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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신 예수(막11:1-11, 요6:8-15)평화와 개혁 1
나이영 목사(강원영동 CBS 본부장) | 승인 2020.04.04 16:49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군중들은 이날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그런 기사와 이적을 보인 예수를 왕으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의 발밑에는 군중들의 겉옷과 나뭇가지 잎들이 가득 깔렸습니다. 모두들 환호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이제 곧 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다윗왕의 영화를 다시 재현해줄 것으로 기대했고 믿었습니다.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아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임금이 되기 위한 길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바탕 신명나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벅찬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군중들의 바램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있던 당시 종교권력자, 정치권력자들은 예수가 신경 쓰였습니다. 기사와 이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요상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위험한 청년이었습니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하나님의 율법이, 지배체제가 흔들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 위험한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어떻게든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의 행적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말씀의 성취를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긴 했지만, 군중들의 바램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성전에 가셨다가 다시 베다니로 내려가시죠. 임금이 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예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낸 날에도 군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늘 보면, 예수님은 세상의 인기와 군중이 만드는 열기, 무리의 힘 같은 세력을 당신의 것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늘 그런 자리를 피하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와서도 무리의 기대와는 달리 결국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새로운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던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이던 그는 없습니다. 채찍으로 성전을 깨끗게 하던 분노도 다 사라졌습니다. 아무 힘없이 재판을 받고 채찍을 맞고 쓰러집니다. 무리들은 실망합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마저 도망가고 배반합니다. 쓸쓸한 결말입니다. 비참한 최후입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가 임금이 되어서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독립시키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이적을 늘 보여줄 줄 알았는데... 그 기대는 어이없는 반전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는 쓸쓸한 패배자 같지만 진정 세상을 변화시킨 승리자였습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속죄제물로 드려짐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버림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쓰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닌 새로운 가치가, 사랑의 율법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종교권력자, 정치권력자에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의 충동에도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롯이 자기 길을 가셨고 그 길은 홀로 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고, 결국 온 세상을 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 모든 이들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끝없는 욕망을, 우리의 교만을, 우리의 탐욕을, 우리의 편리주의를 돌아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의 탐욕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개인의 이익만 챙겼는지, 얼마나 편리함만 추구했는지...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처럼, 내 욕심을 채우기보다 생명을 자연을 평화를 그리고 이웃을 돌아봤어야 했습니다.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집단들이 횡횡하는 것도 우리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해서가 아닐까... 마음이 무겁습니다. 개인의 부귀영화나 권력, 세상적인 힘을 마다하고 홀로 산으로 가신, 끝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길을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는 국민의 위대한 힘으로 세워져 왔습니다. 수많은 군중의 힘은 권력을 독점하고 잘못 사용하는 세력에 맞서 싸웠고 역사를 바꿔왔습니다. 세계 유례없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국민의 힘으로 이뤄왔습니다. 이는 촛불을 높이 든 그 마음이 옳은 것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개인의 이익이나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 함께 했고, 마음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옳은 것, 바른 것, 온 국민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촛불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당리당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촛불이 춤을 춥니다. 태극기도 생겼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깃발을 높이 든다고 하지만 공허합니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려옵니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 자기주장만을 관철시키고 편을 나누고 상대방을 끌어내려 내 자리를 지키는 당파적 싸움만이 가득합니다. 옳은 것을 위해 내 삶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태극기를 또는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고 남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확증편향과 당리당략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촛불의 힘을 너무 과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 외치는 군중의 바램을 등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십자가를 지십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버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궁극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종료주일을 맞는 이 때,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당파적 정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 군중들의 환호가 주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홀로 산에 가시며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 그 삶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따라가게 하옵소서. 나만의 축복과 나만의 이익, 나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모두 더불어 행복한 세상 만들어가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이 외우고 있는 성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내신 그 시작인 ‘세상을 사랑하심’을 많이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낼 상황이라면  분명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곳 이었을텐데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있는 세상인 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삶은 30여년에 불과했고 공적인 삶도 3년 정도입니다. 이 시간 동안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군중을 이끌고 왕 노릇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프고 힘들어 하는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는 그 순간과 십자가 죽임의 그 때까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육신 입은 예수의 마저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부활을 맡기고 예수의 삶을 살아가야 함이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렇게 살지 않는 이들이 기독교를 대표하고 있곤 합니다. 세상이 욕망하는 ‘크고, 많고, 부요하고, 자랑함’이 부러웠던지, 이를 추구하고 이룬 이들이 대표입내 하며 앞에 나서고, 또 세상은 이들이 대표성을 갖도록 충동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리 살지 않습니다. 작은 목소리들이만 그래도 함께 모아 보았습니다.
눈물이 흘리는 곳 어디든 달려가 함께 하는 목사들입니다. 노숙인·이주민·철거민·해고노동자·분단의 아픔을 껴안고 몸부림침이 기도요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 믿고 지금을 사는 목사들입니다. 생명과 창조의 본뜻을 헤아려 지키고자 하는 목사들입니다.
약하기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렇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약하기에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 내기 위한 이기심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에서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까지 함께 동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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