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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 수난일 ‘희생’평화와 개혁 6
이훈삼 목사(주민교회) | 승인 2020.04.09 17:28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거룩한 금요일입니다. 어떤 요일 앞에 ‘거룩한’이라는 용어를 쉽게 붙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전 오늘 일년에 한번 오늘을 맞이해서 우리는 금요일 앞에 성금요일, 거룩한 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 바로 오늘이고 그날을 우리는, 거룩하다, 성금요일이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이 돌아가신 것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냥 십자가로 부르는 것보다 십자가 처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은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에 반대하는 사람들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극도의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재판하고 처형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처형 방법이 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에게는 이 사형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로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만 이 처형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노예로 있던 사람들이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해서 노예 해방운동을 일으켰을 때 로마 군대는 이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그들 모두를 로마 길가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또는 이틀이나 삼일 동안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빨리 죽여주는 것이 은총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로마 제국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시는 반란을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인데 우리 주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의 처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극형이면서 동시에 극도의 혐오스러운 죄목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은 물론 그 지방과 동네와 가문들 전체가 치욕이었고 잊고 싶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은 두고두고 부끄러움이었고 걸림돌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쉽게 예수를 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 그것이 복음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십자가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 주민교회 이훈삼 목사

우리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 자기 인생을 어떤 가치관으로 보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국 사회를 경악시켰던 신천지 집단이 놀라운 거짓과 술수로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주 개인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이 집단의 꾀임에 빠져서 사람이 변하고 가정이 파탄나고 직장을 그만두고 오직 그곳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방법과 내용은 악한 것이었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 중요한 이유는 계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기독교신앙은 우리가 내 인생이나 세계를 예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1880년대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을 발표했습니다. 이 긴 소설 속에는 수많은 주제들이 숨어 있는데 그 중에 둘째 아들 ‘이반’과 셋째 아들 ‘알료샤’의 대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반은 서구의 합리주의를 대표합니다. 휴머니스트이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자 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진지한 탐구자입니다. 그가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사인 동생 알료샤에게 이렇게 항변합니다.

“알료사, 내가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까 세상에 정말 끔찍한 일들이 많이 있어. 어느 장군의 하인의 아들이 돌맹이를 갖고 놀다가 장군의 개의 다리를 맞혀서 상처가 났는데 그 사실을 알고 그 장군은 밤새도록 그 아이의 옷을 벗겨 놓고 가두어 놓았다가 그 다음날 사냥을 떠나기 전에 그 아이의 부모가 보는 앞에서 사냥개를 풀어서 물어 죽이게 했대. 또 터키인들은 러시아 남부에 쳐들어와서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폭행하고 남자들을 잡아다가 귀에 못을 박아서 밤새도록 세워놓았다가 그 다음날 잔인하게 처형시켰대.”

이반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적어놓은 수첩에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잔인한 고통과 죽임이 빼곡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알료샤, 이 지구라는 것은 지표면에서 중심부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농부처럼 무고한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차 있는 거야.”

이 항변 속에는 하나님이 정의롭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이 땅에 불의는 없고 정의와 사랑만 있어야 될 텐데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으로 얼룩져 있냐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도 한국교회를 향해서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 앞에 한국교회는 정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신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관점을 한쪽에서는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시 대응해야 할 중요한 요점은 알료샤를 통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알료샤는 형의 항변에 대해서 굳이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다가가 끌어안고 이렇게 귀에다 속삭입니다.

“형, 역사란 건물은 이 세상 무고한 사람들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져 있는 거야.”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무고한 분이었는데 우리의 모든, 우리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와 역사의 모순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시고 달려 죽으심으로, 그곳에서 모든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에 기록된대로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의 근원적인 죄, 고통, 눈물, 한숨, 절망, 죽음, 이런 것들을 그 가냘픈 몸에 지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하고 가장 혐오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룩한 날입니다. 성금요일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주님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이 고백을 주의 은총 가운데서 드리는 귀한 날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훈삼 목사(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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