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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버리고 따른 이유까지 무너질 때”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20.03.27 16:53
1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마태복음4:18~22/새번역)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주님 부르실 때, 생업도, 가정도 버리고 따라가는 모습은 늘 강렬합니다. 여기에서 동일한 질문을 만나곤 합니다. “어떻게 다 버리고 따를 수 있었을까? 제자들처럼 다 버리고 따를 수 있을까?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지 않은 설교가 이 부분에서 부르심과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다 버리고 따르지 못하는 마음이 스스로 찔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감동적인 모습이지만,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 하나님 나라 역시 달랐습니다. 높은 자리를 두고 서로 갈등한 모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생업과 가정을 다 버려둘 만큼 바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마음과는 다른 동상이몽이었습니다.

▲ Zenos Frudakis, 「freedom」(2001) ⓒSpressatura Images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주님의 뜻은 그럼에도 성취됩니다. 그 과정은 처음 따라나선 목적이 실패함으로써 이뤄집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서게 한 그 목적이 실패했을 때, 성취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된다고 막아서게 한, 그 이유가 좌절되었을 때, 드디어 제자가 됩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기대할 수 있었던 목적이 무너졌을 때, 실은 자기가 무너졌고, 자기가 무너진 그곳에서 참 제자로 깨어납니다. 죽는 게 사는 것이듯 실패가 성공인 부르심입니다.

연극과 영화로 제작된 「톡톡(toc toc)」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섯 명의 강박증 환자가 병원 대기실에서 뒤엉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때나 욕설과 음담패설이 튀어나오는 뚜렛증후군, 끊임없이 셈을 하는 계산강박, 열쇠, 수도, 전기 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확인강박, 모든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강박, 세균공포로 인한 결벽강박, 선을 밟지 않고 대칭에 집착하는 강박. 이 여섯 명의 강박증 환가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려 대기실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1년도 전에 예약해서 만나려한 그 의사는 비행기 연착으로 오지 않고 기다림만 길어집니다.

긴 기다림 속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를 고쳐주기로 합니다. 마지막에는 나머지 다섯이 도와주고 한 사람씩 3분간 강박행동을 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러나 모두들 그 3분을 참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모두 좌절하던 그 순간 깨닫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실패했지만, 그 한 사람을 합심해 도울 때 다섯 명은 자신들도 모르게 강박행동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도와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선을 밟고, 숫자를 놓치고, 더러운 것을 만지고... 자신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시작된 강박행동이 자신에게 집중할 때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도와주려고 온 마음 다해 몰입할 때는 자신을 잊고 시나브로 치유된 것입니다.

자신을 구원하려 할수록 더 묶이고, 타인을 구하려 할 때에야 구원받는 역설입니다. 신앙의 구원은 이와 다를지. 거룩하고 경건한 형식이 자신을 구하는 도구가 될 때, 율법과 같은 강박이 되고 맙니다. 종교적 형식을 지키느라 주변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자유를 잃어버릴 때, 강박증과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19의 힘겨운 상황 속에서 교회는 강박증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예배의 형식을 지켜 자기 구원을 지켜내려 애씁니다. 그 때문에 사랑의 자유를 상실할 때, 집단강박과 얼마나 다릅니까. 다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기대가 실패했을 때, 그제야 참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웃의 불안과 안전을 제물삼아 종교적 형식을 지키겠다는 욕망이 산산이 부서질 때, 그제야 참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실패가 주님의 성공인 길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불안과 아픔에 오롯이 함께 하느라 자기를 잊게 될 때에야 구원받는 길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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