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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신 34:1-8; 행 1:1-11; 요 16:1-15)부활절 여섯째주일(5월1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0.05.15 15:03

1. 兎死狗烹?

오늘 구약 본문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마지막에 관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임종에 앞서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 사명을 받고 40년이 지나 이제 마침내 그 완성 직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신 34:4b)”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고생고생하며 마침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서 있는데, 모세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매정하죠? 지난주 말씀처럼, “베이비부머, 리무버(꼰대 제거기)”입니다. 곧 “꼰대여, 사라지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 느보산 정상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하늘, 높음이라는 의미)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느보산을 다른 쪽에서 보았을 때 부르는 이름)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신 34:1-4)

그냥 이 말씀을 평면적으로 보면, ‘토사구팽(兎死狗烹)’입니다. 토사구팽은 한신(韓信, ?~기원전 196)과 관련된 사자성어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 이후, 장기에 나오는 초(楚)나라의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202년)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195년)이 천하 패권을 다툴 때, 유방과 함께 활약한 장군이 한신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보면, 한신 장군에 관련된 사자성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여기서 회음후열전이란 회음 땅의 후(侯, 왕)인 한신에 관한 전기라는 뜻입니다.

토사구팽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삶아진다.’라는 뜻입니다. 쓸모가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내팽겨 쳐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는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유방이 한신에게 과거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맞서 싸웠던 종리말(鍾離眜, ?~기원전 201년)을 붙잡아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한신은 친구였던 종리말을 숨겨줍니다. 그러자 한신이 반역을 하려고 한다는 상소가 유방에게 올라갑니다. 이후 종리말은 “한신, 당신도 곧 나와 같이 당할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자결을 합니다. 그리고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들고 유방을 찾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한신을 가둡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때 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토사구팽), 높이 나는 새를 다잡고 나면 활은 곳간에 들어가고,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가 있는 신하는 버림받는다 하더니, 천하가 평정되니, 온 힘을 다해 한나라를 세운 내가 죽는구나.”

▲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2012)에서 토사구팽 당하는 한신

따라서 모세의 마지막을 보면 토사구팽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은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답했다’라는 말없이 그냥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 34:5-6).”

그리고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고 이야기 합니다. 또 그런 모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절 말씀이죠?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신 34:8).” 여기서 중요한 것이 5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일단 이 말씀만 기억하고, 사도행전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 多多益善!

오늘 말씀은 누가가 자신의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과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을 서로 연결하는 서론 부분입니다(행 1:1-5).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행 1:6-11). 먼저 서론 부분을 볼까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여기서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 누가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3-5)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신명기 말씀의 ‘말씀대로’와 연결이 됩니다. 이후 말씀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말씀이 이어지죠?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흰 옷 입은 두 사람은 예수의 말씀을 강조하죠?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부터 유대 땅, 그리고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땅과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모든 나라의 회복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신과 관련된 고사성어 중, 다다익선도 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뜻입니다.

▲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느 날 유방이 한신에게 장군으로서 유방 자신의 자질을 평가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폐하께서는 십만 명을 넘지 않는 규모를 지휘할 수 있습니다.” 유방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공은 어떻소?” 그러자 한신은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자 유방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오?” 그러자 한신이 이렇게 답합니다. “폐하께선 병사를 거느리지는 못해도 장수들을 잘 거느리시니, 이것이 제가 폐하께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내리신’ 것이니,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한 데서, 다다익선이란 말이 유래합니다. 한신의 유쾌한 겸양지덕(謙讓之德)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도행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물며 수신자인 데오빌로(Theophilus) 까지도 그렇습니다. 다다익선이죠? 누가복음에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합니다(눅 1:3). 데오빌로는 말 그대로 ‘하나님(theos)’의 ‘사랑을 받는 자(philos)’, 혹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이자 이방인 개종자입니다. 익명의 사람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각하’라 불리니, 적어도 로마의 지도자급 관리 정도는 될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선민이든 이방인이든 복음을 전하는 데는, 또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은 다다익선입니다.

3. 背水之陣!

한신 관련 사자성어에 배수지진(背水之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등 뒤에 물을 두고 진을 치다’입니다. 사실 전쟁에서 강이나 바다를 등 뒤에 두고 적과 마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퇴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신 장군은 이 배수의 진을 통해 1만의 군대로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무찌릅니다. 배수의 진을 친 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 곳에 빠진 후에야 비로소 살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곧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고 말씀하셨습니다.

▲ 조나라와의 싸움에서 배수의 진으로 승리한 한신

아무튼 오늘 복음서 말씀인 요한복음 16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요 13-17장)의 일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행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배수진이라고 봅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떠나신 후,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5-8)

성령께서 오시면 무엇을 하십니까? 바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9-11).”

사실 이 세상은 죄, 의, 심판 모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world)은 헬라어로는 ‘코스모스’인데, 성경 가운데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옵니다. 구약 123회, 신약 197회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만 73회가 나옵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의 영향으로 요한은 코스모스를 영적이며 거룩한 ‘하나님 나라’와 대조해, 물질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역으로 봅니다. 곧, 로마 제국과 그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코스모스는 예수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로마 제국과 황제는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에 의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와 의의 개념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죄’란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을 믿는 것이며, 의란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에 의롭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의, 로마 황제의 의를 비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심판을 받을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통치자, 곧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때로는 죽음의 위협을 당할 것입니다. 실족당할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1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요 16:1-4)

여기서 그 때를 당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고 하죠? 바로 ‘말씀대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말씀대로’ 진리 가운데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2-15)

4. 胯下之辱

때로는 우리는 모세처럼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지 못하고 물러날 때도 있습니다. 이 말은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는다’는 말이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키거나 끝손질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명을 감당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 한 젊은이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한신

 

그리고 배수의 진을 치고 목숨 걸고 사명을 감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과하지욕(胯下之辱)입니다. 이것도 한신 관련 사자성어입니다. 이 말은 ‘사타구니 밑을 기어가는 굴욕’을 뜻합니다.

▲ 화룡점정,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는다

사실 젊었을 때, 한신은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집도 가난해 빌어먹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부모님의 장례도 치룰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신이 고향땅 회음에서 칼을 차고 거리를 걷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한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비록 장대해 칼 차기를 좋아하나, 속은 겁쟁이일 뿐이다. 네가 죽을 용기가 있다면 나를 찌르고,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도록 하라!” 그러자 한신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굽혀 가랑이 밑으로 기어갔습니다. 이 일로 모든 사람들은 한신을 비웃었습니다. 그를 겁쟁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분노를 참았던 한신은 마침내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의 왕이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신은 자신의 이 같은 부끄러운 과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러한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과거의 부끄러운 일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으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복음에 충실한 사람은, 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진리에 붙잡힌 사람은, 과하지욕의 삶을 살아도 그것이 부끄럽지 않고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 모세가 그렇습니다. 모세는 죽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말씀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성입니다. 따라서 그가 묻힌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모세의 승천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세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과도한 해석은 아닙니다. 끝까지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화룡점정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죽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 이후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죠?(신 34:9)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붙잡혀 의로운 삶을 살고 오늘도 배수의 진으로 하나님 나라의 전파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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