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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껍데기와 혁명의 알맹이산 소망(행전 2:14a, 22-24; 벧전 1:3-9; 요 20:19-31)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0.04.19 17:33

< 1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자, ‘4.19 혁명’ 6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9차에 걸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입니다. 헌법에 독립운동과 혁명정신의 계승을 명기한 나라가 세계에 몇 나라나 있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3.1 독립운동’과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쟁취한 ‘4.19 민주이념’을 헌법전문에 천명했습니다.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2017년의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진실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특별히 올 해 60주년을 기념하는 ‘4.19 혁명’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우리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킨 첫 번째 혁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학생들이 주체였다는 점에서,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4.19혁명’은 그동안 성공하지 못한 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했고, 대한민국헌법 전문에서 삭제되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부침(浮沈)을 겪기도 했지만(1962년 제5차 개헌에서 혁명으로 처음 규정되었다가, 1980년 8차 개헌에서 삭제, 1987년 9차 개헌에서 다시 규정),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려던 혁명정신과 많은 사람들의 희생은 그 후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의 끊임없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결코 실패한 혁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그녀의 ‘혁명론’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로서, 규칙적이고 합법칙적인 별들의 회전운동, 즉 회귀와 반복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혁명’은 ‘별의 순환운동이 미리 정해진 길을 따르며 인간 능력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 즉 불가항력성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 4.19 혁명

한자어로서의 혁명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죽 혁(革)과 목숨 명(命)으로 구성된 이 단어는 ‘명을 바꾼다’는 뜻으로 주역(革卦·彖傳)에 처음 나옵니다. 즉 ‘天地革而四時成,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 革之時大矣哉’(천지혁이사시성, 탕무혁명, 순호천이응호인, 혁지시대의재) 중 ‘湯武革命’(탕무혁명)이 그것입니다. 탕무혁명이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하늘의 뜻, 즉 백성의 바람에 부응해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제거해 멸한 것을 말합니다. 이로써 고대에 천자가 ‘천명’(天命, mandate of Heaven)을 부여받았지만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보고 왕조를 바꾸는 것을 일러 명(命)을 혁(革)하는 것, 즉 천명(天命)을 바꾸는 것을 가리키게 됐고, 이를 ‘혁명’이라고 한 것이지요.

혁명은 단지 정권의 교체, 집권세력과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단어의 본래적 의미는 하늘의 변화가 땅에 미치는 불가항력적인 영향, 하늘의 뜻을 땅 위에서 구현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혁명의 이런 어원적 의미는 우리가 급격하게 ‘구질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촉진하는 과정의 행위’라는 근대적 혁명이념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혁명의 어원적 의미를 회상하는 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이비 혁명들이 역사에서 일어났는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폭력적으로 집권세력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하늘의 뜻에 맞게 변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마흔의 나이에 요절한 시인 신동엽(1930-1969)이 1967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세상 떠나기 2년 전이지요. 동학에서 ‘4.19’에 이르는 혁명의 역사 속에서 알맹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오직 껍데기만 남은 현실을 절규하는 시이지요.

그렇다면 혁명의 알맹이는 누구이고, 혁명의 껍데기는 누구일까요? 혁명의 알맹이는 권력투쟁으로 혁명의 결실을 탐하지 않는 사람, 다만 하늘의 뜻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는데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지요.

혁명의 껍데기는 누구일까요? 쇠붙이로 민중을 죽이고, 빼앗은 권력을 쇠붙이로 지키는 집단이지요. 하늘의 뜻을 땅 위에서 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욕을 충족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진정한 혁명과 함께 ‘이른 새벽에 사라지는 이슬 같은 사람,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 나가는 쭉정이 같은 사람’(호세아서 13,3)입니다.

