,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 된다. 사람들은 이런 수고에 대한 보답을 받고자 한다. 이 보답이란 사람들 앞에서 명예가 되는 일이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신앙심과 경건이 가지고 있는 강한 욕구이다. 그렇게 해서 허위와 위선으로 나아가는 과시가 나오는 것이다.

문: 그러나 예수 자신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기를 제자들은 그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춤으로써 사람들이 그들의 선행을 볼 수 있게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미할 수 있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답: 그런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명예롭게 하는 것ㅎ은 종교이며, 자기들을 그 종교의 대변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종교(혹은 억측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권력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끔찍한 죄악으로 자라나고 하나님의 일과 그리스도의 일을 근본적으로 부패시킨, 종교 안에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다. 권력은 또 무엇보다도 돈도 마련해 준다. 그래서 돈과 재물에 대한 추구가 그토록 자주, 또 그토록 치명적으로 종교와 경건 그리고 교회와 결부되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렇다. 그 까닭은 종교가 그릇된 방식으로 무리하게 세상과 단절된 것이기에 이로 인해 세속인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세상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갈망이 세속인들에게는 솔직하지만, 다른 한편에 있는 저들에겐 그다지 솔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과 세상의 재화들을 거부한다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종 사람들을 거부한다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종 사람들을 종교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 된다. 세상에 대한 이런 경시는 일종의 연극이며 위선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늘 이런 위선을 경험한다.

문: 이런 관계가 뒤바뀌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즉 사람들이 먼저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고 종교는 단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답: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세속인들의 종교적 위선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들의 세속적, 정치적, 사회적 혹은 그밖에 다른 목적들 위해서 종교를,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시 끔찍한 해악이다. 사적인 개인들이나 “경건한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종교와 경건을 그와 똑같이 이용할 수 있다.

명예에 눈이 멀고, 권력을 탐하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돈의 힘만 믿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성취를 위해 순전히 가면을 쓰는 경우가 얼마나 비번한 지, 정말 엄청난 일이다. 종교는 그래서 그 뒤에 온갖 사악한 것들이 숨어드는 간막이판과 같은 것이 된다. 종교는 가장 나쁜 형태의 악이 된다. 가면으로서의 종교는 마침내 모든 인간적인 현상들 중에서도 가장 증오스럽고 시급히 극복해야만 할 것이 되고 만다. 모든 예언자들은 그래서 그런 과제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가면의 그러한 형식이 효과적으로 되는 까닭은 바로 사물에는 다른 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면이란 한 사물이 다른 면들의 뒤바뀐 것과 다름없다. 종교적 위선이 파괴된다면 그와 함께 세속적인 것도 불가능해 질 것이다.

문: 슬픈 기색을 하는 것은?

답: 그것 역시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와 경건은 이미 말했듯이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일종의 업적이다. 그것은 성취하기 힘든 업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규정이요, 그것도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규정이다. 종교는 부자유스러운 일이다. 사슬에 묶인 자는 즐거워할 수가 없다. 특히 그것이 인위적인 사슬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그래서 종교와 경은 어두침침한 특색을 띤다. 우리는 또한 모든 공허한 종교란 자연히 우상숭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문: 기독교 역시 그런가?

답: 그것도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다른 선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우상숭배는 음울하게 만든다.

레온하르트 가라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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