< 2 >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단어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고, 바로 그 때문에 배제와 차별, 박해와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변 세계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수용하고 순응하지 않고, 급진적 평등과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베드로전서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삶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들과 함께 ‘우리가 마땅히 으뜸가는 책으로 간주해야 할 책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핵심이요 정수가 되는 책’이라고 보았고, 1523년에 이 서신을 주석하면서 이 서신이야말로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고상한 책들 중의 하나요, 올바르고 순수한 복음’이라고 마틴 루터가 평가한, 베드로전서의 수신인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방을 받고 모욕을 당했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법정에 출두해야 했습니다. 비록 로마 제국에 의해 수행된 조직적인 박해가 아직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비타협적인 삶의 방식으로 인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차원에서 배척과 중상모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소를 당해 범죄자로 취급받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이들도 이방사람들처럼,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벧전 4,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이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셨고(벧전 1,3), 이들은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벧전 1,18-19)

서신의 저자는 이런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서신을 썼습니다(벧전 5,12). 저자는 이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박해의 상황에서 확고한 태도를 취하도록 격려하며, 세상질서들과 갈등하면서도 복음에 순종할 때 얻는 힘을 증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련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단련하시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고(벧전 1,6),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권면합니다.(벧전 2,20). 그리고 그런 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고(벧전 4,13),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벧전 4,16)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벧전 1,19),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옛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아야 합니다(벧전 2,15).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벧전 3,9),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벧전 3,11).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산 소망’을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유산이라고 덧붙입니다(벧전 1,4). 이 유산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유산처럼, 썩거나 더러워지거나 낡아 없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유산은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벧전 1,7).

이 비유는 불을 통해 서서히 순금으로 만들어지듯이, 믿음도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단단해지고 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오히려 불을 통해, 다시 말해 시련과 역경을 통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이 분명하게 밝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시련과 단련이 믿음을 더 튼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신앙인도 많습니다. 시련과 박해는 우리의 신앙이 진실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진실성이 입증된 신앙은 금보다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벧전 1,8).

우리는 믿음의 확실성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데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었던 도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정당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신 후,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그러자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말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29)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을 관념이나 형이상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알리바이도 아닙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 아직 현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현실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벧전 1,8).

그리고 이 기쁨과 결합된 믿음의 목표인 영혼의 구원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받고 있습니다(벧전 1,9). 그렇습니다. 믿음 자체가 ‘영혼의 구원’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고, 지금 고난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존재의 보다 높은 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이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심판을 통해 마지막 때에 받게 될 구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새로 태어남’(벧전 1,3)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저자가 말하는 ‘새로 태어남’은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 알려져 있던 것처럼 주술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거나, 특정한 제의를 통해 피안의 세계로 옮겨져 신격화되거나, 황홀경 체험의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새로 태어남’은 종교적 속성이나 도덕적 성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설령 그런 종교 체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벧전 1,24-25).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남’은 우리의 능력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인간의 경건한 정신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창조된 새로운 삶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전도’ 혹은 ‘선교’의 의미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를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저자는 우리가 가진 희망을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설명하는 것을 전도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벧전 3,15-16).

< 3 >

그렇습니다. 오늘의 전도 혹은 선교는 우리의 신앙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에 온유한 마음으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삶이라는 도상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는 겸손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세상의 질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함께 멸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폐허가 된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 이탈리아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한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방지를 막기 위해 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EPA-EFE/FASANI

우리 시대의 전도 혹은 선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에 대하여 말하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COVID-19’가 초래한 엄청난 변화의 한 복판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처에서 정부의 노력과 국민의 헌신과 협력으로 세계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로 교회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교회는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고, 방역활동에 동참하면서, 코로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돕고, 예배와 집회를 온라인으로 대체하는 등 최선을 다해 코로나 극복에 동참해 왔습니다. 시간이 가면 코로나 사태도 진정국면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동반한 엄청난 변화는 역사를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사태가 남긴 절망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비록 바이러스 때문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관계망은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임이 새삼스럽게 확인되었습니다. 누구나 모두를 감염시킬 수 있듯이, 누구도 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집단감염 – 사회적 거리두기 – 국경폐쇄 – 자국중심주의 - 경기침체 - 마스크로 상징되는 비대면 사회 – 철저한 개인주의 – 다시 집단감염’이라는 악순환이 될지, ‘집단치유 – 역사적 거리두기와 역사의 반성 – 국제협력 – 공동대처 – 새로운 경제체제 – 배려와 상생 – 공동체주의 – 집단치유’의 선순환 구조로 갈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적 대유행이 된 이래, 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절망적인 경험도 했지만, 감동과 희망을 주는 경험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히 11,1). 우리는 믿음을 희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렇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면,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세계가 어떤 세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과 증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가 모두 함께 죽을 것이라는 깨달음 위에서,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경제체제의 모색, 정의로운 평화의 수립, 생태계의 보전에서 만들어집니다.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귀한 피와 말씀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어’(벧전 1,18-19) 새로운 존재가 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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